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낮’과 ‘밤’ (5)
여태껏 연우와 현인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고만 있던 녀석들이었지만.
그런 녀석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니 단번에 분위기가 반전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통일되지 않은 색의 칠흑들이 중구난방으로 날뛰고 있다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흉포하게 보였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기세들이 오로지 연우와 현인에 대한 식탐만을 품고 있었으니까.
맛난 과실. 맛난 과실…….
둘 다 뭐해? 여태 한 것처럼 서로 치고받고 싸워 대지 않고. 응?
그래.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응?
물론, 그런 말에 멍청하게 넘어갈 연우와 현인이 아니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산에서는 여우가 왕의 행세를 한다는 말은 들었다지만.
아직 두 호랑이가 아직 완전히 쓰러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내가 어지간히도 ‘나’에게 우습게 보였나 보군.
현인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활자를 내뱉었다.
평상시에는 그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놈들이, 지금은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군침을 흘려 대는 꼴이 퍽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놈들을 이해했다.
칠흑왕의 자아라는 것들은 보통 얄팍한 본능과 욕망밖에 남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원래는 매번 ‘꿈’마다 강한 증오와 한을 품고 있어 집행자로서 칠흑의 선택을 받았던 것들이 전신(前身)이라고는 하지만.
칠흑에 완전히 귀속되고 나서부터는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 가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원념만이 본능으로 남아 버린 것이 마성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세월’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 데다가, 그들이 살았던 터전도 완전히 사라졌고, 또한, 어떤 새로운 염원을 품는다고 한들 자유의사가 진행될 수가 없으니 자연스레 정체성이 제거되고 마는 것이다.
연우가 수없이 겨뤘던 마성이, 칠흑왕의 자아들이 하나같이 기괴한 웃음을 내뱉으며 추악한 태도만을 보였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오히려 원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꾸역꾸역 올라온 연우가 이레귤러일 뿐이었다.
그 외에 또 다른 이레귤러를 꼽으라 한다면…… 현인, 그 자신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잘된 것인가. 다시 찍어 눌러야 기어오르지 않겠지.
현인은 차갑게 중얼거리면서도 연우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래서야 싸움이 삼파전으로 번질 수 있었다.
누구 하나가 뒤를 잡혀서야 된통 당할 수도 있는 일.
더군다나 현인도 계속 체내에서 죽음의 개념이 난동을 피우고 있는 까닭에 몸 상태가 그리 좋질 못했다.
죽음의 개념이 그의 칠흑을 계속 좀먹어 가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아귀다툼’이 있은 뒤, 연우와 칠흑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정체성에도 결여된 부분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마도 이식된 죽음을 완전히 떨쳐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한데…….
문제는 마성들이 집단으로 덤벼들어서야 그런 시간을 벌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현인은 연우에게 아주 잠깐 동안 휴전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을 테니, 다른 자아들에게 뜯어 먹힐 위험에 처할 바에는 일단 그놈들을 다 찍어 누르고 다시 자신과 결판을 내고 싶겠지.
칠흑의 세계에서는 이따금 서열 정리도 아주 중요하니까.
현인이 생각하기로는 그것이 분명 확실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인의 생각은 사념을 통해 연우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어떻게 직접 활자나 메시지를 쓰지 않아도, 그들은 칠흑이라는 클라우드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건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현인이 한 가지 착각한 점이 있었다.
칠흑에 완전히 자리를 잡아 이곳에서 주 자아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자신과 다르게.
연우에게 칠흑이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쓰는 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
“아니. 여기서 나는 뒤로 빠지지.”
뭐?
현인이 황당하다는 활자를 쏟으면서 황급히 연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연우는 스퀴테를 수직으로 크게 내리치고 있었다.
“여기서 당장 승부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쪽은 가족의 안전이 우선이라. 굳이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
촤아악!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칠흑이…… 찢어지고 있었다.
끝도 없이 무한하게 이어져 있던 칠흑이, 각각 연우와 현인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중간이 똑 잘린 채로 벌어졌다.
[칠흑의 세계가 양단되었습니다!]
[두 개의 색으로 분리됩니다.]
[경고! 칠흑왕의 내부가 크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강한 충격에 유의하십시오!]
[경고! 클라우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분리가 이뤄지지 않을 시, 붕괴의 위험이 따를 수 있습니다.]
[경고! 칠흑이 강제로 찢기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유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경고! 칠흑이……]
……
이런!
현인은 그제야 연우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애당초 연우가 노렸던 건, 동생과 어머니의 구조가 아니었던가. 현인의 등장은 어디까지나 그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이벤트였을 뿐.
그런 상황 속에서 연우가 굳이 당장 현인과 결착을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른 자아들도 개떼처럼 달려들어서야, 오히려 가족이며 권속들만 위험해질 뿐이니까.
더군다나 연우는 칠흑에 완전히 종속되어 이곳에 완전히 억류되어 있어야만 하는 현인과는 달랐다.
여전히 거마신룡이라는 본체를 따로 두고 있고, 여전히 유예 중인 자신의 ‘꿈’이 있으니 언제든 그곳으로 내뺄 수도 있는 것이다.
치료는 바로 거기서 해도 될 테지.
그런 뒤에 다시 돌아와 지친 상태로 있는 현인과 다른 마성들을 노린다면,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어부지리인 셈이었다.
자리를 잠시 비워 둔 것에 의해 내쫓기는 것도 걱정 없었다.
이미 칠흑의 절반을 죽음의 개념으로 물들인 지금, 연우를 내쫓을 수 있는 자아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여기서 빠진다고 해도, 절대 그는 손해를 보는 게 없는 것이다.
반면에.
현인은 잃을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설마, 이런 걸 노리고……?
현인은 차갑게 웃는 연우의 표정을 보면서 애당초 마성들을 끌어오는 것이 전부 연우의 계산하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현인은 이대로 연우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칠흑을 뻗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이미 연우를 둘러싼 칠흑은 저만치 아래로 뚝 떨어져 간격이 크게 벌어진 뒤였고.
키킥! 키키키키킥! 먹을 거다, 먹을 거!
맛있는 현인!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현인!
내 배 속으로 들어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배 속으로 들어와야지! 내가…… 내가! 맛있게 먹어 줄 테니 이리 와!
마성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일제히 현인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들로서도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다 힘이 다 빠진 현인만 노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되었기에, 집요하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연우에게 닿으려던 칠흑은 날아가는 족족 다른 자아들에 부딪히면서 방향이 꺾이거나 소멸했다.
그리고 마성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통에 현인의 칠흑은 더 이상 연우에게로 이어지지 못하고…… 계속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아들을 상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도로 꺾어야만 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여태껏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게 굴던 현인의 포커페이스가 처음으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 * *
[칠흑의 완전한 분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클라우드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여파에 주의하십시오.]
[클라우드가 강제로 분리되고 있습니다. 데이터 손실의 우려가 있으니 원본을 확인하십시오.]
[클라우드에…….]
……
쿠쿠쿠쿠……!
칠흑의 분리.
여태껏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특이한 상황에 모든 이들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푸하하하! 칠흑왕에게 이딴 엿을 먹이다니! 정말이지 차연우, 너는……! 정말이지 탐이 날 수밖에 없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아가레스는 쉬지 않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광기마저 섞여 있는 웃음.
광기를 신위로 두고 있는 그로서는 이런 연우의 정신 나간 짓 거리들이 재미있기만 할 뿐이었다.
여태껏 이와 비슷한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태껏 그들이 칠흑왕이라고 생각했던 주 자아에게 이런 엿을 먹일 줄이야!
아. 버. 지. 아. 버. 지.
이. 제. 둘.
‘밤’의 존재들도 이런 사실에 조금 놀라워하면서도, 연우에게 여러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여기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림자 속으로 되돌아갔다.
오히려 그들은 내심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아주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여태껏 아무런 변화도 자극도 없었던 허무한 세계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유희’라 할 수 있는 것을 즐겼으니 아주 즐거웠던 것이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아버지는 정말 위대하시다고 외칩니다!]
[‘불결의 근원’이 이것은 아버지의 승리가 확실하니 기념으로 노래를 불러 보겠다고 말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돼지 멱 따는 소리 낼 생각 말라며 자신이 한 곡 뽑겠다고 다툽니다!]
……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품은 연우가 현인을 떨쳐내고 승기를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으니, 기뻐하기도 했다.
그리고.
[천마가 수많은 ‘꿈’과 ‘굴레’의 반복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특별한 상황에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천마가 집행자이지만 기존의 집행자와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는 새로운 칠흑왕의 자아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천마도 차례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연우는 어디인지는 몰라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아도 천마와 시선이 닿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일까?
여전히 그의 의중이 궁금하기만 했다.
[천마가 읽던 책을 다시 활짝 펼칩니다.]
그리고 천마의 메시지는 다시 거기서 끊어졌다.
[현재 떨어져 나간 칠흑은 총량의 약 49.6%입니다.]
[손실률 0.4%]
[오차 범위 ±0.1532%]
[‘꿈’의 내구도가 오차 범위 내에 걸쳐져 있고, 기존 자아의 존 립이 위태로워져 유예가 지속됩니다.]
[하지만 ‘꿈’의 내구도가 한없이 떨어졌습니다. 강한 충격이 가해질 시 말소가 이뤄질 수 있으니 유의하십시오.]
……
[절반에 가까운 칠흑을 획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칠흑을 온전히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데 가까워졌습니다.]
[칭호가 ‘칠흑왕의 대체 자아’로 변경되었습니다.]
휘휘휘!
온통 칠흑색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연우의 그림자 안으로 잠겨 들었다.
그리고 다시 연우가 눈을 떴을 때.
그와 정우 등은 원래 떠나왔던 장소, ‘낮’과 ‘밤’의 경계선상에 돌아와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밤’의 구역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후우……!”
“겨우 돌아왔나?”
‘낮’의 존재들은 무사히 칠흑에서 탈출하고, 정우와 레아까지 구했단 사실에 크게 환호를 터뜨리고 있었다.
정우 역시 마찬가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개운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 공기.
이 느낌.
사념체나 영혼으로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감각들이 손끝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정말…… 살아 있구나.
정우는 그런 생각에 순간 울컥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를 레아가 힘껏 끌어안았다.
이 순간. 정우는 마치 일곱 살 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엄…… 마.”
“울고 싶으면 울렴. 억지로 참는 건 좋지 않단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속 시원하게 우는 것도 괜찮아.”
정우는 레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실컷 울라고 하셨지만, 차마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꼴 사나운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 돌아온 거 맞죠?”
“그래. 맞는 것 같구나.”
“집에 돌아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러니까 다들 돌아가자.”
레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네 가족이 바라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으니까. 레아는 한편으로 올림포스에 두고 온 다른 자식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식들 간에 반목이 심했다던데…… 어떻게 하면 화해시켜 줄 수 있을지도 생각해 봐야 했다. 한없이 비뚤어졌을 제우스도 달래야만 했고.
하지만 두 모자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한쪽.
똑같이 웃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연우와 크로노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있었으니까.
『현인과 네가 서로 뒤섞이고 있을 때, 우연찮게 네가 그동안 숨기고 있던 속내를 보게 되었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묻고 싶구나.』
정확하게는 크로노스가 연우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