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혼세팔신 (4)
아침밥은 맛있었다.
잡곡밥, 고등어조림, 나물무침, 배추김치, 된장찌개…….
정우 녀석은 잠도 더 자지 못하고 억지로 아침을 먹어야 한다며 툴툴거렸지만, 정작 입 안에는 우걱우걱 잘 밀어 넣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학교에서도 꽤나 유명했으니까.
아버지는 컴퓨터를 못 하게 되었다면서 울적한 마음에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몇 번 휘젓다가 어머니한테 혼나기도 하셨고.
그리고 연우는 묵묵히 밥을 먹기만 했다.
“…….”
이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담아 두려는 듯.
어머니께서 차려 주신 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가족들이 하는 대화를 곧잘 들었다.
그러다.
“어? 어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엄마, 저 먼저 일어날게요!”
“도시락 챙겨가야지! 당분간 급식실 리모델링한다고 급식 안 나온다면서!”
“아, 맞다. 잊고 있었네. 땡큐. 고마워요, 엄마!”
정우는 뭐가 그리 급한지 시계를 슬쩍 보더니 가방을 어깨에 메고 후다닥 현관문으로 뛰어갔고.
“나도 가 볼게, 마누라. 오늘 오전에 거래처에서 사람 온대서.”
“잘 다녀와요.”
“저기 그래서 말인데…….”
“네. 안 돼요. 랜선 몰래 가져오면 다음 달 용돈도 같이 몰래 사라질 줄 아세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영혼 없는 미소 앞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려야만 했다.
“에휴! 매일매일 어찌나 저렇게 정신이 없는 건지.”
어머니는 그런 못 말리는 부자를 모두 배웅하고 나서는 부엌으로 돌아와 다시 연우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너처럼 의젓하고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잘하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게요.”
연우가 엷게 웃으며 대답하다가 조용히 먹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그릇이며 반찬들까지, 어느새 텅텅 비어 있었다.
“그새 다 먹었네?”
“맛있네요.”
“배 엄청 부를 텐데. 억지로 먹은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절대.”
“그래. 다행이구나. 입맛에 잘 맞은 것 같아서.”
어머니는 여전히 따스한 얼굴을 하신 채로,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연우에게 물었다.
“이제 갈 거니?”
“…….”
많은 의문이 담긴 말.
연우는 아주 잠깐 대답을 하지 않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환상에 사로잡혔었다지만.
지금은 자신이 누군지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이곳도 네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꿈’이 될 수 있단다.”
연우는 칠흑 속에서 여러 자아들과 다투면서 수많은 ‘꿈’을 꾸었고, 그곳에서 여러 번의 삶을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는 현실이었던 삶도 있었고, 단순한 허상이나 상상에 불과한 삶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현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칠흑 속에는 무수히 많은 ‘꿈’들이 빚어지며, 그 ‘꿈’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새로운 세계였으니까.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게 아니었으며, 그 속에 있는 한은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곳도 마찬가지리라.
비록 검은 풍요의 요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해도, 결국 연우의 행복했던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한 세계였다.
실제로는 이맘때쯤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고, 아버지는 실종되어 집안 분위기가 우울했었다지만.
당시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있던 ‘평온한 일상’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연우가 행동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꿈’으로 실현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칠흑이 가진 힘이었으며. 깊은 잠에 빠진 존재에게 있어 ‘꿈’이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꼭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어도 괜찮단다. 좀 더 즐긴다고 해서 너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이곳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만큼 다 보내다가 다시 되돌아가도 나쁘지는 않잖니?”
하지만.
“죄송합니다.”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바라는 건…… ‘꿈’이 아닙니다. 그 밖에 있는 현실이지.”
“그렇구나. 아쉽네? 우리 아들이랑 더 길게 이야기 나눠 보고 싶었는데.”
어머니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맺혔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그래. 천천히 오렴.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치면 안 되잖니.”
치칙, 치치칙-
어머니의 모습에 노이즈가 조금씩 끼기 시작했다. 세상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콰직!
퍼어엉!
연우를 둘러싸던 세상이 유리가 깨지듯 와르르 무너졌다.
[서브 퀘스트(‘검은 풍요의 요신’의 환상)를 완수하였습니다!] [현재 수행도: 4/8]
[‘검은 풍요의 요신’이 환상 속에서 당신이 내린 선택에 가만히 고민을 표시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당신이 방금 전에 했던 대답을 잘 알겠다고 말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에게서 풍기는 사념에는 긍정적인 기색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이름을 잃는다던 연우의 대답이 절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소망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밀어내고 원래 있던 길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결심이 굳게 서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다. 음. 은.
누.구.
경계의 거주자는 그런 검은 풍요의 요신을 바라보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면서 동공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다음 타자를 정하려는데.
츠츠츠-
연우와 경계의 거주자 앞으로 희뿌연 안개가 조금씩 차올랐다. 형체가 전혀 잡히지 않는 존재였다.
[‘이름 없는 안개’가 이번에는 자신이 시험해 보겠다며 앞으로 나섭니다.]
소. 텝.
악. 의. 는. 허. 락. 지. 않.
[‘이름 없는 안개’가 명명되지 않을 존재인 아버지를 자처하는 작자가 어떤 자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라고 의사를 밝힙니다.]
[‘이름 없는 안개’는 ‘검은 풍요의 요신’이 대체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알고 싶노라고 말합니다.]
경계의 거주자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과연 녀석을 다음 순번으로 정해도 되는 것인지를.
이름 없는 안개는 ‘밤’의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비밀에 붙여진 존재였다. 이름이 없다는 건, 존재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불명확했다.
자기 의사를 갖고는 있다지만, 그마저도 희미하니. 정말 살아 있다고 해야 할지도 의문인 존재.
하지만 그렇기에 이름 없는 안개는 근본적으로 가장 혼돈에 가까우며, ‘밤’의 태초와 닮아 있다. 즉, 혼세팔신 중에서도 가장 우둔한 아버지를 닮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름 없는 안개는 아버지에 대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아버지를 자처하는 연우에게 가장 적의를 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계의 거주자가 우려하는 점도 바로 이 점이었다.
지금 그들은 연우를 두고 정말 아버지라 할 수 있는지 판별하기 위해 나선 것이지, 각자의 감정에 휩쓸려 악의를 보이고자 나선 자리가 절대 아니었다.
신적인 존재라고 해서 모두가 이성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밤’의 존재들은 대개 사고가 정형화되어 있지 못해 감정적으로 행동하거나, 충동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다.
항상 경계 거주자의 골치를 썩이던 기어 다니는 혼돈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지식을 쌓고, ‘낮’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만…… 호기심으로 움직이는 충동적인 습관을 버리지 못해 결국 연우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으니.
이름 없는 안개는 더더욱 참지 못하고 연우에게 악의만 보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름 없는 안개’가 자신의 권리를 가져갈 것이냐 묻습니다.]
어. 쩔. 수. 없. 군.
나. 서. 라.
평상시 이렇게까지 이름 없는 안개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 적이 없었기에 결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개가 차오르면서 연우를 둘러싸고.
다섯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름 없는 안개’의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 * *
[서브 퀘스트 / ‘이름 없는 안개’의 조각들]
설명: ‘이름 없는 안개’는 안개처럼 낱낱이 해체되어 수많은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이름 없는 안개’라는 신명(神名)조차 실상은 그를 관측한 존재들이 임시로 붙인 이름일 뿐, 그를 정의하는 진짜 이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이름 없는 안개’에게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이번에 연우를 둘러싼 세계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시간과 순서로 이어진 곳이었다.
어떤 남자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고 있는데, 그것을 멀리서 보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급사하고 만다.
한 소년이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자그마한 참새가 날아와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 납치하고, 사지가 절단된 채로 끔찍하게 죽은 시체가 자신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서 방긋방긋 웃기도 했다.
좀비에게 맞아 죽는 용, 머리 아홉 달린 인간의 복수극, 팔이 5미터나 되는 엘프의 팔 굽혀 펴기…….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아니, 이해가 아예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이야기들 같았다.
하지만.
‘이거…… 전부 이름 없는 안개인가?’
연우는 어쩐지 그것들에서 하나 같이 이름 없는 안개의 신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형체가 없이 파편화된 힘들.
이. 건. 전. 부.
나. 의. 이. 야. 기.
신. 화. 다.
그러던 그때, 연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머리 위로 사념이 웅웅 울렸다.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이름 없는 안개가 중구난방으로 내뿜던 사념이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
『절대 ‘꿈’으로 성립하지 못하고, 덧없이 사라지기만 한 존재들의 이야기. 현실. 사실. 그것으로 이뤄진 집합체가 바로 나다.』
칠흑왕이 꾸는 ‘꿈’이 모두 세계가 되고 우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이 잠들 때마다 꾸는 꿈들이 모두 완결성을 띠고, 오랫동안 이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칠흑왕의 ‘꿈’도 어떤 것은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날 때도 있고, 잘 이어지다가 도중이 끊길 때도 있다. 너무 중구난방으로 사실들이 이어져서 제대로 된 우주라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으며, 그럴 때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 울부짖어야만 했다.
그러다 그런 ‘꿈’들은 금세 허물어져 덧없는 허상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거기서 남은 찌꺼기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겹겹이 쌓이고 만다. 그것들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서로 뒤섞이고 만다. 어차피 이렇다 할 형체가 없던 것들이니 합쳐지는 것도 아주 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군집체를 이루며 점차 하나의 의사를 표시하기 시작하니. 그게 바로 이름 없는 안개였다.
애당초 이름을 가질 수가 없었던 찌꺼기들의 혼합체. 안개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형체가 없기 때문이었으니.
그는 칠흑왕과 함께 태어나 그에게 기생하기 시작했던 존재. 분신이자 조각, 혹은 그림자라 할 수 있기에 칠흑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그는 이름을 갖고 싶기도 했다. 언제나 조용히 살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한편에는 갈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아니, 자신‘들’도 완벽해 지고 싶다는 갈망을.
그리고.
『나와 나를 이루는 모든 이들을 하나로 묶을 이름을 지어라. 네가 진짜 나…… 아니, 우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이름을 어떻게 지어 주면 되지?”
『우리를 태어나게 해 준 건 아버지다. 그렇다면 그것도 알아서 잘 해야지. 세상 어느 아버지가 자식의 이름을 짓는 데 난감함을 느낀단 말이냐?』
연우는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야 쉽지.”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가 작명 센스가 제법 좋아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