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59화 (759/862)

9화. 집행자(執行者) (4)

정우의 두 눈에는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브라함.

그에게는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한 이름.

처음 정우가 ‘진짜’ 차정우로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행복이었다.

드디어 애타게 찾던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뿐만 아니라, 이제 딸인 세샤의 얼굴을 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전까지는 아무 감촉도 느낄 수 없는 사념체의 손끝으로만 세샤를 만져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뒤에 찾아온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스승이자, 그에게는 장인이 되는 브라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가 있었더라면.

그가 제자이자 사위인 정우가 깨어나고, 드디어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도 웃지 않았을까?

정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겉으로는 무뚝뚝해서 표현이 서툰 영감님이었지만.

그래도 속에 담긴 잔정은 아주 많았으니까.

그런데…….

‘브라함의 원수라고?’

정우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전 수준을 훨씬 넘어선 용마안이 이예를 직시했다.

기존의 용마안이 단순히 상대에 얽힌 진실을 꿰뚫는다면, 퀴리날레의 권능이 더해진 새로운 용마안은 존재와 존재를 둘러싼 공간의 정보까지 모두 읽어 들일 수가 있었다.

[‘퀴리날레의 마안(魔眼)’이 목표물을 분석합니다!]

[파악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름: 이예.]

[직급: 전(前) 천교의 대장군. 현(現) 트리니티 원더. ‘시의 바다’ 소속. 이블케의 주구(走狗).]

[신위: 달.]

[목표: 알 수 없음.]

……

“무슨 수를 쓰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를 분석이라도 하고 있나 보군?”

이예는 살짝 흥미가 감도는 얼굴로 정우를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우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마침 지나가는 한 줄의 문구가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격자인 브라함을 처치…….]

브라함을 처치했다.

그 하나의 문구면 충분했다.

파앗!

〈하늘 날개 - 최대 출력〉

〈절대권능공간〉

정우는 하늘 날개에 신력을 최대로 쏟아 넣었다. 배광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싶더니, 곧 자취를 감춘 그가 이예 앞에 등장했다.

차아앙!

“말도 없이 기습전이라니. 형제가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이예는 어느새 두 개의 소증을 교차시키며 정우가 내려친 검을 막고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다짜고짜 공격을 가한 것에 대한 힐난이었지만.

정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움직였다.

‘빛의 파도’를 잔뜩 머금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쉴 새 없이 원호를 그렸다.

차차차창!

콰쾅! 콰르르-

정우는 오로지 이예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이예가 탑을 최초로 세운 트리니티 원더이니, 자신을 인정해 주었던 천마의 오른팔이니 하는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난타의 아버지이자 세샤의 외할아버지인 브라함의 원수를 갚는 것.

그리고 브라함이 들었다던 비밀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낮(에로스)’의 태양이 다른 어느 때보다 크게 빛을 드러냅니다!]

[북두와 칠성의 가호가 따릅니다!]

“흠! 군림보라. 좀처럼 쉽지 않군. 지호 녀석, 필요할 때는 전혀 움직이질 않더니 꼭 이럴 때는 빠르단 말이지.”

이예는 움직이는 족족 자신을 구속하려 드는 군림보의 느낌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의 장기는 민첩하고 기민한 움직임에 있는데, 자꾸 발목이 붙잡히니 정우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우가 자랑하는 화력은 그로서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으니.

여기서 연우가 정우와 협공을 하려 든다면 정말 위험해질 것 같았다.

“……그럴 수야 없지. 아내를 과부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차피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연우 등의 발목을 묶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굳이 패를 숨겨 둘 필요가 없었다.

이예는 왼손에 있던 소증을 정우에게로 냅다 던졌다.

가까이 접근을 시도하려던 정우가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 틈을 타 이예는 한순간 빈 왼손을 활짝 펼쳐 허공을 거세게 후려쳤다.

콰직!

공간이 깨졌다. 균열이 삽시간에 허공을 따라 잔뜩 퍼져 나가면서 사이사이로 칠흑이 피어올라, 미카엘이 미리 열어 두었던 ‘밤’에 닿았다.

[‘밤(녹스)’의 영역이 한껏 넓어집니다!]

[대규모 강림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일제히 검은 벼락이 떨어졌다.

콰릉, 콰르릉!

우르르-

[사라진 ‘꿈345,147,832,335’의 대적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라진 ‘꿈65,459,304,596’의 대적자가 얼굴을 비칩니다!]

[사라진 ‘꿈12,312,778’의 대적자가 거대한 몸집을 일으킵니다!]

……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이번 ‘꿈’에서 절대 정보를 읽어 들일 수 없는 존재들이 대규 모로 출현하고 있습니다! 인과율에 강한 과부하가 걸립니다!]

[경고! 해당 공간에 주어지는 영압(靈壓)의 세기가 허용치를 훨씬 초과하였습니다! 해당 좌표가 함몰됩니다! 공간의 붕괴는 자칫 대형 블랙홀을 부를 수 있습니다!]

[경고! 정보를 읽어 들일 수 없는 존재들의 대규모 출현으로 인해 해당 공간의 법칙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서둘러 해당 이레귤러 혹은 바이러스를 제거하십시오! 그렇지 않을 시, 종말의 위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경고! 해당 공간에 적용되는 시스템의 메모리가 부족합니다! 서버와 클라이언트 간에 연결된 네트워크의 정보 처리 속도가 한없이 낮아집니다!]

……

[‘춤추는 녹색 불길’이 어떻게 옛 ‘꿈’의 잔재들이 있을 수 있는 지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불쾌한 얼굴들을 보고 짜증을 느낍니다.]

[‘불결의 근원’이 아무래도 뜯겨 나간 다른 아버지가 남긴 존재들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그 존재는 아버지일 수가 없다고 강하게 항의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미안하다고 잘못을 인정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이것은 자신들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말합니다. 저들뿐만 아니라, 가짜 아버지에게도 응징을 가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습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저들에게 빗나갔던 멸망을 다시 내려 주어야겠다고 강한 의사를 밝힙니다.]

……

[‘밤(녹스)’의 혼세팔신이 사라진 ‘꿈’의 존재들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혼세팔신을 위시한 ‘밤’의 모든 존재들은 여러 짐승들을 보자마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오래전에 ‘꿈’과 함께 소멸한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나타난 것이니 황당할 수밖에.

짐승이란 그들이 살던 ‘꿈’에서 대적자로 활동했던 이들이었고, 때문에 당연히 ‘밤’의 존재들과도 적대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꿈’을 기억하는 ‘밤’의 존재들로서는 괘씸한 존재들인 셈.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감히 ‘밤’이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한다?

그것도 자신들이 여태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칠흑왕의 주 자아가 부리고 있다?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감정들은 자연스레 분노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고 한편에 남아 있던 현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완전히 말소되기도 했다.

짐승들과 혼세팔신이 크게 뒤엉켰다.

웬만한 행성들보다도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는 놈들이 전력을 드러내면서 싸우는 모습은 괴기 하기까지 했다.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이미 시스템은 그들이 빚어내는 현상을 분석하는 걸 포기까지 했다.

「홍홍홍! 정말이지 개판이 따로 없네용! 그럼 그럴 때일수록 토끼판으로 만들어 줄 수밖에 없겠어용! 귀엽고 깜찍한, 토끼 펀치-!」

한쪽에서는 라플라스가 우락부락한 구릿빛 근육을 잔뜩 드러내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평소라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한 마디씩 쏘아붙일 만한 존재들도, 하나같이 싸움에 집중하느라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문제는.

이예가 일으킨 소요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의 본영에 사라진 ‘꿈’의 대적자들이 대거 출몰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의 본진에 사라진 ‘꿈’의 대적자들이 대규모 강림을 시도합니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의 본궁에 사라진 ‘꿈’의 대적자들이 모습을 비치고자 합니다!]

[천계 곳곳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밤’뿐만 아니라, ‘낮’에 가담한 자들과도 이참에 완전한 전쟁을 치르겠다는 듯, 여태 숨겨 뒀던 모든 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라고?』

왕! 왕왕! 아가레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메시지였다.

현재 르 인페르날의 대성역에는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전력만을 남기고, 전부 이곳으로 대동해 온 상태.

만약 여기 나타난 수준의 짐승들이 그쪽에도 나타난다면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니플헤임은 펜리르만 나와 있을 뿐, 로키를 비롯한 주요 전력은 대성역에 남아 있어서 상황이 나은 편이었지만 그쪽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아가레스 님!』

『이대로 여기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어서 되돌아가야……!』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동마왕군을 비롯해 르 인페르날의 마왕들이 일제히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가레스는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그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흔들리지 마라! 지금 우리가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노리는 것임을 왜 모르는 거냐, 이 멍청한 것들아!』

마치 자신의 명령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당장 찢어 죽이겠다는 듯이, 아가레스는 살기를 가득 담아 으르렁거렸다.

『대성역에 남은 할파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테니 다들 경거망동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이탈할 기미가 보이는 놈은 그 자리에서 모가지를 뽑아 선악과의 재료로 만들어 주마.』

『……!』

『……!』

『……!』

『알았나?』

『보, 복명!』

『아, 알겠습니다!』

『며, 며, 명심하겠습니다!』

마왕들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전쟁에 몰두해야만 했다.

이전 수장이었던 바알이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그들을 휘어잡았다면, 아가레스는 광기 어린 폭력성으로 그들을 찍어 눌렀다.

더군다나 친위대인 동마왕군은 절대적인 충성심으로도 유명한바. 아가레스의 명령을 허투루 들었다간 정말 소멸을 면치 못할 것 같았기에, 그들은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친다거나, 르 인페르날을 탈퇴한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아가레스는 어떻게든 끝까지 쫓아와 목을 뽑아 버리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까.

결국 말을 따르는 수하들을 보면서.

아가레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협박이 단순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악마라는 것들은 위계질서가 강하다고 해도, 결국엔 각자의 욕심과 이권을 가장 우선시하는 놈들이었으니까.

만약 대성역이 망가지면서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터전이 엉망이 될 소지가 보인다면,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종말을 유도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탑이 붕괴하기 전에 그랬으면 됐을 텐데, 왜 굳이?

아가레스가 봤을 때, 여태껏 그가 봤던 이블케란 존재는 절대 종말을 바랄 위인이 아니었다.

아니, 바란다고 해도, 당장 지금 이를 실행할 리가 없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겐 다른 목적이 있으니. 이블케는 그걸 먼저 이루고 나서 종말을 결행할 위인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위험한 수를 내던졌다.

짐승들을 이렇게 대거 출몰시키면 ‘꿈’이 영압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우려가 큰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건……?

‘그만큼…… 다급하게 쫓기고 있단 뜻인가?’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블케는 연우로부터 칠흑의 상당수를 빼앗긴 상태. 절대적인 지지층이었던 ‘밤’도 연우에게로 돌아섰다.

아직까지 판세는 그에게 좀 더 유리하게 놓여 있다지만, 그마저도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 연우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이블케로서는 연우에게 더 쫓기기 전에 목적을 수행하고 싶을 테지.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빼앗겼다간 그땐 정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그 목적이라는 건, 아마도 려의 무덤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뭔가를 찾는 것일 테고……!’

그래서 이블케가 위험한 도박수를 던진 게 분명했다.

연우가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게 발목을 묶기 위해서. 그가 바라는 것이 ‘꿈’의 유예인 만큼, 절대 ‘꿈’이 위험에 빠지도록 만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연우가 이래저래 짐승들을 내쫓고 위험을 수습하는 동안, 이블케는 목적을 빠르게 완수하려는 것이겠지.

‘그렇게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여유롭기만 하던 이블케를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다니. 허!’

탑의 최고 관리자로서 여태 신과 악마들을 수도 없이 우롱했던 이블케가 아니었나. 그런 녀석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연우의 솜씨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가레스는 여전히 이예, 정우와 대치 중인 연우에게로 시선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자꾸 이런 식이어서야, 계속 탐심만 더 커지지 않는가 말이야.』

아가레스는 붉은 혀로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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