20화. 혼세팔신 (3)
[시나리오 퀘스트(우둔한 아버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 우둔한 아버지]
설명: ‘경계의 거주자’를 비롯한 ‘밤(녹스)’의 지배자들은 칠흑왕의 자격을 주장하고 나서는 당신에 대한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에게서 칠흑왕의 높은 격이 느껴지긴 하지만, 아직 주 자아가 되지 못한 데다가, 칠흑왕의 오랜 염원인 ‘꿈’의 종말을 계속 지체하고 있는 것에 저의(底意)를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칠흑왕이 아니라고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너무나 잘 자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춤추는 녹색 불길’의 경우에는 당신이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밤(녹스)’의 저주를 거두어 줄 존재일지도 모른다며 동료들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밤’의 존재들 중 상당수가 그런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큰 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것을 미심쩍어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여태 이견은 좁혀지지 못했고, 이들은 결국 부왕(副王)인 ‘경계의 거주자’의 통제하에 당신에게 하나씩 시험을 주어 과연 우둔한 아버지라 할 수 있는지 평가를 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당신에게 제안하였고, 당신은 그것을 가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혼세팔신이 ‘밤’의 존재들을 대표하여 하나씩 시험을 내어 줄 것입니다. 이것을 차례로 통과하여 우둔한 아버지로 거듭나십시오.
제한 시간: -
제한 조건: 칠흑왕의 자아
달성 조건: 지금부터 주어지는 8개 퀘스트를 모두 완수하십시오.
주의점:
1. 퀘스트를 단 한 개라도 실패할 시, 인정은 불발됩니다.
2. 애매한 결과가 도출될 시, 퀘스트를 건넨 존재의 주관적인 의견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보상: 자격 증명
[현재 혼세팔신 중 두 개체, ‘기어 다니는 혼돈’과 ‘극권의 군주’가 부재중입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경우, 해당 대상인 칠흑왕의 자아를 우둔한 아버지로 인정한 전례가 있으므로 퀘스트 완수로 계산합니다.]
[현재 수행도: 1/8]
[‘극권의 군주’의 신좌는 현재 권속인 라플라스가 이었다고 판단되므로, ‘극권의 군주’의 투표권을 라플라스가 대신 행사합니다.]
[라플라스가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현재 수행도: 2/8]
여러 메시지가 차례로 떠오른 뒤.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마저 시험을 진행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에 잔뜩 화가 난 존재가 있었다.
「시건. 방. 진. 것들!」
연우의 그림자에서부터 부가 나타나며 시퍼런 인페르노 사이트를 불꽃처럼 활활 태웠다.
이전에도 가뜩이나 몸체가 수 미터를 넘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새 다시 몇 미터는 더 커진 그가 내뿜는 기세는 웬만한 혼세팔신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동안 부로 인해 ‘밤’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질서와 혼돈의 힘을 동시에 겸비하면서 새롭게 경지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감히. 누. 가. 주인님. 을. 시험할. 수. 있다. 고. 하는가?」
그런 그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연우의 충복인 그로서는 놈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제발 자신들을 받아들여 달라며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불고 있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비로우신 주인님께서는 저들의 시건방진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노라 말씀하셨다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우선 저 태도부터 고쳐 놓으리라. 그런 생각에 법서까지 꺼내 들었다.
여차하면 바로 공격이라도 할 기세라 혼세팔신들의 분위기도 금세 흉흉해졌다.
「오홍홍홍! 그건 저도 같은 생각이랍니당. 우리 팔신님들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은데 어쩌죵?」
그리고 그런 부를 도와주려는 건지, 라플라스가 본체로 현신하면서 부의 기세를 한껏 더했고.
「뭐야? 또 싸우는 거야? 이제 좀 조용하나 싶더만. 하여간 우리 주인님이 방문하시는 곳에 일이 안 터질 수가 없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칼이나 잘 다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샤논과 한령, 레베카가 차례로 나타나 연우의 옆에 섰다.
[케르눈노스가 자신의 사도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연우의 주요 권속들이 내뿜는 기세는 이미 하나하나가 대단하기 그지없었으니.
그동안 ‘밤’의 막강한 전력 앞에서도 ‘낮’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연우가 칠흑 속에서 수없이 많은 투쟁을 겪으며 격을 상승시킨 만큼, 그의 권속들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성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막상 이렇게 되자, 당황하게 된 쪽은 혼세팔신이었다.
꾸어어-
연우를 압박하려다가 도리어 자신들이 역으로 당하게 생겼으니. 불쾌감을 표출하면서도, 이대로 부딪쳐야 하나 싶어 경계의 거주자를 바라보기 바빴다.
“다들 물러나.”
그때, 연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앞을 막은 권속들에게 말했다.
「하. 지만. 주인. 이시여. 저들은. 주제. 를. 모르는……!」
“나오라고 했을 텐데, 부? 언제부터 내 결정에 그렇게 토를 달았었지? 아니면 지금부터 계속 그렇게 내 의사를 무시할 생각인가?”
부는 연우의 목소리에 담긴 불쾌감을 느끼고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경솔. 했나이다. 용서를!」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빚어낸 일임을 알기에, 너무 그를 다그친 건가 싶기도 했지만.
연우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부의 곁을 지나쳤다.
한편 혼세팔신은 그동안 만만찮게 봤던 부의 저런 태도에 적잖게 놀라거나 충격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만큼 연우에 대해서도 더 높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그림을 원한 건지도 모르고. 부, 저놈은 생각보다 더 능구렁이니까.’
연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리쳤다.
“누가 먼저 할 거지? 불길, 너부터 할 텐가?”
연우는 가장 앞에 있던 춤추는 녹색 불길을 바라봤다.
거대한 불꽃의 형상을 갖춘 녀석은 ‘밤’의 존재들이 연우에 대해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우선 대화를 해 보자며 중재를 하고 나섰던 녀석이었다.
거기다 시나리오 퀘스트 내용에는 춤추는 녹색 불길이 연우에게 호의적인 의사를 표시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래서 먼저 말을 걸었고.
[‘춤추는 녹색 불길’은 자신은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은 이미 당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속내를 밝힙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의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현재 수행도: 3/8]
꾸우웅-
녹옥색으로 빛나던 불길이 더 크게 타올랐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복종하겠다는 의사가 물씬 풍겼다.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검은 풍요의 요신’이 자신이 먼저 시험해 보겠다며 의사를 밝힙니다.]
“좋아. 해 봐.”
[‘검은 풍요의 요신’이 그 전에 칠흑왕의 자아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합니다.]
“뭐지?”
검은 풍요의 요신은 검붉은 안개로 이뤄진 몸뚱이에 검은 촉수와 점액투성이인 아가리가 무수히 많이 나 있는,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풍기는 악취만큼이나 기세도 강한 놈은, 혼세팔신 중에서도 경계 거주자의 다음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의 수많은 입들이 똑같이 들썩이며, 정확하게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우리의 우둔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말.”
“우리의 우둔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말.”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아니. 넌 모른다.”
“아니. 넌 모른다.”
“아니. 알아.”
“모르는군.”
“모르는군.”
“알아.”
순간, 연우가 녀석만이 들을 수 있도록 어기전성을 실어 보냈다.
『‘이름을 잃는다’는 의미잖아?』
“……!”
『이만하면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
“…….”
검은 풍요의 요신의 아가리들이 전부 동시에 꾹 닫혔다.
그리고.
[‘검은 풍요의 요신’이 그것을 전부 감당할 수 있겠냐고 의문을 드러냅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자신이 이룬 풍요(豊饒)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고 경고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너흰 내게 무슨 퀘스트를 줄지 결정만 해.”
[‘검은 풍요의 요신’이 가느다란 눈으로 칠흑왕의 자아를 바라봅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당신의 결심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좋을 대로.”
[권능, ‘요환 세계(妖幻世界)’가 발현됩니다!]
[네 번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파앗!
연우는 검은 풍요의 요신이 빚어내는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서브 퀘스트(‘검은 풍요의 요신’의 환상)이 생성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 ‘검은 풍요의 요신’의 환상]
설명: ‘검은 풍요의 요신’은 피조물들에게 풍요를 내리지만, 그만큼 음험하고 악의적인 것들로 가득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녀가 보이는 풍요로운 환상에서부터 벗어나십시오. 빠져나오지 못할 시, 당신은 ‘검은 풍요의 요신’이 가진 풍요를 위한 비료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풍요? 요신?’
연우는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상체를 일으켰다.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침대도 오늘따라 유달리 푹신해서 끔찍한 두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아주 긴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무엇인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러던 그때.
“연우! 야, 차연우! 일어나서 밥 먹으라는 엄마 말 안 들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어머니가 들어왔다.
언제나 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리운 얼굴.
“어, 엄마?”
“너 또 게임하느라 밤샜지? 엄마가 일찍 자라고 했어, 안 했어? 이제 고3이라는 애가……!”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는 뭣 때문인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셨다.
연우는 왜 그러나 싶어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아. 나, 어제 밤새 게임했었지.’
어쩐지 어제 밤늦게까지 했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 데 왜 여태 기억나지 않다가 지금 떠오르는 걸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직 잠이 덜 깬 걸까?
“나와서 밥 먹어. 아버지랑 정우가 기다려.”
“……네.”
“그리고 오늘부터 인터넷 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어, 엄마! 그건……!”
연우가 화들짝 놀라면서 어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어머니는 아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부엌으로 가고 계셨다.
연우가 후다닥 뒤따라 나가자, 신문을 보다 말고 다급하게 어머니를 붙잡고 대화를 나누시는 아버지와 졸지에 같이 게임을 못 하게 되어 도끼눈을 뜨고 있는 정우가 보였다.
“마, 마누라? 인터넷을 갑자기 끊는다는 건…… 재고 좀 해 주면 안 될까? 내가 애들 감시 잘 할 테니까……. 응?”
“당신은 지금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애들이 고3이 되도록 공부 안 하고 노는 거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아니, 또 왜 나한테 불똥이 튀는…….”
“몰라서 물어? 당신부터가 컴퓨터를 끼고 살잖아! 애 아빠라는 사람이 면학 분위기는 만들어 주지 못할망정!”
“그, 그거야 난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회사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해 대니까 어쩔 수 없었……?”
아버지는 헛소리를 늘어놓으시 다가 어머니의 도끼눈에 입을 꾹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닥치고 있겠습니다.”
“하여간 오늘부터 연우랑 정우 수능 끝날 때까지 컴퓨터, 인터넷 일체 금지야. 알겠어?”
“자, 자기야? 나 이번 주에 중요한 레이드가 잡혀 있는데!”
“엄마! 나 그럼 인강은? 고3이라며! 공부하는 데 안 좋아!”
“당신은 좀 조용하고! 정우, 넌 엄마 노트북 빌려줄 테니까 그걸로 인강 봐.”
엄마 노트북으로는 지뢰 찾기 같은 거밖에 안 될 텐데! 정우의 소리 없는 절규가 퍼지는 가운데.
뚝.
뚝.
어쩐지 연우는 평상시와 다를 게 없는 아침 일상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