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손오공 (2)
“천마라니…… 그게 무슨?”
이랑진군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도 건너편 도로로 걸어가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겉보기엔 그가 알고 있는 천마보다는 나이가 제법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짓궂어 보이는 인상은 영락없는 천마의 얼굴이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국한된 것일 뿐.
그보다 깊숙한 내면으로 들어가면 천마와는 많이 다른 듯했다.
강대한 힘을 갈무리하고 있거나, 숨기고 있는 등의 다른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생김새만 닮은 인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본질(本質)이 비슷해 보인단 말이지.’
물론, 이랑진군도 자신보다 격이 한참 높은 천마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기질(氣質)이란 건 있었다.
그런데 저 사내의 본질이 그 기질과 비슷했다.
‘하지만 또 영혼만 봐서는 독립된 개체가 분명한데…… 내면도 읽을 수가 없고. 좀처럼 알 수가 없군.’
이랑진군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일단 따라가 보지.”
“그, 그러지.”
이랑진군은 연우가 앞장서서 수상쩍은 사내의 뒤를 밟기 시작하자, 황급히 바로 따라붙었다.
“그대도……?”
연우도 마찬가지로 읽히는 게 없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랑진군은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파악할 수 없는 피조물이라니. 그런 게 정말 존재가 가능한 걸까?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납치를 하거나, 기습을 해서 정체를 시험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건 사왕이 원하질 않는 것 같고.’
연우는 절대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그에게 신신당부를 해 둔 상태.
그렇기에 이랑진군은 계속 가만히 있기로 했다.
물론, 모든 시선이며 감각은 사내에게로 고정하고 여차하면 언 제든 신력을 개방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연우와 이랑진군이 끝까지 사내의 뒤를 쫓았음에도, 이렇다 하게 의심할 만한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내는 당일 해운대에 있을 예정인 페스티벌의 초대 가수인 듯했다.
그는 밴드 윌(Will)이라는 곳의 기타 겸 보컬을 맡고 있었다. 목을 가볍게 풀고, 밴드 멤버들과 즐겁게 합을 맞추면서 리허설에 충실했다.
제법 인기도 있었던 건지, 페스티벌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응원을 하러 온 팬들이 더러 보일 정도였다.
“조금 수상쩍긴 해도 천마는 아닌 모양이군. 하긴 그가 인간 출 신이라는 말이 몇 번씩 돌긴 했지만, 영지를 쌓는다며 창공 도서관에 박혀 있다는 작자가 이렇게 내려와서 놀고 있을 리가 없지. 주변에 다른 인간들을 보고 있으니 별 이상점도 찾아볼 수가 없고.”
이랑진군은 팔짱을 낀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조금만 따져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황’이나 되는 작자가 하계에 강림하는데 아무도 그걸 감지하지 못할 리가.
천마는 ‘굴레’를 굴리는 자. 단순히 의념을 투영해 의체를 만들기만 해도 상당한 파장이 생길 텐데, 여태 아무도 그걸 파악하지 못한 걸 봐서는 그냥 닮은꼴인 게 분명했다.
다른 밴드 멤버들의 내면을 읽어 봐도, 꽤 오랫동안 인연을 쌓고 있는 듯 보였고.
게다가 이랑진군은 아무리 천마가 정신 나간 작자라고 해도, 친아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인간들 틈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
하지만 연우는 무슨 생각인지 말없이 한참 동안 천마를 닮은 사내를 직시했다.
‘비슷한데…… 달라. 뭐지?’
연우는 이제 거의 체화되다시피 한 올포원-비바스바트의 기억을 한참 되짚어야만 했다.
그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천마의 모습도 들어 있었다.
‘손재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올포원-비바스바트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친절하며, 따스했던 아버지의 모습.
그렇기에 올포원-비바스바트는 아버지인 천마를 좇았고, 거기서 초월자가 무엇인지 깨달으면서 절지천통의 뜻을 자신이 잇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손지호’라는 이름을 가진 천마의 모습은 저기 공연장에 서 있는 사내와 많은 면이 흡사했다.
밴드를 하는 것이나, 말투나, 생김새나 느낌까지.
그를 보고 있자니 연우에 깃든 올포원-비바스바트가 마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
반대로 올포원-비바스바트의 잔존 사념은 저것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연우는 거기에 대해서 몇 번이나 되물었고.
[‘비바스바트’의 신화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비바스바트’의 신화가 친부의 흔적은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올포원-비바스바트의 신화는 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천마에 대한 분노 역시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 거였나?’
연우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결국 몸을 돌렸다.
괜히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리고.
사내는 연우 등이 사라진 쪽을 슬쩍 보면서 엷은 미소를 띠다가, 다시 기타 연주에 집중했다.
“자, 그럼 다음 노래는 저흴 유명하게 해 주었던 노래, ‘Fade Heaven’을 부르도록…….”
* * *
“이곳이다.”
이랑진군이 안내한 곳은 해운대 해변가였다.
날이 아직 더워서 그런지, 해변에는 서핑을 즐기는 인원이 제법 보였다.
“제천대성이 누군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전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거칠게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서핑을 즐기는 남자가 있었다. 서핑 보드를 신기(神技)에 가까울 정도의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흔들어 댈 때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백발이 출렁출렁 춤을 춰 댔다.
미후왕의 허물과 똑같이 생긴 얼굴.
심지어 기질까지 똑같았다.
『허! 저 새끼 봐라? 누구는 동굴에다 처박아서 뺑이나 치게 했으면서 누구는 희희낙락하고 있네?』
여태 연우의 시선을 빌리고 있던 미후왕의 허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손오공은 너무 즐거워 보였다.
여태 탑에 갇힌 채로 모진 고생만 했던 미후왕의 허물로서는 울컥할 수밖에 없을 테지.
거기다 워낙에 잘생긴 얼굴에다 체격까지 다부져서 그런지, 남자며 여자들까지 해변에 앉아 그의 서핑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을 정도였다.
『안 되겠다. 야, 부탁 하나만 하자.』
‘……?’
『너 사람 뒤통수치는 거 잘하지?』
이건 또 무슨 말인 건지.
연우는 순간 인상을 팍 찡그렸다.
‘……못합니다만.’
『음? 그럴 리가 없는데? 샤논이라고 했나? 네 수하 중 한 명이 매번 불러 대는 노래가 있었잖아.』
‘…….’
『그러지 말고, 저놈 뒤통수 한 대만 갈겨 주면 안 되겠냐? 영 하는 꼴이 맘에 안 들어서.』
연우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는 놀러 온 게 아닙니다.’
『흠! 역시 안 되나.』
연우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미후왕의 허물을 이렇게 깨운 건, 손오공을 설득하는 걸 도와달라는 의미였건만.
아무래도 이상한 데서 빈정이 상한 나머지 그런 건 부탁하기도 힘들 모양이었다.
‘일단은 접촉해 보고 마저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연우가 손오공 쪽으로 움직이려던 순간.
『잠깐. 기다려.』
미후왕의 허물이 진지한 어투로 그를 붙잡았다.
“게이트가 열리는 것 같은데?”
이랑진군은 물론, 연우도 뒤늦게 소오공에게서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타왕’이 강림합니다!]
[‘교마왕’이 강림합니다!]
그러자 손오공의 머리 위로 나 있던 허공이 출렁이면서 붉은 머리를 한 사타왕과 빼빼 마른 체구의 교마왕이 나타나 수면 위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콰아앙!
충격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바닷물이 수 미터나 높게 치솟고 해일이 거칠게 넘실거렸다.
“꺄아악!”
“무, 뭐야, 저거? 게이트는 원인 불명으로 전부 닫힌 것 아녔어?”
“모,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도, 도, 도망쳐!”
서핑과 요트를 즐기고 있거나, 해변가를 평화롭게 거닐고 있던 연인과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의 눈에는 갑작스레 던전 브레이크라도 발생한 것처럼 비쳤으니까.
“동주칠마왕이 저긴 어떻게……?”
이랑진군이 인상을 굳혔다.
사타왕과 교마왕은 각각 동주칠마왕의 넷째와 둘째에 해당하는 인물들.
각각 ‘용(勇, 용력)’과 ‘교(驕, 교만)’을 상징할 정도로 강한 ‘마왕’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적의 위치에 놓인 작자들이 손오공에 접촉하는 것이 못내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손오공이 저들에게 합류라도 하는 날에는 전력이 저쪽에 크게 기울게 되어 버리니까.
그만큼 제천대성 손오공이라는 존재가 가진 무게는 엄청 났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이랑진군이 신력을 개방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멈춰.”
연우는 그런 이랑진군의 어깨를 짚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랑진군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왜 그러느냐는 얼굴이었지만.
빠아아악!
순간, 저쪽에서 들린 수박 깨지는 소리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다시 손오공을 돌아보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오공이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던 사타왕과 교마왕을 잘근잘근 밟고 있었다!
“아아아악!”
“자, 잠깐 막내야, 우리 말로 할……! 으아아악!”
“이 인간들이 진짜! 이게 얼만지나 알아? 한동안 봐줬더니 동생 무서운 줄 모르지? 진짜 옛날 기억 새록새록 떠오를 수 있게 한 따까리 해 줘? 앙?”
콰쾅, 쿠르르-
퍼퍼퍼퍽!
천교에서도 공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사타왕과 교마왕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실컷 두들겨 맞는 중이었다.
권능을 발휘하려 치면 그걸 강제로 취소하고 때리고, 도망치려 하면 그보다 한 발자국 먼저 따라가서 걷어차는 손오공의 구타 솜씨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사람 패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폭음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었다.
꾸에에엑!
어디선가 그렇게 돼지 멱 따는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한편, 거친 해일 때문에 도망치던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쪽을 보았고.
“저렇게 되고 싶나?”
“…….”
연우는 마찬가지로 이랑진군을 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이랑진군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오래전에 손오공 때문에 천교가 쑥대밭이 되던 끔찍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여간 저 인간은 어째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지? 하여간 지랄 맞은 성격하고는. 쯧!』
미후왕의 허물이 못 말린다는 듯이 혀를 차기도 했다.
연우는 신력을 기울여 일단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사타왕은 이미 피떡이 되어 해롱해롱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교마왕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로 싹싹 비는 중이었다.
손오공은 여전히 아니꼬운 표정이었지만.
“그만! 그으으마아아안! 잘못했으니까 제발 용서를……!”
“뭘 잘못했는데?”
“으, 으응?”
“뭘 잘못했냐고.”
“그거야 이 널빤지를 부순……!”
“아직 모르네.”
“흡!”
“더 맞자.”
“꾸에에엑!”
연우는 실컷 두들겨 맞는 사타왕과 교마왕을 보면서 생각했다.
당장 힘을 쓰는 건 안 된다.
그렇다면 저들을 따돌리고 손오공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바로 그때.
『도와줄까?』
미후왕의 허물이 히죽 웃었다.
아주 재미난 장난을 생각해 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