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53화 (753/862)

3화. ‘낮’과 ‘밤’ (3)

물론, 정우가 빚어낸 현상은 절대 올포원-비바스바트가 펼치던 천마군림보는 아니었다.

모습이나 결과가 비슷한 것일 뿐, 그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능의 발현 과정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우가 올포원-비바스바트의 천마군림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특정 공간에 막대한 무게를 실어 신병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나아가서 절대적인 지배력까지 행사하는 것.

언젠가 정우가 엘릭서를 얻기 위해 탑의 77층에 올랐을 때, 그는 올포원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용마안으로 본 그의 세계는 자신이 딛고 있는 세계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만한 위치에까지 오른 지금.

사념체가 쌓은 업과 영혼이 올린 격이 합쳐지며 대신격을 획득한 지금,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한 천마군림보를 활용해 망신의 군세를 완전히 묶고자 했다.

[장악한 공간의 성질이 ‘구속(拘束)’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구속의 성질이 만개합니다!]

……

[‘구속’의 성질이 ‘완전 지배(完全支配)’로 변경되었습니다!]

……

[성질이 더해집니다!]

[성질이 더해집니다!]

[퀴리날레의 권능이 화려하게 빛납니다!]

……

[구속력이 더 강해집니다!]

[해석할 수 없는 권능, ‘군림보’와의 유사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망신의 군세는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몇몇은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부서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허!』

『군림…… 보가 따라 하는 게 가능한 거였다고? 천마의 혈육도 아니면서도?』

『아무리 ‘낮’의 태양이고, 퀴리날레의 후손이라고 해도, 이건 좀처럼……!』

[‘검은 풍요의 요신’이 혹시 천마가 나타난 게 아닌지 잔뜩 몸을 부풀리면서 경계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군림보를 펼친 대상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저자는 우둔한 아버지의 동생이니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될 거라고 충고합니다!]

……

[‘밤(녹스)’이 순간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낮’의 존재들도,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낮’에 가담했다고 해도, 그리고 메타트론과 바알의 유지를 안다고 해도, 그들로서 천마는 쉽게 용서하기 힘든 존재였다.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들을 탑에다 가두고, 아들로 하여금 감시하게끔 만들었던 존재였으니까. 원수 중의 원수였던 셈이었다.

‘밤’의 존재들도 마찬가지. 그들로서는 계속 우둔한 아버지의 기상을 방해하고 잠에 빠뜨리기만 했던 천마에게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를 상징하는 기예를 따라 한다?

당연히 이런저런 이유로 결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당초 천마군림보가 저렇게 모방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리 다른 프로세스를 사용했다고 해도, 저렇게 똑같은 결과물을 보이는 건 경악할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그제야 그들은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연우가 ‘재능충’이라며 툴툴대던 정우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그는 단순히 레아의 소울 코드(Soul Code)를 읽은 것으로 퀴리날레를 학습하여 스스로 격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몇 번의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저런 미친 재능이라면…… 탑에 있을 시절에 그렇게 많은 피조물들로부터 질투를 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건가?』

『정확하게는 애당초 ‘낮’의 태양이 머무를 무대가 탑이라는 좁은 곳이 아닌, 이러한 바깥 세계였단 거겠지!』

어쩌면 탑에 들어온 지 단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마법에 깊게 통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회중시계 속에 마련했던 시뮬레이션부터가 피조물의 수준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성과였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천마가 읽던 책을 덮으면서 유심히 아래를 살핍니다.]

『……!』

『……!』

『……!』

탑을 직접 세우고도,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그냥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천마가.

아들이 죽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모습을 내비치지 않던 존재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작자가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딱히 분위기가 반전되거나, 다른 기적이 빚어지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메시지 한 줄만 떠올랐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칠흑 속에 있던 모든 존재들을 침묵에 잠기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천마가 쓴웃음을 짓습니다.]

[천마가 제법이라고 말합니다.]

[천마가 이번 대적자는 꽤 기특하다고 말합니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것은 천마군림보를 모방했던 정우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라, 그 역시 잠시 멍하니 메시지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따라 하려면 멀었다고 말합니다.]

[천마가 그래도 아들을 이해해 준 것이 고맙다며, 오랜만에 일어난 것에 선물을 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천마의 권능이 전해졌습니다!]

[‘군림보’의 성질이 더해집니다!]

[북두(北斗)와 칠성(七星)의 성질이 합쳐집니다.]

화아아!

성우의 손등 위로 국자 모양으로 그려진 일곱 개의 점이 연달아 찍혔다.

탐랑, 거문, 녹존, 문곡, 염정, 곡, 파군…….

북두칠성의 문신은 화려하게 빛을 발하면서 정우에게 막강한 신력을 불어넣었으니.

“……!”

한순간, 정우는 이대로 정신을 잃는 게 아닐까 하는 짙은 고양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사념체를 받아들이면서 한 차례 한계를 탈피했던 정우가, 다시 한번 더 한계를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격이 상승하였습니다!]

……

[현재 상태: 광화(光華)]

[천마의 가호가 따릅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칭호: 대적자(對敵者)’가 수여되었습니다.]

정우는 한순간 손끝에 걸렸던 반발력이 확 낮아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천마의 가호가 더해지면서 공간을 다루는 솜씨가 훨씬 나아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군림보를 흉내 내던 것에서 이제는 그것을 ‘직접’ 펼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비록 올포원이나 천마가 사용하는 군림보에는 미치지 못할망정, 그에 준하는 권능은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날……?’

정우는 천마에게 인정받았단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화감에 젖어야만 했다.

형인 연우는 천마의 대척점에 놓였다고 할 수 있는 칠흑왕의 일부다. 그런데 그에 반하는 힘을 자신에게 쥐여 주었다는 것은……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올포원에게 갔어야 할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하지만 정우의 생각은 거기서 그쳐야만 했다.

천마가 무슨 노림수를 두었던 간에, 결국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자유의사가 따르는 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지 않겠는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우는 자신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정우는 오른손에도 똑같이 신력을 부여했다. 퀴리날레의 권능이 장착되면서 손끝에 새로운 공간이 걸렸다. 손등에 박힌 칠성의 문장이 다시 화려한 빛을 토해 냈다.

[새로운 공간을 장악합니다!]

[해당 공간에 ‘부유(浮遊)’의 성질이 부여되었습니다!]

『이건……?』

『그런가? 이번엔 우리에게 반대로 힘을 주려는 건가?』

에. 로. 스. 가. 힘. 을. 주. 는.

천. 마. 의. 힘.

받. 아. 도. 되. 나.

‘낮’이며 ‘밤’의 모든 존재들은 눈을 크게 떴다. 망신의 군세와 다르게 자신들을 둘러싼 공간은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이었다. 신력이 다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적군은 억압하고, 아군에게는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여태 알게 모르게 칠흑에 감염되어 있던 ‘낮’과 ‘밤’의 존재들은 좀 더 수월하게 자신들의 권능을 터뜨리면서 망신의 군세를 압박할 수 있었고.

쿠쿠쿠쿠-

망신의 군세는 차차 뒤로 떠밀려 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왔던 칠흑의 균열 너머로 되돌려 보내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현인도 그 광경을 보고, 처음으로 경악성을 토해 냈다.

아무리 천마가 수호를 하고 있다고 해도, 군림보가 허락되었다고?

한평생 천마와 직접 대적을 해 왔던 현인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무리 대적자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가호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만약 가호를 받을 수 있었더라면, 지난 ‘꿈’들의 양상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천마는 피조물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했고, 세계가 자신들과 같은 절대자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군림보까지 내어 주었다는 건…… 현인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계의 태엽이 맹렬하게 빨리감기됩니다!]

이런……!

퀴리날레인지 군림보인지 모를 공간 장악은 정우에 의해 이미 시전된 상태였고.

여기에 연우가 프네우마의 권능까지 더하면서 칠흑을 둘러싼 절대 시간마저 빨라지게 만드니, 굼떴던 속도에도 탄력이 붙었다.

[프네우마가 ‘시(時)’와 ‘주(宙)’의 성질을 드러냅니다!]

[퀴리날레가 ‘공(空)’과 ‘우(宇)’의 성질을 드러냅니다!]

[씨줄과 날줄이 엮였습니다!]

씨줄과 날줄. 옷감을 짤 때 두 개의 실이 가로와 세로로 엮이면서 쫀쫀한 기질을 형성하듯, 우주라는 옷감을 짜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각각 신위로 두어 상징하던 곳이 바로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였으니.

‘꿈’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그 둘이라 할 수 있었다.

현인을 비롯한 칠흑왕의 자아들이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손실을 가장 안타까워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꿈’과 ‘굴레’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없어서야, 그들이 꾸는 ‘꿈’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으니까.

결국 천마가 원하는 대로 계속 되풀이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엮여서는 현인에게 대항한다. 그리고 이제 여태 조용하던 천마가 딱 한 수를 놓았다.

여태껏 현인이 설계하고 운영했던 판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는 절묘한 수를.

천마……! 여태 숨기고 있던 게 바로 이런 거였나?

현인은 분노에 찬 활자를 내뱉었다.

여태껏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감정적으로 동요를 잘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절대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씨줄과 날줄이 모두 저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각각 뛰어난 힘을 발휘하며 그를 적대하고 있다. 이것보다 더 위험한 칼날은 없었다.

그리고 현인이 아무리 칠흑을 운영하고 굴려도, 악착같이 달라붙는 연우를 떨어뜨리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연우와 정우, 두 쌍둥이 형제가 보이는 합은 아주 대단했다. 어떻게든 막으려고 해도, 판의 흐름이 마치 톱니바퀴가 굴러가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굴러가니 도저히 손을 쓸 새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망신의 군세는 계속 밀리고 밀리면서 원래 있던 균열까지 다다르고 말았고.

현인이 부리던 칠흑도 점차 폭풍우를 만난 바다처럼 격랑을 일으키다가 계속 무너지고, 떠밀리기를 반복했다.

현인의 손이 점차 어지러워지던 그때.

[시계의 태엽이 최대의 속도로 빨리 감기됩니다!]

파앗!

한순간, 연우가 현인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니, 정확하게는 너무 빨리 움직인 데다가, 현인이 정우 쪽으로도 정신이 팔려 있는 나머지 아주 잠깐 동안 놓쳤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리고 연우가 나타난 곳은 바로 현인의 뒤쪽이었으니.

흡!

현인이 뒤늦게 연우를 감지하고 몸을 그쪽으로 돌렸을 때는 이미 연우가 차갑게 웃으면서 녀석의 가슴팍에다 스퀴테를 꽂아 넣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많이 해 먹었으니 이제 좀 뒈지지?”

퍼억!

스퀴테의 뾰족한 칼날이 현인의 몸을 관통하여 바깥쪽으로 튀어나왔다.

[죽음의 태엽이 제일 빠른 속도로 감깁니다!]

위이이잉-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태엽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해당 대상에게 ‘죽음’이 강제 이식되었습니다!]

[‘아사(餓死)’가 실행됩니다.]

[‘갈사(喝死)’가 실행됩니다.]

[‘독사(毒死)’가 실행됩니다.]

[‘동사(凍死)’가 실행됩니다.]

……

츠츠츠-

스퀴테가 찔린 자리를 중심으로, 얼룩덜룩한 검은색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