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56화 (756/862)

6화. 집행자(執行者) (1)

려의 무덤으로 향하는 어느 동굴 속.

“……쿨럭!”

이블케가 좁고 길쭉한 통로를 잘 걷다 말고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더니 심하게 각혈했다.

“으음?”

『왜 그러는 거지?』

나란히 따라 걷던 우마왕과 통천교주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치칙, 치지지직!

이블케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던 신체(神體)에 잔뜩 노이즈가 끼는 것이 보였다.

격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의미.

덕분에 그 속에 있는 소울 코드까지 어느 정도 읽힐 정도였다.

순간, 우마왕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여태껏 그가 봤던 이블케라는 존재는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했던 인물.

태초 때부터 존재하면서 눈에 차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그로서도 도저히 깊이를 헤아리기가 힘든 존재였다.

화신(化身).

본체는 전혀 다른 곳에다 두고, 의념만을 이 세상에 투영시키는 그릇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있는 본체가 어떤 형태인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천마의 얼굴이라 하였지만…… 또 이상한 건 그 아이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단 말이지.’

우마왕은 한때 천마가 ‘천마’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인연을 맺고, 짧게나마 가르침도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시그니처 스킬로 잘만 쓰고 다니는 ‘군림보’부터가 애당초 자신이 부리던 우보(牛步)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천마가 수많은 전생과 환생들을 두고, 그들이 비록 같은 영혼은 공유할지언정 서로 저마다 다른 인격과 목표, 그리고 정체성을 가지고서 각기 따로 움직인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초의 불꽃지기이자 등대지기였던 ‘효마(曉魔) 려(黎)’에서부터 시작된 존재의 고유 특성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이블케에게는 그런 고유 특성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그에게서 려와 천마의 고유성을 ‘고의로’ 제거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에 가깝다고 할까?

그래서 무채색에 가까웠다.

존재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특징을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빈 그릇…….

그러면서도 탄탄한 그릇.

그리고 그 안쪽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무엇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 뜻은 단 하나.

전혀 다른 곳에 본체를 두고서 정체를 꽁꽁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격도 아주 높아 웬만한 ‘눈’으로는 절대 읽을 수도 없는 까마득한 존재.

‘어쩌면 칠흑…… 그것일 수도 있는 것이고.’

천마의 얼굴이 칠흑왕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만큼 어불성설도, 모순도 없겠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면 자신이 가진 눈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게 말이 안 될 테니까.

여하튼 우마왕으로서도 당장 이블케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는 상태.

지금도 전략상 이유 때문에 이블케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던 차였는데.

갑자기 잘 걷다 말고 저렇게 무너질 기미를 보인다?

그 의미는 단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본체가 큰 타격을 입은 모양이로군.’

어쩌면 이블케라는 존재를 붕괴시킬 만큼 큰 위협을 맞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미난 얼굴이로군.』

그리고 그건 통천교주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를 덮치기라도 할 기세.

그녀에게도 이블케는 아주 흥미로운 존재였으니,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이것저것을 재미있게 실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이 ‘꿈’으로 불러들이게 만든 배경인 비마질다라와 관련해 심문할 것도 있었고.

그런데도 우마왕과 통천교주가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은 이블케가 존재는 흐트러질지언정, 두 눈빛만큼은 여전히 예리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그림자 속에서 흉흉하게 눈을 뜨고 있는 여러 짐승들의 냄새도 같이 풍겨 나왔으니.

크르르르!

이런 좁은 곳에서 저런 것들과 드잡이질을 해서는 다 같이 무너지는 동굴에 깔리기 십상이었기에, 둘은 굳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물론, 그들만한 존재들이 고작 생매장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려의 무덤이 붕괴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다.

“후우……!”

이블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존재를 흔들어 놓던 노이즈도 다시 잠잠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우마왕과 통천교주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블케를 구성하고 있던 요소들 중 상당수가, 절반에 가까운 힘이 갑자기 어디론가 쑥 빠져나갔다는 것.

전에는 얼마나 높은지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까마득하게만 보였던 그의 격이, 몇 단계나 낮아진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일반적인 초월자들은 헤아리기조차 힘들 만큼 높은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마왕은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이블케의 배경이 어딘지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칠흑이라! 허! 설마 했지만, 진짜였을 줄이야?’

우마왕으로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이 작디작은 고블린은 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있어서 천마의 얼굴이라는 운을 타고났으면서도, 칠흑왕에게 귀의를 하고 만 것일까?

‘아니…… 이 정도라면 귀의를 한 정도가 아니라 자아쯤은 될 터인데. 천마의 얼굴이자, 칠흑왕의 자아인 존재라. 참으로 해괴망측한 존재로군.’

우마왕은 기가 차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

물론, 통천교주도 이블케가 누군지를 읽은 눈치였다.

다만, 눈빛은 제법 날카로웠다.

그녀도 한때 힘을 취해 칠흑왕을 좇았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그녀가 신위로 두고 있는 것이 꿈인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오효효! 아무래도 제가 두 분께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나 보군요.”

이블케는 예의 웃음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힘을 상당수 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흐트러지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가?”

“오효효. 무엇을 말씀이신지요?”

“지금 쓰고 있는 가면 말일세. 금이 적지 않게 간 것 같은데, 그렇게 계속 두어도 괜찮은지 물은 걸세.”

이블케는 아주 잠깐 말없이 웃었다.

우마왕의 표현이 이보다 정확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면.

본래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이런 그릇을 두고 있으니, 썩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다. 실제 인격이나 말투도 이와 많이 다르기도 했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닌데 말일세. 안으로 들어가다가 자네 때문에 자칫 변고라도 당했다간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말일세.”

“오효효효. 그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블케는 한쪽 입꼬리를 크게 말아 올렸다.

비록 다 잡은 퀴리날레와 프네우마를 눈앞에서 놓치고, 도리어 발목이 묶이면서 상당수의 칠흑을 놓쳐야만 했기에 속이 들끓고 있다지만.

그에게는 그만의 방법이 다 따로 있었다.

자꾸만 미꾸라지처럼 도망친다면, 그럴 수 없도록 기존의 판을 다 뒤집어서 한곳에다 몰아넣으면 될 일이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손을 써 두었으니까 말이죠.”

* * *

『아들아. 묻지 않느냐.』

“…….”

『제발 대답을 해 주면 안 될까?』

계속되는 크로노스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연우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두 부자지간의 분위기가 워낙에 흉흉한 탓에, 정우나 레아도, 그리고 다른 권속 등도 차마 거기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차연우!』

결국 크로노스는 크게 호통을 치고 말았다.

한평생 쌍둥이 아들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특히 연우에게는 마음의 빚을 잔뜩 지고 있었기에. 연우가 얼마나 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크로노스는 되도록 그를 혼내지 않으려 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도 바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고.

잠에서 깨어난 뒤로 이따금 도저히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를 때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보긴 했어도 절대 거기에 대해서 다그친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여태껏 잘 살아왔던 아들이었으니, 이번에도 잘 헤쳐 나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크로노스가 연우와 합일을 이룬 채로 보았던 그의 속내는.

연우가 현인과 이리저리 존재가 뒤섞이면서 얼핏 드러났던 계획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정말 칠……!』

크로노스는 크게 소리를 치려다 말고, 레아와 정우의 걱정에 찬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해 있는 것을 보고 연우만 들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보냈다.

[크로노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저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고 묻잖아! 대답해, 차연우!]

“…….”

하지만 연우는 여기에 대해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 맞나 보구나.』

순간, 잔뜩 올라갔던 크로노스의 어깨가 아래로 축 가라앉았다. 짜증과 분노, 슬픔과 연민이 얼굴 위로 잔뜩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이런 업을 쥐게 만든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어리고 말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연우의 노림수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 ‘꿈’이 다시는 종말의 위협에 노출되지 않도록…… 칠흑왕, 그 자체가 되어서 영원한 잠에 드는 것.

칠흑왕이 깨어났을 때 이 세계란 ‘꿈’은 완전히 저물고 만다. 그리고 천마가 다시 칠흑왕을 재우며 새로운 ‘꿈’이 시작된다. 사실도, 기억도, 존재도 전부 처음부터 시작되는 ‘꿈’이. 종말 뒤에 창조가 오는 것이다.

연우는 바로 그런 위협을 없앨 생각이었다.

잠에서 깨지 않으면 절대 종말이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럼 이 ‘꿈’은 영원토록 이어지게 된다.

그 ‘꿈’에는 더 이상 ‘밤’의 위협도 없을 것이고, ‘낮’의 혼란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평온하고 평안한 세계.

가족들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을 위해서라면. 연우는 자신의 희생 따윈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여태 그러하였듯이, 그는 여전히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윈 도구처럼 여겼으니까.

그리고 크로노스는 그런 생각들을 모두 읽어 들였기에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전부 다 부모인 자신이 못났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너는…… 그것이 이뤄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모두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다고 해서 정말 우리가 좋아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

연우가 잠에 들고 나서 곧장 하려는 일도 뭔지 알고 있었다.

소멸(消滅).

그 존재 자체가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이 ‘꿈’에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없던 것으로 만들려는 거겠지.

그런다면 사람들은 그를 기리거나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칠흑왕쯤 된다면 그 정도쯤은 쉽게 해낼 수 있을 터였다.

『하아! 정말 어떻게 된 게……!』

크로노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더 이상 연우를 다그치는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

“…….”

“…….”

그런 침묵이 보고 있던 이들에게는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러던 그때.

“……아버지.”

정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연우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려 하다가 발각되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냐며 딱딱한 표정으로 다가가 물으려 했고.

바로 그때.

콰아아앙!

갑자기 저만치서 들린 폭음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원래 ‘낮’의 진영이 있던 곳.

[‘올림포스’와 ‘말라흐’가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모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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