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혼세팔신 (5)
『주인.』
그러던 그때, 다른 권속들과 마찬가지로 복귀했던 니케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그의 불꽃 속성에 거의 동화되다시피 하여 말이 거의 없는 편인 녀석은 말투도 어느새 변성기가 지나 단단하고 진중해져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과묵한 녀석이 갑자기 지금 왜 이렇게 말을 꺼내는 걸까.
‘왜?’
그래서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양심 있어?』
‘…….’
연우는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간만에 우리 니케가 옳은 소리를 하는군.』
네메시스의 대답도 덩달아 같이 들려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어 대는 웃음소리가 같이 섞여 있었다.
연우의 미간에 골이 짙게 팼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니케나 네메시스는 왜 이리도 자신의 작명을 싫어하는 건지.
그냥 취향이 다른 것이겠지.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들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역시 우리 주인. 절대 남의 말 따윈 귀담아듣지 않지.』
어쩐지 체념 어린 듯한 니케의 말을 뒤로한 채.
연우는 이름 없는 안개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하게는 녀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보았다.
끼아악!
[‘이름 없는 안개’의 일부가 비명을 지릅니다.]
쿠아아아-
[‘이름 없는 안개’의 일부가 제발 끝내 달라고 절규합니다.]
퀴퀴퀴퀴!
[‘이름 없는 안개’의 일부가 당신이 아버지라면 이것을 전부 끝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름 없는 안개의 일부’가 자신들을 완성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세계가 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꿈’의 조각들. 그 속에는 어그러지고 망가진 것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분명히 이제는 사라졌어도 진즉에 사라졌을 것들이지만, 저것들은 반대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안개 속에서 계속 비명을 질러 대고 있는 것이다. 고통스럽다고. 아프다고. 그리고 그런 원념들이 잔뜩 뭉쳐 만들어진 게 이름 없는 안개였다.
“…….”
연우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이름 없는 안개는 연우가 뭘 할지 몰라 아주 잠깐 움찔거렸지만, 연우는 그냥 무시하고 안개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내줘, 끝, 발, 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사지가 기괴하게 돌아간 채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내였다.
마치 헝겊을 기워 만든 것 같은 세계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녀석은 꺼내는 말조차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지옥 같은 굴레를 제발 끝내 달라는 말인 것 같았다.
연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사내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며 손을 뻗었고, 사내도 마치 구원의 손길을 바라듯 연우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퍼억!
사내의 육체가 풍선처럼 그대로 터져 나갔다.
화르르륵-
거기다 연우에게서 뻗쳐 나온 검고 붉은 불길이 사내가 있던 세계를 단숨에 불살랐다.
이름 없는 안개의 한가운데에 바람구멍이 휑하니 뚫리면서 검은 재가 흩날렸다.
「와……. 역시 우리 주인님 인성. 보살펴 달라고 말하는 불쌍한 중생한테 다짜고짜 선빵부터 날리다니.」
샤논의 혼잣말을 뒤로 한 채, 이름 없는 안개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쿠오오오!
[‘이름 없는 안개’가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며 거칠게 항의합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꿈틀거렸다. 지어 달라는 이름은 지어 주지 않고 다짜고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연우를 막고자 했지만, 이미 연우는 마력을 잔뜩 끌어 올리고 있었다.
[하늘 날개]
검붉은 불길이 곳곳으로 회오리 치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던 세계 아닌 세계들이 모조리 태워졌다. 제대로 된 ‘꿈’이 되지 못하고 한낱 미몽(迷夢)에 불과했던 것들은 단숨에 박살 나고, 조각나며, 불살라졌다.
[‘이름 없는 안개’가 고통에 몸 부림칩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권능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불발됩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칠흑왕의 자아에 저항하고자 합니다.]
[불발됩니다.]
……
[갑작스러운 공격에 모든 ‘밤’의 존재들이 크게 놀랍니다.]
[혼세팔신이 기겁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칠흑왕의 자아가 이빨을 드러낸다며 적의를 표시합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이름 없는 안개’를 구하기 위해 권능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함부로 개입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적의를 드러내는 ‘밤(녹스)’의 존재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밤(녹스)’이 혼란에 치닫습니다!]
[‘밤(녹스)’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
‘밤’은 금세 혼란에 잠기고 말았다.
여전히 검은 불길에 휩싸인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름 없는 안개와 그런 녀석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연우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하도록 날을 세우는 존재들까지.
단숨에 두 개의 패로 갈라진 녀석들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약고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적의 어린 사념들이 수도 없이 오고 가면서 분위기도 팽팽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분쟁이 발발하지 않은 건, 칠흑왕의 자아인 연우가 여전히 부담스러운 존재인 데다가, 경계의 거주자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연우를 따라 들어온 ‘낮’의 존재들이나, 권속들은 그들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가 되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연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밤’과 완전히 척을 져야 하는 입장인데, 도리어 그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의 편을 들어 주고 있으니.
「대체 이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우리 주인이 친 사고는 어째 나날이 갈수록 규모만 커져 가누.」
「잔말 말고 경계 똑바로 서라. 어디서 칼이 날아들지 모르니.」
「흐흐. 걱정 말라고.」
샤논과 한령이 앞뒤로 서고, 레베카가 연우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가장 뒤에서 부는 인페르노 사이트를 활활 태우면서 망자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어어어!
쿠오오!
망자 거인들이 하나같이 거친 함성을 내지르면서 ‘밤’의 존재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두 마리의 사룡이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연우를 보호하듯이 에워싸면서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게 보호하는 데 치중했다.
[‘경계의 거주자’가 ‘밤(녹스)’을 내려다봅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칠흑왕의 자아가 벌이는 행사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며 ‘밤(녹스)’에 포고령을 내립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이런저런 고뇌에 잠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밤’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사념들이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경계의 거주자’가 이것은 우둔한 아버지의 시험이니 조금만 더 지켜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경계의 거주자’의 결정에 불만을 가지지만, 차마 사념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칠흑왕의 자아를 한껏 노려봅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침묵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불길을 더 화려하게 태웁니다.]
……
[‘밤(녹스)’의 모든 존재들이 침묵에 잠깁니다!]
혼세팔신을 비롯한 ‘밤’의 존재들이 모두 연우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동안.
[‘이름 없는 안개’를 이루고 있던 망가진 ‘꿈’의 상당수가 소각되고 말았습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마지막 남은 숨을 헐떡입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던 이름 없는 안개는 이제 옅은 거죽만이 남은 채 마지막 남은 사념만을 태우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사념은 갑자기 자신에게 공세를 가한 연우에 대한 분노와 자신을 끝까지 도와주지 않은 동료들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연우에게 저항하고 싶어도, 이미 격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칠흑왕만큼이나 오랜 삶을 살아오고, 그만큼 강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래 봤자 칠흑왕의 그림자이므로 자아인 연우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츠츠츠-
연우가 앞으로 손을 뻗자, 이름 없는 안개를 불사르고 남은 재가 일제히 손아귀 쪽으로 빨려 들어 왔다.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다시 단단히 압축되면서 구슬의 형태가 되었으니.
구슬은 이름 없는 안개처럼 잿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투명할 것처럼 아주 맑지만 속은 보이지 않는 구슬.
어쩌면 이름 없는 안개의 유해(遺骸)라고 봐도 될 것이었다.
[‘이름 없는 안개’가 당신을 원통하게 바라봅니다.]
“네가 물었지? 이름을 지어 달라고.”
[‘이름 없는 안개’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격하게 분노합니다.]
“이게 내 대답이다.”
연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구슬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막대한 양의 사념을 삼킵니다!]
[영혼석(오만·식욕·색욕)이 격하게 반응합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다 죽어 가는 눈으로 칠흑왕의 자아를 바라봅니다.]
화아아!
간만에 발동한 하데스의 식령검은 이름 없는 안개,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사념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그럴수록 연우를 이루고 있던 그림자가 크게 꿀렁였다.
그리고 연우는 점차 감겨 가는 이름 없는 안개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차연우.”
[‘이름 없는 안개’의 저항이 갑자기 정지합니다.]
[‘밤(녹스)’의 모든 시선이 칠흑왕의 자아에게로 쏠립니다!]
“한평생 칠흑왕의 그림자로 살아왔다고 했지? 그가 남긴 찌꺼기이자 허물로 살았다고. 그렇다는 건 너 역시 따지자면 칠흑왕의 일부라는 거고…… 너 역시 ‘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칠흑왕이 될 거다. 그리고 너에게 내 이름을 줄 테니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삶을 살아라. 돌아와라, 원래 있던 곳으로.”
『……하지만, 그대는.』
다시 통일된, 이름 없는 안개의 사념은 어딘지 모르게 얕은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대는 이름을 잃을 것이라 하지 않았나?』
“칠흑이 왜 칠흑인지 아나?”
『……?』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칠흑인 거다.”
『……!』
“한결같이 있지. 그게 이름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잖나? 아버지란 존재를 칭할 이름이 없다고 해서 아버지가 없어지는 건 아닐 텐데?”
『…….』
“그러니까 돌아와라.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연우의 두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바로 너고, 네가 바로 나다. 그리고 나는 ‘나’이기에 칠흑은 곧 내가 될 거다.”
연우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니면 그냥 아버지의 품에 귀의한다고 봐도 되지 않나?”
『그런 거…… 라면…… 괜……찮겠지.』
츠츠츠-
이름 없는 안개의 마지막 남은 사념이 잘게 부서지면서 똑같이 연우의 그림자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연우는 커다란 무언가가 자신에게 깃들고, 이어 하나로 융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 여태껏 미완성이던 존재들이 칠흑에 완전히 녹아들면서 부족분을 채우고, 완전성을 갖추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씩 여러 개의 ‘꿈’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고마운…….」
「우리 아버지…….」
「한결같으시기에 우둔한, 아버지…….」
「감사하나이다. 우리를 품어 주셔서.」
그건 여태 칠흑에서 벗어난 커다란 마성을 흡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철컥.
철컥.
그렇게 또 한 번 격(格)이 상승하면서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인과율이 채워졌다.
그리고 연우가 다시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봤을 때.
[‘밤(녹스)’의 존재들이 충격에 젖은 눈동자로 바라봅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가만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연우는 경계의 거주자를 비롯한 여러 ‘밤’의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되어 자신들을 품어 주겠다고 말한 연우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말했을 텐데?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너희들이 품고 있는 저주나 원망, 소원 따위를 가만히 들어 주는 것도 아버지가 할 일이지.”
연우는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던 불결의 근원과 멸망을 노래하는 자를 돌아봤다.
“그럼 다음은 누구지?”
그 말에.
[‘불결의 근원’이 고개를 숙입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칠흑왕의 자아 앞에 엎드립니다.]
당. 신. 이.
정. 말.
우. 릴. 품. 어. 줄.
그. 런. 다. 면.
아. 버. 지. 맞.
둘은 칠흑왕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던 이름 없는 안개가 곧 자신이라면서 품어 준 연우를 보며, 완전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뒤따라 ‘밤’의 모든 존재들이 일제히 몸을 조아렸으니.
우-
우우- 우-
[‘이름 없는 안개’의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하였습니다.]
[‘불결의 근원’이 당신을 인정하였습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당신을 아버지로 모시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현재 수행도: 7/8]
……
[‘밤(녹스)’의 모든 존재들이 당신에게 고개를 조아립니다!]
[‘밤(녹스)’이 칠흑왕의 자아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밤’의 모든 존재들이,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다던 타계의 신이 일제히 연우에게 경애와 숭배를 바치는 광경은 일대 장관이라 할 수 있었으니.
「이것들 단체로 미쳤네. 죄다 인생, 아니, 신생 망치려고…… 왜 하필 여기로 걸어 들어오냐.」
오히려 그 앞에 놓인 권속들이 얼떨떨해할 정도였다. 샤논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하지만.
연우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경계의 거주자 쪽을 돌아봤다.
녀석의 눈동자는 아직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대답은?”
[‘경계의 거주자’가 침묵합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겨우 입을 뗍니다.]
나. 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