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49화 (749/862)

24화. 혼세팔신 (7)

경계의 거주자가 다시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오시었소?”

그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모든 경계 선상 위를 걷는 자. 당연히 원한다면 의지가 닿는 곳 어디에서든 눈을 뜨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케아노스가 서 있었다.

담담한 말투를 하면서, 입가에는 쓴웃음을 지은 채로.

그. 렇. 다.

경계의 거주자가 내뱉는 사념은 아주 짧았다.

마치 너와는 대화를 길게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오케아노스의 쓴웃음도 자연스레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대답…… 결국 이런 것이었군.”

비마질다라 때와 마찬가지로, 오케아노스는 경계의 거주자에게도 찾아갔다.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겠냐고.

그들은 각 ‘꿈’에서 낙오된 짐승들로만 이뤄진 곳이었고, 절대 사라지지 않을 ‘꿈’인 피안을 만들고자 한다는 점에서 경계의 거주자와 지향점은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오케아노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헛소리 말라며 날을 세우던 경계의 거주자에게 오히려 잘 생각을 해 보라면서 한마디를 툭던지고 훌쩍 떠났다.

잘 생각해 본다면 당신과 우리의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경계의 거주자는 연우를 만났고, 대답을 보류하긴 했다지만 ‘밤’을 해체한다는 결정을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경계의 거주자는 이미 오케아노스의 제안에 답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 는. 아. 버. 지. 의. 자. 식.

자신은 칠흑왕의 아들이니 절대 배반 따윈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당신이야말로 칠흑왕이 가장 아끼던 자식이었지. 그리고 칠흑왕을 가장 열렬히 좇던 자식이 당신이기도 하고. 하나, 그 ‘아낀다’는 것이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었소? 아니,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오케아노스는 딱하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었다.

“칠흑왕을 존경했던 만큼 증오했던 것도 사실이었지 않소?”

깊은 침묵이 흘렀다.

경계의 거주자는 가만히 오케아노스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깨어날 듯이 굴면서 다시 잠들고 마는 우둔한 존재……. 그러면서도 언젠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옆에 어느 자식들을 둘지 결정도 못 한 우유부단한 존재. 되돌아오지도 않을 사랑을 하염없이, 기약도 없이 항상 내주기만 하던 게 당신네들 아니오?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충직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여전히 침묵은 길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에게 손길을 내밀기로 하였던 거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꿈’에서 버림을 받은 건,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간 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쩌면 끝나지 않을 새로운 ‘꿈’을 당신이 바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 보았소. 그리고 실제로 당신에게서 그런 기색도 읽을 수 있었고.”

그. 가.

아. 버. 지. 의. 분. 신. 이. 었.

“저쪽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당신이 따르는 ‘아버지’가 있소. 변명이라 하기엔 치졸하다고 생각지 않소?”

오케아노스가 도중에 사념을 끊었다.

경계의 거주자는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 끝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커다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 버. 지. 는 여. 럿.

하. 지. 만. 진. 짜. 아. 버. 지.

아. 니. 다.

“우리네 쪽에 있는 이는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따지자면 그야말로 칠흑의 가장 꼭대기에 있으며, 그동안 칠흑왕이라는 존재의 의사를 거의 결정하다시피 했던 존재일 텐데? 그가 가장 당신네들의 아버지에 가까울…….”

아. 니. 다.

이번에는 경계의 거주자가 오케아노스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 가.

진. 짜. 아. 버. 지.

“그 말, 무슨 뜻인지 아오? 아버지가 누군지 당신네들이 직접 선택하겠다는 뜻이 아니오?”

오케아노스는 기가 차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 걸 두고 어떻게 부자지간이라 할 수 있겠느냐며.

“그래서야 맘 편하게 만만한 자아를 골라 입맛대로 다루면 될……!”

너. 야. 말. 로.

모. 르. 는. 군.

“무슨……?”

아. 버. 지. 란.

그. 런. 게. 아. 니. 다.

아. 버. 지. 는. 아. 버. 지.

꿈. 과. 굴. 레. 에. 상. 관. 없.

그. 냥. 존. 재. 하. 는. 분.

그. 러. 니. 그. 가.

아. 버. 지.

칠흑을 이루는 자아의 숫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언제 자아가 되었는지도 상관없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가 어떤 목적성을 가졌는지도 관계없다.

결국 진짜 아버지가 될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말이었으니. 경계의 거주자는 그것이 바로 연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신네들이 데리고 있는 존재는 그저 잠시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라고.

“……무언가를 보긴 보셨나 보구려.”

오케아노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시름이 가득했다.

비마질다라도 어떻게든 회유하려 했지만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마경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건만.

아무래도 경계의 거주자도 그처럼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 때문일까?

다시 오케아노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를 감돌던 기세는 단번에 확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파장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신력에는 살기가 가득 섞여 있었다.

“그럼 당신이 보고 있는 어느 미래에 그런 것도 있겠구려.”

오케아노스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억지로 우리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모습 말이오. 아니 그렇소?”

시. 건. 방. 진.

경계의 거주자는 자신에 비해 그리 오래 살지도 못한 햇병아리 따위가 감히 이빨을 들이대려 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신력과 신력이 충돌하면서, 세상이 거칠게 요동쳤다.

콰아아앙!

쿠쿠쿠 –

* * *

「주인.」

‘왜?’

연우는 동생, 권속 등과 함께 웜홀을 통과하다 말고 갑자기 샤논이 칭얼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것들, 시끄러워 죽겠는데 좀 어떻게 해 주면 안 될까?」

[‘검은 풍요의 요신’이 기회만 닿는다면 자신이 언젠가 아버지의 위대함을 보여 줄 것이라고 꽥꽥 소리를 지릅니다!]

[‘불결의 근원’이 무슨 소리냐며 아버지는 자신을 가장 아끼실 거라고 주장합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아버지를 위해 방금 전에 찬양가를 한 곡 완성했다며 불러 보겠다고 말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그럼 자신이 그 옆에서 아버지를 위해 장기 자랑으로 춤을 춰 보겠다고 주장합니다!]

……

[‘검은 풍요의 요신’이 장기 자랑을 할 거면 자신도 거들겠다고 나섭니다!]

[‘불결의 근원’이 지지 않겠다며 자신도 돕겠다고 나섭니다!]

……

[그림자와 융화된 ‘밤(녹스)’이 크게 출렁거립니다!]

[드디어 바라던 대로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해합니다!]

그림자는 쉴 새 없이 출렁였다.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사념들이 복잡하게 뒤엉키다 보니 얌전할 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언제나 적막과 침묵으로만 가득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도저히 상상하기도 힘든 일.

그만큼 오랜 기다림 끝에 진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으니 잔뜩 흥분하는 것일 테지.

거기다 그런 아버지가 ‘꿈’에서 깨어날 때 이제는 너희들도 항상 옆에 두겠노라고 선언했으니, 당연히 더 크게 들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여전히 ‘낮’의 존재들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정우의 사념체 등은 이제 ‘밤’이 연우에게 완전히 귀속되었으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움찔할 때가 많았다.

연우를 보는 내내 믿기지 않는다는 투가 가득했으니. 이것이 익숙해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힘들어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건, 원래 그림자 속 터줏대감이었던 샤논 일행이었다.

정확하게는 샤논이었다.

한령이나 레베카는 애당초 주변의 소란을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밤’의 존재들이 도중에 생각을 바꿔 연우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도 마찬가지였고.

반면에 말이 많은 편인 샤논은 달랐다.

그로서는 그동안 자신이 왕처럼 거들먹거리면서 돌아다니던 공간에, 돌연 시끄럽기만 하고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군식구들이 잔뜩 쳐들어와 눌러앉은 꼴이었으니.

그래서 제발 조용히 좀 하라고 무력시위를 해 보기도 하고, 연우에게 통사정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런 걸 들어줄 ‘밤’의 존재들이 절대 아니었다.

「맞아용! 짬도 안 되는 짬끄레기들이 자꾸 어디서 기어오르냐구용! 내 밑으로 있는 놈들, 전부 집합시키기 전에 조용히 있으세용!」

라플라스도 샤논과 마찬가지로 이 기회에 어떻게든 말 안 듣는 후배들의 군기를 바짝 잡아 놔야겠다며 다짐했지만.

[‘춤추는 녹색 불길’이 못생긴 놈은 빠지라고 일갈합니다!]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었다.

「누, 누, 누가 누구더러 못생겼다는 거죵? 나 참나, 생긴 건 굽다 만 오징어 같은 작자가 얼굴 지적질이라니용!」

[‘춤추는 녹색 불길’이 그럼 너는 똥통에 빠진 쥐새끼라고 소리칩니다!]

「쥐라니용! 사과하세욧! 저는 엄연히 귀엽고 깜찍한 토끼라구욧!」

[‘춤추는 녹색 불길’이 그럼 머리털 없는 토끼라며 비웃습니다!]

「이……! 내가 털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춤추는 녹색 불길’이 그래 봤자 머리는 텅텅 비어 있지 않느냐며 놀립니다!]

「이이이!」

[‘춤추는 녹색 불길’이 대머리나 깎으라면서 약 올립니다!]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결국 참다못한 라플라스가 그림자 위로 불쑥 올라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스킨헤드 위로 토끼 귀를 쓴 라플라스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와!」

[‘춤추는 녹색 불길’이 대머리 때문에 눈이 너무 부셔서 싸우지 못하겠다고 항복 선언을 합니다!]

「이 오징어놈이이이!」

라플라스는 토끼 귀를 쥐어뜯으면서 꽥꽥 소리를 질러 댔지만, 춤추는 녹색 불길은 도저히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라플라스는 어서 나와서 한 판 뜨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라플라스가 업을 이은 극권의 군주와 춤추는 녹색 불길은 원래 속성이 각각 얼음과 불꽃으로, ‘밤’에 있을 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게 이렇게까지 오고 말았으니.

연우는 언제나 뻔뻔한 낯짝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속을 부글부글 끊게 만들던 라플라스가 되레 된통 당하는 것을 보게 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호감을 드러내고 고개를 조아리는 등, 충실한 모습만 보였던 춤추는 녹색 불길이었기에 저런 면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융화되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샤논이 들으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격하게 항의했을 테지만, 연우로서는 혹시 기존 권속들과 ‘밤’이 그림자 속에서도 갈등을 빚는 게 아닐까 우려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싸워 대던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권속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을 부가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고, 망자 거인과 사룡도 크게 신경 쓰는 투는 아니었기에 비교적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주인! 웃지만 말고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샤논.’

「왜!」

‘그러고 보니 너도 투구만 쓰고 있지 않나. 그럼 안쪽에 머리는 없는 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너도 대머리나 깎으라고.’

「이 빌어먹을 주인이이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형.』

“어.”

연우는 칠흑의 경계 너머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에 현실로 돌아왔다. 샤논이 꽥꽥 소리를 질러 댔지만, 채널링을 끊어 두자 아무 것도 안 들렸다.

그리고 연우는 수많은 ‘꿈’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치는 세계에서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고.

『저…… 기!』

크로노스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거대한 하늘 날개로 어머니와 몸을 함께 포갠 채로 잠들어 있는 정우의 영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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