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58화 (758/862)

8화. 집행자(執行者) (3)

“이따 마저 이야기하시죠.”

연우는 크로노스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다른 ‘밤’이 피어나자 곧장 그림자를 움직이면서 그쪽으로 움직였다.

『연우야, 연……!』

크로노스가 다급하게 아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연우는 이미 축지를 밟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크로노스를 무조건 대동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싸늘하다 못해 차갑기만 한 태도.

하지만 여태껏 아들의 여러 면모를 보아 왔던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들이 뭔가를 숨기고 싶어 할 때에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을.

『너…… 정말로……!』

크로노스는 그런 아들이 못내 안타까워서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나면서도 슬펐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고서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못난 모습이 너무나 한탄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크로노스가 움직이려는데.

“아버지.”

별안간 그의 옆으로 정우가 조용히 다가왔다.

크로노스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쭈뼛 세우고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정우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레아는 저만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 실수야.’

크로노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런 일일수록 다른 가족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아주 조용히 처리해야 했건만.

한순간 감정적 동요가 너무 큰 나머지 크게 소리를 쳤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크로노스는 아주 잠깐 모른 척 시치미를 떼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되도록 정우와 아내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정우의 강렬한 눈빛을 본 순간, 그는 더 이상 잡아뗄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하고 말았다.

용마안. 아니, 혜안(慧眼)을 깨우친 두 눈이 단단히 자신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거짓을 말한다면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실을 말하라면서 다그칠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저 눈빛은…… 타인을 위해서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한 이의 것이었다.

크로노스가 가족을 위해서. 레아가 아들들을 위해서. 연우가 정우를 위해서 그러했듯이.

정우도 연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경우에는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하아!』

크로노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우의 두 눈이 크게 요동쳤다.

* * *

[‘밤(녹스)’이 찬란하게 덮쳐 옵니다!]

[‘밤(녹스)’이 음울하게 피어납니다!]

[두 개의 ‘밤(녹스)’이 충돌합니다!]

‘밤’과 ‘밤’이 거세게 부딪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우는 저쪽의 ‘밤’은 얼마 가지 못하고 무너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현인이 직접 재림을 했거나, 이블케가 있다면 또 모를까.

그와 결탁한 한낱 수족에 불과한 미카엘이 아무리 ‘밤’을 피워 대 봤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자신이 진짜 천 년 전의 루시엘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파하하하! 그래! 이거지, 바로 이거고 말고!”

절제의 돌을 삼킨 미카엘의 신력은 확실히 웬만한 창조신이나 주신 급보다도 더 우위에 해당했다.

애당초 미카엘이 메타트론보다도 더 강한 힘을 지니기도 했지만, 영혼석과의 상성이 너무나 잘 맞아 잠재력이 폭발할 듯이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밤’으로 전향을 하면서 얻게 된 칠흑의 힘까지 풍겨 대고 있는 지금.

미카엘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힘에 완전히 도취된 상태였다.

쉴 새 없이 불길이 떨어졌다. ‘밤’의 선봉 역할을 맡았던 타계의 신들이 줄줄이 튕겨 나거나 사냥당했다. 올림포스와 아테나도 미카엘의 불벼락을 일일이 튕겨 내기에 바빴다.

더군다나 부유령처럼 미카엘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도는 대천사들의 힘도 결코 만만치 않았으니.

우리엘과 라파엘 등은 분명히 올림포스와 사사건건 척은 지어도, 메타트론의 유지를 잇고자 하는 성향이 강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저도 모르게 영혼이 전부 현인에게 제물로 바쳐진 상태였고, 신력이 충만한 육체는 망신의 군세를 떠받치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집단 감염되었습니다!]

[‘말라흐’의 현재 상태는 ‘망신접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혼세팔신이 출현하고 난 뒤부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이 잡것들은 대체 무엇이냐는 의문을 드러냅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모두 불살라서 아버지의 양분으로 삼으면 그만이라고 대답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그 말이 아주 옳다면서 저쪽 ‘밤(녹스)’의 영역을 침범합니다.]

꾸우웅-

미카엘과 말라흐는 처음엔 우위를 보이는가 싶었지만, 전투의 양상은 점차 변해 갔다. 불결의 근원을 시작으로 혼세팔신이 거침 없이 권능을 뿌려 대기 시작했다. 마치 쓸데없는 쓰레기들을 옆으로 치우는 것처럼.

“푸하하! 그런다고 달라질 줄 아느……!”

미카엘은 자신이 피운 ‘밤’을 무시하고 무작정 돌진만 하려는 멍청한 타계의 신을 보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그런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면 ‘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것들은 힘만 강할 뿐이지, 생각이나 사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염된 대천사들이 줄줄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기 전까지는.

퍼퍼퍼펑-

“이, 이게 무슨……?”

순간, 미카엘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렇게나 손쉽게 말라흐가 밀려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역시 ‘밤’과 타계의 신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낮’의 진영이 십 년 내내 미친 듯이 싸워 댔어도, 단 한 차례도 ‘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미카엘이 결국 ‘낮’을 버리고 ‘밤’으로 전향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도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낮’의 다른 놈들은 연우가 언젠가 깨어나 그들을 구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지만, 미카엘은 애당초 그것을 믿지 않고 있었다.

설사 그가 깨어난다고 해도 ‘밤’을 물리칠 수 있을지 어떨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반면에 ‘밤’으로 완전히 넘어갈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타계의 신들이 보이는 무자비한 힘을 자신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문제는 미카엘이 얻은 그 힘이, 영혼석을 삼키고 나면 더 강해질 줄 알았던 그 힘이, 정작 연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이었다.

정말 같은 ‘밤’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밤’의 정수라 할 수 있을 녹스의 주인이 된 것이, 이제는 현인이 아닌 연우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생긴 패착이었다.

콰르르릉!

연우는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검뢰가 빗발칩니다!]

[검뢰가 빗발칩니다!]

……

[‘검은 구비타라’가 만연합니다!]

타계의 신들이 진군하고, 검뢰가 빗발치면서 말라흐를 송두리째 밀어냈다. 그리고 그 뒤를 샤논 등의 디스 플루토가 점령군처럼 전진하자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연우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이런, 제길! 제기라아알! 대체 뭘 하는 거야!”

미카엘이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로서는 빗발치는 검뢰를 막아 내는 게 고작이었다.

절제의 돌을 삼키고 나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과 연우 사이에는 어떤 수를 써도 절대 건널 수 없을 격차가 존재한 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꼬드겼던 이블케가 거짓말을 속삭였다는 것까지도.

‘이블케 놈……! 날 속였어!’

콰르르릉!

콰르르, 콰르릉-

아무래도 이블케는 단순히 조금이라도 연우의 발목을 잡을 수단이 필요했던 것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으니.

연우가 쏟아 내는 검뢰가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콰르르릉!

그러다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 지는 검뢰를 보고, 미카엘은 몽생미셸로 겨우 그것을 떨쳐 낼 수 있었다.

‘크윽!’

하지만 그 한 방으로 인해 몽생미셸은 전체에 균열이 퍼져 신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고, 절제의 돌이 마구 뿜어 대던 마력도 출력이 한계를 넘고 말아 잠시 기능이 정지했다.

단 한 방으로 미카엘을 거의 무력화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미카엘은 한순간 전의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고.

“한눈을 팔면 안 좋지 않아?”

별안간 아테나가 불쑥 눈앞에서 나타나면서 검을 휘둘렀다.

역시나 그처럼 칠흑이 잔뜩 응축된 검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연우의 절대적인 가호가 뒤따라 신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크게 개방된 상태라고 해야 할까.

콰아아앙!

결국 미카엘은 절제의 돌을 삼킨 것에 대한 충분한 보정 효과도 누려 보지 못한 채, 아테나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급급해하며 밀려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작 이게 끝은 아닐 텐데?’

다만, 연우로서는 이블케가 파놓은 함정치고는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에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단순히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만으로, 영혼석과 미카엘이라는 패를 버리기엔 너무 낭비라고 생각되어서였다.

‘일단은 저놈부터 처치하고 이블케가 있을 곳으로 넘어가야겠어.’

연우는 어차피 크로노스에게 모든 계획을 들킨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이블케를 잡으러 가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가족은 모두 되찾았고, ‘밤’도 모두 회수했으며, 격도 현인-이블케와 동등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다른 자아들과 다투느라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을 이블케를 잡아 남은 칠흑까지 마저 흡수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이블케가려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도 알아내고, 먼저 선수도 쳐야 하지 않겠나.

무엇보다.

‘정우가 아버지한테서 모든 사실을 듣게 되면 골치가 아파져. 그러니까 서둘러야……!’

내친김에 빠르게 움직일 생각을 하고서, 연우가 미카엘의 목을 빠르게 치기 위해 검결지(劍結指, 주먹에서 검지와 중지만 편 상태)를 짚으며 허공에다 휘두르려는데.

피피피핑!

갑자기 허공에서부터 수십 개로 분리되어 날아오는 빛의 화살들이 보였다.

‘이예!’

연우는 그 화살들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낯빛을 잔뜩 구겼다.

브라함을 죽였던 그놈이었다!

콰르르릉-

채채채챙!

검뢰를 허공에다 뿌리자, 거미줄 모양으로 뇌기가 퍼져 나가면서 빛살들을 전부 허공에서 격추시켰다.

그런 와중에 이예가 조용히 바닥에 착지했다.

“오랜만이로군.”

이예는 제 딴에는 반갑다며 손을 흔들며 인사했지만.

쐐애액!

이미 그보다 먼저 연우가 먼지 구름을 가르면서 이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말도 없이 다짜고짜 손찌검인가? 못 보던 새에 많이 격해졌군.”

[7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연우는 검고 붉은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용의 비늘로 전신을 뒤덮다시피 한 모습으로 검뢰를 가득 뿌렸다.

“뭐, 단순히 싸우자는 것이라면 나도 나쁠 건 없지. 이블케가 되도록 아주 오랫동안 자네의 발목을 붙잡아 달라고 부탁해서 말이야.”

이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등에 매단 화살통에서 두 개의 소증(素矰, 빛의 화살)을 꺼내 마치 단검처럼 쥐면서 검뢰를 가르고, 연우와 육탄전을 시작했다.

퍼퍼퍼펑!

연우와 이예는 그 자리에서 연쇄 충돌을 벌였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고, 권능과 권능이 충돌했다.

신력이 파문을 그리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는 가운데.

[‘낮(에로스)’의 주인이 강림합니다!]

별안간 그들 사이로 정우가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으로 수직 낙하했다.

자칫 잘못 휘말렸다간 퀴리날레의 권능에 속박이 될 것 같아, 연우와 이예는 서로를 크게 밀어내면서 멀찍이 떨어졌다.

콰아앙!

“퀴리날레의 새로운 후손이 제법 매서울 테니 주의하는 게 좋다고 그러더니. 그게 바로 그쪽인가 보지?”

“듣보잡 새끼는 빠져.”

정우는 살벌한 눈으로 이예를 한껏 노려보다가, 연우 쪽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형! 형이 그런다고 해서 내가 좋아할 줄 알았……!”

“네 뒤에 있는 놈.”

정우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연우는 차분한 태도로 정우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저만치 뒤에 선 이예를 가리키며 말했다.

“브라함을 죽인 놈이다.”

“……!”

정우의 시선이 다시 이예 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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