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혼세팔신 (6)
결. 정. 하. 지. 못. 했. 다.
경계의 거주자가 한 말에 ‘밤’은 모두 깊은 적막에 잠겼다.
사실상 ‘밤’을 그동안 지휘해 온 것은 그였으니, 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저울추가 그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경계의 거주자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답을 보류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군.’
연우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 결정은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내려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걸 눈치채고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긴가민가했었는데…… 이야기를 나눠 보면 볼수록, 그의 눈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이름 없는 안개를 받아들이면서 격이 오른 지금은 더 쉽게 속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 지. 막.
시. 험. 뒤. 에.
[마지막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서브 퀘스트(‘경계의 거주자’의 관망)가 생성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 ‘경계의 거주자’의 관망]
설명: 당신은 현재 ‘밤(녹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존재들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이미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지 대세가 기운다면 바로 따를 의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의 거주자’는 여기에 대한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경계의 거주자’는 항상 아슬아슬한 경계 위만을 걸어 다니고 주시하는 존재입니다. 생과 사, 과거와 현재와 미래, 무너지고 생성되는 ‘꿈’의 단면들을 걸어 다니고 주시하며, 그 눈은 인과율마 저 넘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저 머나먼 종말의 종말까지 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의 거주자’는 그런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절대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발설한 적이 없습니다.
우둔한 아버지가 언제가 되어야 진정한 ‘꿈’에서 깨어나 자신들을 안아 주시냐며 묻는 ‘밤(녹스)’의 질문에도 항상 침묵으로만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경계의 거주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여태껏 침묵으로만 대답하던 인과율의 너머에 있던 종말의 종말이 드디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둔한 아버지가 진정으로 기침(起寢)하려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며, 그것을 해낼 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계의 거주자’는 당신이 우둔한 아버지가 직접 되어서 그를 일으키는 몸이 될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우둔한 아버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는 건지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보는 당신의 미래는 온통 칠흑색으로만 덮여 있어 정확한 과정과 결과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계의 거주자’는 당신이 과연 어떤 위치에 설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며 종말의 종말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우둔한 아버지의 기침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태곳적부터 가지고 있던 강렬한 열망(熱望)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경계의 거주자’가 품고 있던 열망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 주십시오.
연우는 퀘스트 창을 보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경계의 거주자가 보지 못한다는 자신의 미래가 언뜻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삼신산에서 영귀도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이상하게 자신의 미래를 읽을 수가 없다고. 당시에는 필멸자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천마도 자신이 특이점(特異點)으로 잡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고, 브라함과 아테나가 언젠가 보았다는 예지에도 자신의 모습은 온통 불투명한 것들투성이었다.
그런데 경계의 거주자가 다시 그것을 언급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어쩌면 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구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
정확하게는 연우, 자신이 결정하고 굴리기 시작한 수레바퀴였지만.
여하튼 경계의 거주자는 그런 자신의 미래를 보고, 그것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 같았다.
물론, 연우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어떻게 열망을 보여 주라는 거지? 당장 칠흑으로 돌아가서 남은 마성들을 다 때려잡으라는 건가?”
그. 런. 다. 면.
시. 간. 이. 너. 무. 잡. 히. 겠.
“알고 있군. 언젠간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제야말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어떻게 거기에 계시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실 여기에 계속 발이 붙잡혀 있는 것도 그로서는 조급할 뿐이었다.
“너희 쪽도 그런 것 같은데.”
경계의 거주자는 슬쩍 ‘밤’의 존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경계의 거주자’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결정을 내리라며 재촉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경계의 거주자’에게 생각이 궁금하다며 채근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드디어 아버지께서 기침할 것이 분명하다며 불길을 활활 태웁니다!]
……
[‘밤(녹스)’의 모든 존재들이 ‘경계의 거주자’에게 결정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밤’의 존재들은 경계의 거주자를 재촉하거나 회유를 하려 하지, 누구도 겁박하거나 강제할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합친다 하여도, 절대 경계의 거주자에 비빌 것은 아니었으니까.
혼세팔신이라는 한 묶음으로 분류된다고 해도, 그는 애당초 다른 존재들과 격(格)이 달랐다.
나. 는.
꾸우우-
경계의 거주자에게서 구슬픈 소리가 났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깊은 울림.
따. 르. 는. 건.
방. 해. 하. 지. 않. 겠. 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경계의 거주자’의 사념에 경악을 표시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경계의 거주자’에게 지금 당신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며 묻습니다!]
……
안. 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깊은 숨을 삼킵니다!]
[‘불결의 근원’이 큰 충격에 젖어 모든 사념이 정지합니다!]
……
[‘밤(녹스)’의 모든 존재들이 침묵합니다!]
밤. 을.
해. 체. 하. 겠. 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기함을 %$#%$%@…….]
[‘불결의 근원’이 경악을 $&*(&^!…….]
……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해석 불가.]
[노출되는 정보들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임시 번역도 불가합니다.]
[정형화되지 않은 여러 사념들로 ‘밤(녹스)’이 가득 찹니다!]
세상은 온통 ‘밤’의 존재들이 내뱉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도저히 뜻을 읽을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혼란으로 가득해지고, 비명과 절규가 난무했다.
수도 없이 많은 활자들이 튀어 나왔다가 사그라지는 등, 도저히 혼란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경계의 거주자가 던진 충격은 너무나 컸다.
여태 수도 없이 ‘굴레’가 굴러가고, ‘꿈’이 미명하에 사라지는 동안에도 단 한 번의 변화 없이 꿋꿋하게 제자리에서 칠흑왕이 깨어나기만을 바라던 ‘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런 ‘밤’의 체재를 모두 해체시키겠다는 선언은 언제나 정적인 삶만을 살아왔던 ‘밤’의 존재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연우, 아니, 정확하게는 정우의 사념체 쪽도 마찬가 지였다.
[‘낮(에로스)’의 후계자가 크게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잇지 못합니다!]
[아가레스가 침묵에…….]
[펜리르가 적막에…….]
……
[‘낮(에로스)’이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그동안 ‘밤’이 ‘꿈’에 절대 개입할 수 없도록 오랫동안 싸웠고, 메타트론과 바알의 유지로 운영되던 곳이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야, 이건? 그럼 그동안 뭐 빠지게 열심히 싸워 댔던 건 뭔데!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뺑이 안 치고 뒤에서 노가리나 깠지!」
샤논은 다른 이유로 머리를 쥐어 싸매면서 절규했지만.
『형…… 대체……?』
그리고 정우의 사념체는 그런 연우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형. 그의 입가에는 그런 말이 계속 맴돌았다.
짧게나마 ‘낮’을 이끄는 존재가 되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연우가 하려는 건 뭔가가 이상하다.
이건 절대 연우가 단순히 ‘밤’을 품에 담으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이 절대 심상치 않은 게 분명한데…… 도저히 그 의미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연우만은 여전히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을 한 채로 있었다.
그가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밤’의 존재들에게로 격을 발산했다.
한순간 휘몰아치는 기풍에 ‘밤’의 동요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연우에게 충성을 바쳤던 모든 존재들이 더 이상 경계의 거주자가 아닌, 연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우는 그들을 일일이 굽어보면서.
그들을 모두 품고도 남을 만큼 아득한 격으로 그들을 껴안으면서, 외쳤다.
“내게로 깃들라.”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혼세팔신을 비롯해 ‘밤’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존재들이 일제히 연우에게로 달려들었다.
‘낮’은 물론, ‘꿈’을 몇 번이고 부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존재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은 언뜻 두렵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연우는 언제든지 오라며 양팔을 좌우로 활짝 펼친 채로 서 있었고, 그런 그의 등 뒤로 한 쌍의 하늘 날개가 길게 쭉 뽑혀 나와 그림자를 넓게 드리웠다.
그리고 중첩된 공간 위로는 본체인 거마신룡이 나타나 세로로 난 황금색 동공을 크게 뜨고 있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가장 먼저 연우에게로 깃들었다. 이름 없는 안개가 그러했던 것처럼 잘게 쪼개지면서 그림자로 흡수되는 그녀의 사념은 온통 흥분과 희망, 그리고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우울함과 절망의 기색만이 감돌던 ‘밤’은 어느새 여태껏 찾아볼 수 없었던 열락의 폭풍이 감돌았다.
꾸우우우-
키아아악!
캭! 캭!
당. 신. 은.
우. 리. 의. 아. 버. 지.
우. 리. 를.
인. 도. 하. 소. 서.
바. 른. 길.
당. 신. 이. 계. 신. 곳.
왕. 좌. 의. 곁. 으. 로.
춤추는 녹색 불길은 짙은 불꽃을 피워 내면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고, 불결의 근원과 멸망을 노래하는 자는 연우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대로 잠겨 들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외신들이며 비교적 격이 낮은 타계의 신들이 줄줄이 따랐다.
그리고 동시에 여태껏 무질서와 혼돈을 이루던 ‘밤’도 똑같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마치 검게 칠한 스케치북 종이를 아래로 천천히 뜯어내듯이, ‘밤’도 똑같이 구겨지고 찢기면서 차례로 연우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휘휘휘!
연우는 ‘밤’을 구성하는 모든 것 들을 받아들였다. 존재와 법칙을 비롯해 그곳에 남은 사념, 시간, 설정까지도 전부 다.
찰칵.
찰칵.
연우는 그 와중에도 체내에 설정되는 수많은 인과율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그가 칠흑을 빠져나와 눈을 떴을 때보다도 훨씬 방대한 양.
이 정도만 있다면 충분히 ‘꿈’에서 하려던 일을 무사히 끝마치고, 바라던 대로 마지막까지 닿을 수 있을 듯싶었다.
그림자 속에서는 수많은 목소리 들이 들려왔다. 정형화되지 않고 각기 제멋대로 떠드는 목소리들이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같이 연우에 대한 찬양과 칭송, 그리고 숭배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이제 현인과도 겨룰 만한 건가.’
연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미 완전히 사라진, 아니, 허물어진 ‘밤’의 세상에서. 옅어지는 세계 속에서 가만히 홀로 눈을 뜨고 있는 경계의 거주자를 보면서 물었다.
“계속 지켜보겠다고 했지?”
그. 것. 이.
제. 가. 할. 일. 입. 니. 다.
지. 켜. 보. 는. 것.
그. 것. 제. 마. 지. 막. 사. 명.
말투는 공손했다.
마치 진짜 아버지라도 뵙는 아들처럼.
“기대해도 좋을 거야.”
연우는 그 말을 하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림자 아래로 공허가 활짝 열리면서 그와 함께 왔던 ‘낮’의 존재들도 모두 그 너머에 있을 다른 공간으로 넘어갔다.
정우의 영혼과 레아가 있는 칠흑의 외곽 지대로.
경계의 거주자는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연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커다란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암흑이 찾아오고, 곧 ‘밤’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진짜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