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54화 (754/862)

4화. ‘낮’과 ‘밤’ (4)

정말이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짓을 잘도 계속 저지르는군.

현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르고 들어간 스퀴테를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투로 활자를 내뱉었다.

상처 부위가 높아서 썩다가도 메말라 갈라지거나, 악취가 나고 태워지고 얼어붙는 등, 다양한 죽음들이 번갈아 찾아왔다가 사라졌다.

애당초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도 칠흑에서 비롯된 것.

그런 것을 도리어 근원에게 먹인 꼴이었으니, 이게 말이 되는 짓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말도 안 되는 짓이 정말 눈앞에서 빚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인을 완전히 소멸의 길로 몰아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보이지 않는 손길로 그를 잡아끄는 죽음의 손길은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 순간, 현인은 이제 연우를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자신이 유용하게 부릴 수 있는 패, 혹은 어떻게든 동생과 가족들을 구해 보겠다며 아등바등하던 귀여운 존재…… 그런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과 어깨를 완전히 나란히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걸 깨닫기엔 이미 너무 늦은 뒤였지만.

울컥!

현인의 입가로 생각되는 부분에서 피 같은 것이 쏟아졌다.

그 역시 칠흑으로 이뤄진 존재였지만, 상당한 타격을 입었음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낮’과 ‘밤’의 모든 존재들은 충격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칠흑의 중심이 당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짓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군! 흠!』

아. 버. 지. 가. 아. 버. 지. 를.

찔. 러.

그. 럼. 아. 버. 지.

정. 해. 진. 건. 가.

[‘낮(에로스)’의 존재들이 칠흑왕의 주 자아에게 상처를 입힌 칠흑왕의 자아에게 경악을 내뱉습니다!]

[‘밤(녹스)’의 존재들이 그럼 진짜 우둔한 아버지가 누군지 확실하게 가려진 건지 의문을 드러냅니다!]

그러던 그때.

“아…… 니야.”

정우의 목소리가 사위를 갈랐다.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하지만, 막대한 신력이 담겨 있어 그들의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아직 안 끝났으니까, 다들 정신 차려!”

[‘낮(에로스)’의 존재들이 태양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망신의 군세를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밤(녹스)’의 존재들이 우둔한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정우는 공간을 다루고 있었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죽음이 이식되었다고 한들, 현인을 완전히 처치했다고 하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오히려 지금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 천마. 그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뭔지는 알 수 없어도, ‘나’가 거기에 휘말려 당하고 있는 건 확실해.

하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피안(彼岸).

그곳은 어떻게든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활자들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현인의 눈두덩이로 생각되는 부위에서 시커먼 안광이 치솟았다.

[해당 대상으로부터 역으로 ‘혼란(混亂)’이 강제 전이되었습니다!]

『큭……! 역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엿 같은 게 있긴 있었구나.』

크로노스는 자신의 검체(劍體)를 따라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칠흑을 보면서 악다문 소리를 냈다.

겉보기에는 연우가 부리는 것과 똑같은 칠흑으로 보이지만, 전혀 다른 색(色)을 띤 칠흑.

애당초 본질도 달랐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성질은 ‘혼란’이었다.

미몽과 혼돈, 무질서 등을 끌어내는 아주 근본적인 개념. 현인이 연우를 상대할 때면 항상 풀어내던 힘이기도 했다.

죽음이 해당 대상을 무너뜨린다면, 혼란은 모든 것을 허물어서 덧없게 만들어 버린다.

신격, 신화, 신성…… 아무리 위대하게 만든 것들이라 하여도, 그런 모든 것들은 어차피 ‘꿈’에서 깨고 나면 전부 덧없이 사라질 모래성 같은 것들이 아니던가.

현인은 바로 그런 성질들을 완전히 개념화시키고, 자신의 주 속성으로 삼았다. 연우가 죽음을 자신이 가진 권능의 뿌리로 두듯, 혼란이 현인에게 그런 근본에 해당했다.

당연히 이런 혼란의 속성은 다른 자아들에게도 아주 유효하게 먹혔다.

‘나’라는 군집체로 묶여 있다고 한들, 그들 역시 개별적인 의사를 갖고 있는 존재들.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그동안 현인에게 복종했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혼란이 연우에게 고스란히 옮아 왔다.

원래대로라면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갖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신력을 강제로 주입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연우가 스퀴테와 합일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스퀴테를 통해 현인에게 직접 상해를 가하고 신력을 불어넣었듯.

현인도 똑같은 통로로 연우에게 신력을 밀어 넣고 있는 셈이었으니.

이건 어찌 보면 힘겨루기에 가깝다고 봐야 할지도 몰랐다.

[죽음의 태엽이 가장 빠른 속도로 돌아갑니다!]

[죽음이 계속 이식되는 중입니다.]

[최대 출력으로 인해 과열되기 시작합니다.]

[주의! 태엽의 날이 급속도로 마모되기 시작합니다. 손상의 정도가 상당합니다. 휴식 뒤에 재사용할 것을 권고합니다.]

[주의! 마모의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태엽의 사용을 중단할 것을 권고합니다.]

……

[경고! 내구도가 바닥났습니다. 과열로 인해 죽음의 태엽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혼란의 침범이 급속도로 이뤄지는 중입니다.]

[신격이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신성이 위태롭게 부서집니다.]

[신위가 위태롭게 요동칩니다.]

……

[경고! 혼란이 신령의 깊숙한 지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품고 있던 칠흑을 침해하려 합니다.]

[경고! 칠흑이 혼란에 젖을 시에 자격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

[경고! 혼란의 침해를 계속 방관할 시, 칠흑왕의 자아로서의 힘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럴 시, 칠흑 속을 유영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어서 자리를 이탈할 것을 권고합니다!]

치칙, 치치칙-

치이이익!

연우의 신체가 노이즈라도 잔뜩 낀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팔이 부서졌다가 새롭게 복구되고, 얼굴이 다른 형체가 되었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가 있던 자리로 본체인 거마신룡도 몇 번씩이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연우’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요소들이 강제로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누가 먼저 서로의 속성에 잡아 먹히게 될지.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현인은 여전히 덤덤한 말투로 활자를 내뱉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스산함이 깔려 있었다.

나……는.

원래 칠흑이었으면서 완전한 칠흑이라 할 수 없는, 세계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아귀(餓鬼)였음이니.

그런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하하하.

현인은 그렇게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니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도 같이 먹어 버리면 좀 나아지겠지.

[해당 대상이 ‘죽음’에 중독되었습니다!]

[해당 대상으로부터 ‘혼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현인은 스퀴테를 꽉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안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푸우욱. 그런 끔찍한 느낌이 났지만, 녀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더 즐거워하고 있었다.

스퀴테가 더 깊숙하게 연결되면 연결될수록. 자신의 속성도 연우에게 더 많이 주입할 수 있을 테니까.

치칙, 치이이익-

현인의 신체도 똑같이 노이즈가 꼈다.

두 사람 사이로 감돌던 칠흑이 이제는 마구잡이로 뒤엉키면서 서로 달랐던 색도 이제 구분이 거의 없어질 정도였다.

연우의 두 눈도 차갑게 빛났다.

아귀였다고?

그 역시 무언가를 잡아먹는 데는 절대 뒤지지 않았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존재를 포식하는 중입니다!]

[영혼석(오만·식욕·색욕)이 깨어나 기승을 부립니다!]

……

[‘죽음’과 ‘혼란’이 뒤섞입니다!]

[신격이 뒤섞입니다.]

[신성이 뒤섞입니다.]

[신앙이 뒤섞입니다.]

……

[존재가 뒤섞이고 있습니다!]

[칠흑을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합쳐지고 분열되고 있는 중입니다.]

『연우야!』

크로노스는 애타는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중간에서 매개체로 쓰이는 그 역시 날이 점차 무뎌지면서 존재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신력 싸움에 몰두 중인 아들이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합일을 해제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럼 자신만 손해를 보는 선에서 끝날 테니까. 분명히 그의 그런 생각은 연우에게도 똑같이 전해졌을 터였다.

하지만 연우는 전혀 그런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콰콰콰콰!

이거 생각보다 아주 끈질긴걸?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려나?

여러 마성들도 흥미진진하게 연우와 현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여차하면 바로 튀어 나갈 기세였다.

저 둘 중 누군가 이겨도, 혹시 완전히 뒤섞인다고 하여도 결국에는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

어부지리를 취하기에 너무나 좋았다.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선들이 겹겹이 쌓일 때 즈음.

콰아앙!

[‘망신의 군세’를 전부 되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낮(에로스)’의 주인이 권능, ‘절대권능공간’을 활용해 ‘망신의 군세’가 칠흑으로 쏟아질 수 없게 균열을 차단하였습니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망신의 군세를 전부 균열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형!”

정우가 시선을 재빨리 연우와 현인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절대권능공간’이 새롭게 발동되었습니다!]

[칠성의 힘이 더해집니다.]

[천마의 가호가 따릅니다.]

정우는 마치 미닫이문을 좌우로 열듯이, 양손으로 허공을 짚고 그대로 크게 좌우로 벌렸다.

왼손에는 연우가, 오른손에는 현인이 걸렸다. 그것을 일일이 분해한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두 신력이 섞여도 너무 혼탁하게 섞여 있었으니까. 연우에게도 현인의 색이 너무 많이 묻었고, 현인에게도 연우의 색이 너무 많이 심어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정우는 두 사람을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정체 성만을 남겨 둔 채로, 그대로 다시 떨어뜨리고자 했다.

찌지지직!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노이즈가 잔뜩 껴서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던 연우와 현인이 결국 서로에게서 튕겨 나고, 뒤섞이던 칠흑도 강제로 찢겨 나갔다.

“……큽!”

연우는 상당히 지친 얼굴로 현인을 노려봤다. 아무리 강제로 떼어 놓았어도, 그의 체내에서는 여전히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칠흑이 요란하게 싸워 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인도 마찬가지였는지, 지친 투로 활자를 뱉고 있었다.

정말이지…… 힘들군.

이렇게까지 끈질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먹히고 먹혔는데도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아무리 의문을 드러내도, 연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 그게 그대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나저나.

아무래도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 것 같은 놈들이 저기 잔뜩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지?

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살의를 뿌려 대는 다른 마성들을 돌아보았다.

키키키키킥.

이거. 이거.

어. 너무 탐나는 과실이 두 개나 생겼는데?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태 잠자코 있던 마성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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