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집행자(執行者) (6)
“형, 이게 대체 무슨……!”
정우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집행자라니!
종말을 가져와 칠흑왕이 ‘꿈’에서부터 깨어나게 만든다는 존재.
원래는 연우가 되기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그가 직접 칠흑왕의 자아가 되면서 유예되었던 숙명이…… 다시 깨어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집행자로서 각성을 했다는 뜻은 단 하나.
[월드 퀘스트(집행 차단)가 생성되었습니다!]
종말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월드 퀘스트 / 집행 차단]
설명: ‘꿈’과 ‘굴레’를 중간에 둔 천마와 칠흑왕의 영원 전쟁(永遠戰爭)은 머나먼 태초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이뤄지고 있고, 그만큼 앞으로도 계속 이뤄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러 ‘꿈’과 ‘굴레’가 맞아야만 했던 운명처럼, 이번 ‘꿈’과 ‘굴레’ 역시 종말로 향하는 카운트가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조금 전, 종말의 수레바퀴를 굴릴 집행자(執行者)가 선정되었습니다.
집행자는 칠흑왕의 가호를 받으며, 칠흑왕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집행자가 내딛는 행보 하나하나가 칠흑왕을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운명으로 귀결될 것이며, 집행자가 마음먹은 의지 하나하나가 칠흑왕을 ‘굴레’에서부터 해방되게 만드는 숙명으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운명과 숙명이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 ‘꿈’은 덧없이 사라지고 ‘굴레’는 허망하게 흩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과 사실, 현상들도 없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 ‘꿈’과 ‘굴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여, 자신이 살아온 업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집행자의 집행 의지를 차단하십시오. 그렇지 않을 경우, ‘꿈’과 ‘굴레’ 와 같이 잠기게 될 것입니다.
제한 조건: 생명 모두.
제한 시간: 종말까지.
달성 조건:
1. 집행자의 의도를 막으십시오.
2. 집행자를 처단하십시오.
보상: 생존.
월드 퀘스트.
정우로서도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퀘스트였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꿈’-즉, 이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 신이며 악마, 인간이나 이종족 관계없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퀘스트인 셈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두 ‘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며,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든, 어떻게든 집행자를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 이런 퀘스트를 받지 않아도 무조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직접적으로 시스템이 이렇게 퀘스트를 내려 주었다는 건, 그만큼 집행자의 의지가 강하게 작동할 것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즉, 방금 전에 연우는 세계의 적(敵)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의 관할하에 있는 권속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될지 모르는…….
그러니 ‘낮’이며 ‘밤’의 존재들도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미친……!』
『사왕!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려는가?』
그건 짐승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이 이 ‘꿈’을 종말에 가까운 방향으로 몰고 가는 중인 건 사실이었으나, 정말로 종말을 바라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자신들이 살았던 ‘꿈’이 아닌 이상, 이곳이 어떤 결과를 맞든 간에 그들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목적을 완수하기 전까지 이 ‘꿈’이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즉, 이블케가 려의 무덤에서 ‘그것’을 얻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목표일 뿐, 정말 이런 식으로 종말을 당길 생각 따윈 추호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연우가 이렇게 대놓고 같이 불을 질러 버리고 말았으니!
이래서야 몸에 불을 붙이고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이블케로부터 절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놈이 아니니 주의해야 한다는 말은 들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미친놈이었을 줄이야!’
‘그렇게 살리고자 하는 가족들이 위험에 내몰릴지도 모르는데, 정녕 상관이 없는 건가?’
결국 짐승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계속 ‘낮’과 ‘밤’을 막아야만 하는 건지, 아니면 이대로 연우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도록 막아서야 하는 건지.
좀처럼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이런 건 어디에서도 이블케가 말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블케도 아무리 연우가 미쳐도 이런 식으로 달려들 거라고는 예상도 못 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우 앞에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퀘스트 창이 하나 더 떠 있었다.
[시나리오 퀘스트 / 대적자(對敵 者)]
설명: 당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집행자의 의지와 실행을 막기 위한 존재로 내정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집행자가 각성을 완료하면서 그러한 운명도 똑같이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집행자를 막으십시오.
그런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번 ‘꿈’과 ‘굴레’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한 조건: 대적자.
제한 시간: 종말 직전까지.
보상:
1. 생존.
2. 조물주(造物主)의 위(位).
월드 퀘스트에 비하면 아주 짤막한 내용이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무게는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로 하여금 당장 연우를 죽이라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북두와 칠성의 가호가 뒤따릅니다!]
[천마가 당신을 굽어살핍니다.]
정우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것은 분노와 원망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이제는 전혀 아니었다.
『제게 군림보를 주신 것이 이런 것 때문이었습니까!』
정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어디로 외치든 간에 천마가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천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천마는 그에게 어떤 응답도 해오지 않았다.
정우는 부글부글 끊는 속을 억지로 삭이면서 재차 소리쳤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뜻대로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천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배신에 가까운 행위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마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정우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정우는 그냥 무시하고, 하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연우에게로 달려들었다.
브라함의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갖고 있었지만, 당장은 연우를 막아서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나리오 퀘스트의 두 번째 보상으로 제시되었던 ‘조물주의 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갖고 있는 만큼 ‘창조(創造)’라는 신위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조물주의 위가 ‘창조’보다도 더 우위에 해당하는 상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물주가 되면 뭘 한단 말인가?
이 ‘꿈’과 ‘굴레’의 관리자가 되면 또 뭘 한단 말인가?
그곳에 형이 없다면, 그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울 좋은 것들에 불과할 텐데.
[‘낮(에로스)’의 태양이 가장 화려하게 빛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연우를 구속하려 했지만.
[집행자의 의지에 따라 종말의 수레바퀴가 빨라집니다!]
[종말을 위한 인과율이 부과되었습니다.]
[종말을 위한 인과율이 부과되었습니다.]
……
[부여된 인과율만큼 칠흑이 기승을 부립니다!]
연우가 집행자로서 각성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부족한 인과율을 획득하고, 필요한 만큼 화력을 잔뜩 쏟아내기 위해서였으니.
애당초 조건만 따른다면, 제아무리 정우라 하여도. 짐승이 떼로 덤빈다 하여도,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된 연우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밤(녹스)’의 어둠이 모든 빛을 가립니다!]
화아악!
연우로부터 뻗친 칠흑빛의 안개가 소용돌이를 쳤다.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물들면서 시릴 정도로 빛나던 정우의 배광마저 전부 집어삼켰다.
“안……!”
정우는 그것을 막아서려 했지만, 칠흑의 해일은 단숨에 그를 덮쳐 버렸다.
이예나 짐승들도 마찬가지. 연우가 달아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즉각 그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칠흑에 휘말려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뒤였다.
심지어 연우의 권속들까지도 예외는 없었다.
정우가 뿌려 대는 권능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칠흑 속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의 법칙 따윈 전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결국 연우는 그 틈을 타 축지로 자취를 감춰 버렸고.
휘휘휘!
정우가 겨우겨우 칠흑을 헤집으면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모든 것이 늦어 버린 뒤였다.
신력의 흔적도, 자취까지도 몽땅 삭제된 상태였다.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아낼 수단이 없었다.
“빌어먹을……!”
허공에 정우의 욕지거리만이 가득 퍼져 나갈 뿐이었다.
[천마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대적자를 굽어살핍니다.]
* * *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천교’의 대성역, ‘현도(玄都)’에 강림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
연우는 그런 생각에 곧장 천교의 대성역으로 이동했다.
그냥 려의 무덤으로 바로 가 버릴까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잘못 휘말렸다간 괜히 일을 그르칠 수 있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우마왕의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도 파악이 되질 않고.’
미후왕의 허물도 말하지 않았었나.
자신의 본체…… 즉, 미후왕인 제천대성 손오공을 어떻게든 찾 으라고.
려와 마찬가지로 천마의 얼굴이기도 한 그를 실제로 찾을 수 있다면, 동주칠마왕의 계획을 파악하고 이블케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천교에게도 손오공을 찾으라고 말을 해 뒀었고.
그런데.
‘역시 여기에 있군.’
천교의 주요 전력은 전부 약속과 다르게 려의 무덤이나 손오공이 있을 것으로 파악되던 곳이 아닌, 대성역에 몰려 있었다.
이곳에도 상당수의 짐승들이 강림하면서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허겁지겁 찾아온 것일 테지. 누가 뭐라 해도 그들로서는 대성역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테니까.
신과 악마의 사회에 있어 대성역 그 중심에 있는 ‘대신전’이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주신의 힘을 만세계에 널리 알리고, 여기에 감화된 피조물들로 하여금 모든 신앙이 모이게 하는 중심지. 사회의 격을 나타내는 곳 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곳이 망가져서야, 사회가 가진 가능성도 그만큼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라진 ‘꿈76,543,545’의 대적자가 칠흑왕의 대체 자아를 발견했습니다!]
[사라진 ‘꿈4,345,645,738,764’의 대적자가 방해를 하려는 칠흑왕의 대체 자아에게 적의를 발산합니다!]
……
『경계선 면에 있어야 할 저자가 어떻게 이곳에……?』
『이유는 나중에 따져 물어도 된다. 우선 놈부터 막아! 어서!』
『죽어라!』
짐승들은 연우를 발견하자마자 포악한 이를 잔뜩 드러내면서 거친 숨결을 토해 냈다. 몇몇은 기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거세게 휘두르면서 공간을 찢어 연우까지 날려 버리려 했다.
하지만.
“귀찮군.”
[‘밤(녹스)’가 대성역의 상공을 따라 자욱하게 퍼집니다!]
그들이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연우를 둘러싸던 그림자가 단숨에 대성역 현도의 하늘을 전부 뒤덮었다.
그리고 다량으로 아래로 쏟아지는 타계의 신들.
우-
우우- 우-
『크아아악!』
『이거 놔라! 놓지 못할까!』
짐승들은 여기저기 달라붙는 혼세팔신이며 타계의 신들을 어떻게든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기괴하게 생긴 촉수들이 튀어나오면서 녀석들의 숨통을 강하게 옥죄었다.
[‘밤(녹스)’가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적들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합니다!]
『안…… 돼……!』
아직 피안에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전까지 함부로 죽지 못다. 짐승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항했지만, ‘밤’은 예외 없이 그들의 생기를 빼앗으면서 하나하나씩 숨통을 끊어 놓았다.
“…….”
“…….”
“…….”
[‘천교’의 모든 소속 신들이 허탈한 얼굴로 ‘밤(녹스)’의 존재들을 바라봅니다!]
[‘천교’의 모든 소속 신들이 너무나 손쉽게 강적들을 제거한 칠흑왕의 대체 자아를 두려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방금 전까지 죽기 살기로 놈들과 싸우고 있던 천교의 신들은 모두 얼이 빠진 채로 연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그들을 모두 지나쳐 허탈해하고 있는 이랑진군과 나타태자 앞에 섰다.
“손오공, 찾았나?”
이랑진군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허튼소리를 했다간 당장에라도 그를 찢어 죽일 것 같이 살벌하게 빛나는 연우의 눈을 보고 당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