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낮’과 ‘밤’ (1)
콰콰콰콰-
연우와 현인은 쉴 새 없이 부딪쳤다.
주먹을 이쪽으로 뻗는다 치면 연우가 스퀴테로 비스듬하게 쳐 올리고, 반대로 연우가 검뢰로 목덜미를 찌르려 하면 현인이 강렬한 뇌기로 이뤄진 뇌벽세를 터뜨려서 공세를 뒤로 튕겨 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색으로 물든 칠흑이 쉴 새 없이 맞물리며 충돌에 충돌을 거듭했다.
마치 반대로 돌아가는 두 개의 톱니바퀴가 부딪치면서 강렬한 잡음을 내고 스파크를 튀기듯이, 칠흑은 이미 크게 누군가 손으로 한 번 휘저은 것처럼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야말로 한 치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백중세(伯仲勢).
파하하하! 이렇게까지 팽팽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는걸?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 왔던 저기 있는 ‘나’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참으로 재미나군.
그래! 그렇게 싸워! 계속 싸우고 싸워서 둘 다 힘이 빠지란 말이야! 혹시 알아? 둘 다 체력이 바닥나서 꿀꺽할 수 있게 될지? 키키키킥!
그런 만찬이 있다면 욕심 많은 ‘나’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뭐,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여기서 죽어도 똑같이 자리에 있는 ‘나’의 일부인 것을!
이미 멀찍이 떨어져서 박수를 치며 웃고 떠드는 마성들은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였다.
어차피 그들로서는 누가 이긴다고 한들, 똑같은 자아이니 오히려 ‘칠흑왕’이라는 군중 의식(群衆意識)이 강해질 거란 사실에 기뻐할 뿐이었다.
아니면 어부지리로 힘이 빠진 틈을 타 목덜미를 꽉 깨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들 모두가 운명 공동체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죽여 ‘하나’로 거듭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던 사이가 아닌가?
그렇기에 칠흑왕의 자아들은 연우와 현인의 싸움도 그런 오랜 관습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긴다고 한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반면에 아직까지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연우는 칠흑을 자신의 발아래에 완전히 두고자 했고, 오랫동안 칠흑의 주 자아로서 군림해 왔던 현인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 따윈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는 이 기회에 연우를 완전히 칠흑으로 흡수하는 것은 물론, 겨우 다시 찾은 퀴리날레와 프네우마, 그리고 대적자까지 전부 한 번에 잡을 속셈이었다.
다만,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흠! ‘나’의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을 느끼긴 했다지만.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렇게까지 격을 끌어 올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이래서야 나도 계속 뭔가를 숨기고 있기에는 어렵지 않나?
현인은 연우와의 격전이 계속 이어지면서 끝내 제천류 오행공까지 드러내게 되자, 난감하다는 투로 활자를 내뱉었다.
여태껏 칠흑왕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천마의 기예를 자신이 숙지하고 있었단 사실은 끝까지 숨기려 했던 비밀이었으니까.
비밀병기라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여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사이에 그에 필적할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고, 검붉은 구비타라로 완성된 태극혜 반고검은 현인도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니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현인은 아무래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연우를 잡을 수 없겠단 생각에 신력을 더 크게 끌어 올려야만 했다.
휘휘휘휘!
현인을 뒤따르던 칠흑이 거대한 와류를 그리면서 그에게로 쏠려들었다.
채채채챙!
연우는 검뢰팔극을 잇달아 뿌려 칠흑의 와류를 튕겨 내면서 인상을 구겨야만 했다.
‘이 녀석.’
스퀴테를 통해 전해지는 감촉이 너무나 익숙했다.
유수행. 역시나 제천류 오행공에 해당하는 기예였다.
거기다 칠흑을 한데 빨아들였다가 한꺼번에 폭발시켜 방사(放射)시키는 기예는 역시나 제천류에 해당하는 화염륜이었다.
‘역시 그때 마지막으로 느꼈던 기질은 절대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제천류 오행공…… 너무 친숙해!’
이로써 연우는 그동안 수수께끼로만 여겼던 현인의 정체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칠흑의 자아이면서도 천마의 얼굴들처럼 제천류 오행공을 능숙…… 아니, 완벽하게 사용하고, 다른 마성들에 비해 비교적 체구도 왜소하다면 떠올릴 인물이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다만 의문이라면 어떻게 그놈이 칠흑왕의 자아가 될 수 있으며, 자신처럼 별다른 인과율을 쓰지 않고도 현신(現身)이 가능하냐는 것이었지만.
그런 것이야 나중에 언제든지 밝힐 수 있으니 그렇다 쳤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놈을 잡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현재 자신이 칠흑에서 차지한 비율은 딱 5할.
‘밤’의 진정한 아버지로 인정받으면서 격을 올려 여러 자아들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당연하지만, 현인도 정확하게 5할이니 이대로 계속 부딪친다고 해도 쉽게 승산이 나기 어려웠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놈이 전혀 생각지도 못할 변수가 될 만한 방법이.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보구나.
그러던 그때, 현인이 스퀴테를 옆으로 밀치면서 그런 활자를 내뱉었다. 여전히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부딪쳐서야 결국 서로 힘만 빼놓을 뿐이지. 한낱 필멸자로 시작해 여기까지 도착한 것도…… 정말이지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어.
그러니 방법이 필요해. 이 판을 뒤집을 만한. 그렇지 않나?
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방법이 있는데…… 그대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지?
그때, 현인이 한쪽 손바닥을 활짝 펼치더니 바로 옆에 있던 허공을 강하게 후려쳤다.
쩌걱!
그런 소리가 나며 허공에 균열이 퍼졌다.
그리고.
쩌거거걱-
균열은 삽시간에 칠흑을 따라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처음 이 세상에 칠흑이 쏟아지기 위해 공간이 열렸던 것처럼, 균열이 무너진 자리로 또 다른 칠흑이 어둑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연우는 그것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칠흑의 파편처럼 느껴지면서도…… 어쩐지 전혀 다른 느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콰아아아!
거기서부터 온통 잿빛으로 뭉쳐진 군세(軍勢)가 이쪽으로 쏟아졌다.
『무, 뭐야, 저건?』
크로노스가 그걸 보고 충격에 젖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 * *
[‘망신(亡神)의 군세’가 발동되었습니다!]
[칠흑이 다른 색으로 물듭니다!]
『망신……? 그게 뭐지?』
아가레스는 연우와 현인의 대결을 지켜보다 말고, 갑자기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에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바알을 제외하면 르 인페르날에서도 가장 긴 삶을 살아왔던 그였기에 웬만한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지만, ‘망신’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 보기 때문이었다.
물론, 연우와 정우 형제를 알고 난 뒤부터는 그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긴 했다.
공포만을 부르던 타계의 정체, 칠흑왕과 천마의 관계, ‘꿈’ 혹은 ‘굴레’라 불리는 이 우주의 진실, ‘낮’과 ‘밤’으로 대변되는 영원의 전쟁, 그리고 그것을 기록해 뒀다는 계시록의 내용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는 이가 극히 드문 이면의 진실일 뿐.
저건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신이었다.
악마였다.
용종이었고, 거인족이었다.
하나같이 초월을 이룬 개체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거형이란 점이었다.
현인이 칠흑을 부수며 끄집어낸 군세는 초월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속은 텅 비어 있는 인형들이었다.
두 눈에는 초점이 전혀 잡혀 있질 않고, 죽은 사물에서조차 느껴지는 사념도 풍기질 않는 존재들.
자신을 잃은(亡) 신(神)이기에 망신(亡神).
아무래도 그렇게 보였다.
왕!
펜리르가 크게 짖었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으르렁 소리를 내는 것이, 상당히 화가 많이 난 듯 보였다.
그리고 그건 아가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무래도 지난 ‘꿈’들에서 지우지 않고 모아 뒀던 모양인데.』
아가레스는 흉악하게 낯을 일그러뜨렸다.
『감히 숭고한 우리 악마들을 이딴 꼭두각시만도 못한 취급을 해? 죽여 버리겠다!』
아가레스는 수십 쌍에 달하는 날개를 한꺼번에 펼쳤다. 마기가 파문을 그리면서 퍼져 나간 자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데리고 왔던 악마의 군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발맞춰 펜리르 역시 거대한 늑대의 형상으로 돌아와 가장 앞서서 이쪽으로 달려오던 망신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크와아앙!
「우리들의 신께!」
「승리를!」
「영광을!」
발데비히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지난 십여 년간 ‘밤’과의 전쟁으로 이제 전투에 이골이 날 대로 난 망자 거인들이 뛰쳐나갔으며.
「가자꾸나.」
「흥! 품위 없이 매번 싸워 대기만 하는 건 칠흑에 있을 때나 나왔을 때나 똑같군.」
고룡 칼라투스의 말에 여름여왕은 콧방귀를 뀌다가도, 거대한 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면서 허공으로 높이 날아올라 망신의 군세에다 브레스를 강렬하게 뿌려 댔다.
「무엇. 들. 하느냐. 주인. 님. 의. 위광을. 보이. 지. 않고. 칠. 흑의. 진짜. 주인. 이. 누군지. 너희. 들이. 앞장. 서. 밝히어. 라.」
부의 명령에 따라 샤논, 한령, 레베카를 비롯한 망자들도 디스 플루토를 이끌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 외에도 함께 따라왔던 다른 ‘낮’의 존재들까지 모두 망신의 군세를 향해 움직였으니.
두 개의 군세가 서로 맞물리면서 싸우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 정도였다.
[‘낮(에로스)’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렇게 되자, 정작 조바심이 나게 되는 건 ‘밤’이었다.
아. 버. 지. 를. 도. 와. 야.
하. 지. 만. 어. 느. 아. 버. 지.
여. 기. 전. 부. 아. 버. 지.
누. 굴. 택. 할.
우리. 아. 버. 지. 는. 저. 기.
선. 택. 이. 아. 닌.
진. 짜.
그들은 아주 잠깐 고민에 잠기긴 했지만, 곧 생각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이곳이 아무리 위대한 아버지의 품속이라고 한들, 자신들이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있는다면 결국 아버지의 의중에서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야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지 않은가!
더구나 아버지의 권속이 저렇게나 많은 데야, 자신들이 우왕좌왕한다면, 추후에 있을 기침에 그 왕좌의 곁에 같이 서 있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 버. 지. 의. 영. 광. 위. 해.
결국 선택 뒤에 행동은 빨랐다.
[‘밤(녹스)’이 어둡게 내려집니다!]
연우의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그 속에 있던 타계의 신들이 대거 바깥으로 쏟아졌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망신의 군세’에다 저주를 내립니다!]
[‘망신의 군세’가 집단 감염됩니다.]
[방어력이 저하되었습니다.]
[불발되는 공격의 수가 늘어납니다.]
……
[‘불결의 근원’이 ‘망신의 군세’에 불치병을 하사합니다!]
[‘망신의 군세’에게 부여되었던 불사의 권한이 사라졌습니다!]
……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적대 관계였던 ‘낮’과 ‘밤’은 함께 손을 잡고 싸우고 있었다.
칠흑이라는 공통된 적을 앞에 두고서.
어리석은.
현인들은 그런 광경을 보면서 기가 차다는 듯한 어투로 활자를 내뱉었다.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칠흑왕의 자아로 살아왔던 그로서는 지금과 같은 광경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연우는 자아들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나타난 자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밤’의 존재들이 그를 따르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칠흑왕의 자아라고 하면 응당 분노를 내뱉어야 할 ‘낮’이 함께하고 있는 이유도 당최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렇기에 현인은 그런 그들을 두고 ‘어리석다’고 판단했지만, 그렇다고 저들 사이를 흔들어 놓을 뚜렷한 방법도 보이질 않았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구나.
사실 현인으로서는 연우라는 존재부터가 예측 불가였지만.
집행자로 점찍어 두고 부릴 생각이긴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꿈’의 질서를 혼란케 한 존재는 여태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렇게 작게 의문을 띄웠지만.
그와 별개로 현인은 여기서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사라지는 ‘꿈’에서 하나둘씩 수집하듯이 모았던 망신의 군세는 아무리 죽이고 죽인다고 해서 줄어들 것이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이참에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낮’과 ‘밤’으로 대변되던 기존의 질서를 지우고, 다시 ‘꿈’에서 깨어나자. 그토록 원하던 프네우마와 퀴리날레도 손에 넣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두 번 다시는 깨지 않아도 될 ‘꿈’을 꾸게 될……!
하지만 현인의 그런 생각은 도중에 끊어져야만 했다.
[‘낮(에로스)’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뭐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
현인의 얼굴이 저절로 다른 곳으로 홱 하고 돌아갔고.
피피피핑-
퍼퍼퍼펑!
허공 곳곳에 마법진들이 일제히 맺히더니, 수많은 빛줄기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면서 단숨에 망신의 군세를 싹 쓸어버렸다.
〈빛의 파도〉
〈무차별 난사〉
모든 것이 명멸하는 칠흑 위.
정우가 우뚝 선 채로 현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레아도 같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지, 새까?”
이런.
난감하게 되었군.
좌측에는 연우와 크로노스.
우측에는 정우와 레아.
네 가족이 동시에 풍기는 신력에 현인은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