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손오공 (3)
널브러져 있던 사타왕이 정신을 차리고 슬쩍 눈을 떴을 때 보인 광경은.
퍽, 퍼억, 퍼어억!
자신을 대신해서 실컷(?) 짓밟히고 있는 교마왕이었다.
“꾸에에엑!”
쭈구리처럼 한껏 쭈그러져서는 먼지가 일어나도록 맞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으니.
저 몰골을 보고 대체 누가 수미산을 둘러싼 사해(四海)를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니면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폭군, 교마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교마왕의 ‘교(跋)’는 원래 거대한 이무기, 즉 교룡을 의미하는 바. 천계에서도 함부로 손을 쓰기 어렵던 대마왕이 바로 그였다. 괜히 단 일곱 명으로 천교나 절교와 견줄 만하다던 동주칠마왕의 둘째가 된 것이 아니었다.
성품이 교활하고 뺀질거리는 성향이 있어서 그런 위엄을 다 깎아 먹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저런 홀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밖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동주칠마왕 안에서는 사실 찬밥 신세나 다름없었다.
외부 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우마왕을 대신해 동주칠마왕을 이끄는 입장이라지만, 의제들이라고 해서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었다.
특히 막내는 항상 박박 기어오르기 일쑤였으니.
말이 ‘막내’지, 손오공은 일곱 의형제들 중에서도 제일 막무가 내였다. 우마왕의 말에나 조금 귀를 기울일 뿐, 다른 의형제들에게는 자신의 성질대로 패악을 부리기 일쑤였으니.
덕분에 교마왕은 위에서 눌리고 아래에서 치이는 동네북 신세였다.
처음 우마왕이 교마왕을 불러서 손오공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을 때에도 기겁할 정도였으니.
‘하아. 대체 어쩌다 꼴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일까.’
-흐익! 마, 막내를? 사타왕도 있고 붕마왕도 있는데 나는 왜!
-거 나는 왜 끼는 거요!
-응. 큰오라버니가 시킨 거니까, 둘째 오라버니가 다녀와.
-젠장! 하여간 난 싫다고! 지금 한창 놀고 있을 게 뻔한데, 방해 했다간 그 성질머리로 나만 구박할 게 뻔하다고!
-싫나?
-싫지 그럼! 좋겠습니까?
-어쩔 수 없군.
-……이제야 형님이 말이 통하시는……!
-막내의 손에 죽기가 무섭다니 내 손으로 직접 보내 줘야겠구만.
-히이이익!
그때 허허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풀던 우마왕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을 정도였으니.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사타왕이라지만, 당시에 느꼈던 압박감은 사실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이나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 우마왕도 한때 혼자서 천교를 때려 부수고 다니던 ‘대마왕’이 아니던가.
그 성질머리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우들이 틀린 길을 걷거나, 말을 듣지 않는다 싶으면 얼마든지 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최초의 짐승이었고, 황이기도 한 존재.
절대 성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격을 동시에 달성한 괴물이다. 아군일 때는 든든하지만, 눈 밖에 났을 때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문제는 막내도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지만.
“뭐야? 벌써 기절한 거야? 하여간 이렇게 약해서 어따 쓰누?”
곧 교마왕이 축 늘어졌다. 입에 게거품이 잔뜩 물고 있었다.
손오공은 혀를 차며 교마왕을 한쪽에다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타왕은 시선이 마주칠까 싶어 황급히 눈을 감았다. 여기서 걸렸다간 정말 큰일이었다.
저벅.
저벅.
손오공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쭈그려 앉아서 이쪽을 관찰하는 기척까지 느껴졌다.
숨 막히는 긴장감. 사타왕의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넷째 형님, 안 일어나냐?”
“…….”
“깬 거 다 알거든? 일어나지?”
“…….”
살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
사타왕은 몇 번이나 움찔거리면서 벌떡 일어날 뻔한 걸 겨우겨우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눈이 마주쳤다간 정말 죽는다.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어쭈? 버틴다 이거지? 셋 헤아릴 때까지 일어나라. 안 그럼 이 막냇동생이 친히 머리통부터 부숴 준다. 하나, 둘, 셋.”
“…….”
“뭐야? 진짜 자는 거야?”
“…….”
“음! 그냥 기절한 거 때리는 건 별로 재미없는데.”
“…….”
사타왕은 손오공이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며 일어나는 소리에 속으로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렇게 그냥 버티자. 그러다 손오공의 화가 가라앉을 때 즈음 겨우 의식을 차린 척하는 거다.
사타왕은 그렇게 결심했다.
뒷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럼 이참에 발로 걷어차지 뭐.”
“…….”
“싸커킥? 그게 재미있어 보이던데. 어디까지 날아가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지?”
손오공이 가볍게 다리를 푸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 뭔가를 걷어차려는 기질이 느껴지자, 사타왕은 재빨리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났다.
“하. 하. 하. 이. 제. 일. 어. 났.”
사타왕이 어색하게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손오공은 이미 차갑게 웃으면서 그에게로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늦었어, 형님.”
빠아아악!
“꾸에에엑!”
사타왕은 곧 저 머나먼 하늘의 별이 되었다가 바닷속으로 퐁당 빠지고 말았다.
* * *
“그러니까 려의 조각을 찾으려면 내가 필요하다, 이 말이지?”
“그, 그래…….”
“크, 큰형님의 부르심이시다!”
“으음.”
우마왕이 직접 지시해서 데리러 왔다는 말에 손오공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깊은 고민에 잠겼다.
우마왕이 웬만해서는 의형제들에게 이렇다 할 터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런데도 직접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한편.
교마왕과 사타왕은 손오공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이를 달걀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막내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현 처지가 너무 울적하기만 했다.
‘진짜 천마는 굴레를 다시 굴리면서 저 인간을 왜 살린 거야!’
사타왕이 억울한 마음에 그렇게 속으로 소리치는데.
“음? 눈빛이 상당히 불만이 많은 거 같은데. 지금 천마 놈은 왜 쓸데없이 날 되살려 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신기라도 받았나!
“하, 하하!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나! 하하하! 나는 그렇게 표리 부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잘 알잖냐, 막내야!”
사타왕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아니라고 뚝 잡아뗐다.
손오공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런 그를 한참 노려보았지만, 사타왕은 여기서 빈틈을 보였다간 정말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모른 척 버렸다.
“딱 한 번만 걸려라, 아주. 그때는 허리를 두 동강 내 버릴 테니까.”
“…….”
“하여간 려의 조각을 찾는다고 했지? 거기에 천마의 얼굴이 있으면 좋다는 건 알겠는데…… 큰 형님은 갑자기 왜 그걸 찾으시려는 건데? ‘굴레’가 몇 번이나 굴러도, 자기 일에 방해만 안 되면 별 관심도 없던 양반이?”
손오공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사타왕은 교마왕을 돌아봤다. 우마왕이 했던 말을 같이 듣긴 들었는데, 자신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둘째 형님이 대신 이야기하라는 눈빛이었다.
교마왕은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손오공의 시선이 시선이라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해야만 했다.
“영지(靈智) 때문이다.”
“영지? 큰형님이 그걸 굳이 필요로 할 이유가 없……!”
손오공은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춰서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차고 말았다.
“지호 놈 때문이구만?”
교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천마는 쉬지 않고 ‘굴레’를 굴려 댄 통에 힘이 많이 닳고 말았으니까. 큰형님은 이대로 계속 두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그놈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정확하게는 막내, 너 때문이겠지. 천마와 너는 영혼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음.”
손오공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천마와 칠흑왕의 끝없는 싸움이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쯤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비록 ‘얼굴’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같이 묶여 있다고 해도, 명색이 영혼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가 아니던가.
천마가 갖고 있을 고심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족해진 영지를 쌓을 겸 해서 창공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마지막 도박이라는 생각으로 탑을 세운 것까지도.
그런데 우마왕은 아무래도 천마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 고블린 놈이랑 손을 잡으실 건 또 뭐야? 에휴.’
손오공은 천마의 얼굴이면서도 칠흑왕의 자아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떠올리면서 혀를 가볍게 찼다.
녀석의 소망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천마도, 칠흑왕에게서도 벗어난 세계. 이른바 피안(彼岸)의 탄생.
언젠가 자신과 천마가 바랐던 절지천통과 상당히 맥이 닿아 있긴 하지만, 좀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블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끝도 없이 달렸다. 매번 굴러가는 ‘굴레’ 속에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자 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찾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손오공은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같은 영혼을 공유한다고 해도, 성정까지 똑같은 건 아니었으니까.
‘분신’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목적과 정체성을 가지며 각개로 활동하는 것이 바로 천마의 얼굴들이었다.
“한번 고민해 보지.”
결국 손오공이 교마왕과 사타왕에게 내놓은 대답은 그러했다.
“너……!”
“하지만 큰형님은 막내, 너를 도우시려는……!”
“알겠으니 가 보라고.”
교마왕과 사타왕은 손오공이 눈꼬리를 살짝 치켜들자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지금까지는 반 장난으로 그들을 대했다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진심으로 나서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큰형님이 나랑 천마 놈을 돕겠다고 나서셨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려의 조각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거 잘 알잖아? 또 루시엘 때처럼 사고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
“…….”
루시엘.
그 단어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루만 고민하고 대답 줄 테니까 가.”
“…….”
“…….”
“가라니까? 아님 볼기짝이라도 걷어차 줄까? 그럼 잘 떠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아, 아니다. 갈게!”
“하, 하하하! 그, 그럼 대답 기다리고 있으마, 막내야!”
교마왕과 사타왕이 부리나케 도망을 치고.
손오공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다른 쪽으로 홱 하고 돌렸다.
“우리들 이야기는 이만하면 다 들은 것 같고. 너희들은 또 뭐냐?”
손오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이 열리면서 이랑진군과 연우가 차례로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절교 놈들이 큰형님한테 붙은 모양이던데. 그거 막아 달라고 찾아왔나?”
“비슷하다. 하지만 그보다 이쪽이 그대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 해서.”
“흠.”
이랑진군은 옆으로 슬쩍 물러나면서 연우를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격을 개방할 수 있도록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유희를 방해했다며 화풀이로 교마왕과 사타왕을 실컷 두들겨 패는 걸 보고 나니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정작 손오공은 그에게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연우에게 붙어 있었다.
화안금정.
팔괘로의 불길에서 얻었다던 두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블케 같은 놈인가?”
순간, 연우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손오공은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내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네? 칠흑이 묻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너, 오행산이라도 털었던 거냐?”
연우에게서는 미후왕 허물의 향취가 짙게 풍겼다.
연우가 교마왕과 사타왕의 방해를 받기 싫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미후왕의 허물이 해결책이라며 내놓은 방법이었다.
일부러 향취를 흘려 손오공에게 자신들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손오공이 하루 뒤에 대답을 주겠다며 교마왕과 사타왕을 내쫓은 것도 전부 그들을 파악했기 때문이었으니.
츠츠츠-
연우의 그림자가 위로 일어선다. 싶더니, 곧 모양을 다져 가면서 미후왕의 허물이 나타났다.
그런데 어쩐지 미후왕의 허물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랜만이군.』
“이야. 누군지는 몰라도 거 얼굴 한번 엄청 잘생겼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
『네 죽빵 한 대만 좀 갈기자.』
미후왕의 허물은 진심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처음에 했던 말대로 자신이 열심히 수렴동에서 임무를 다하고 있는 동안, 손오공은 실컷 놀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뿔이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손오공은 히죽 웃기만 했다.
“해 봐.”
『뭐?』
“갈길 수 있으면 갈기라고.”
『…….』
빠득!
미후왕의 허물은 이를 세게 갈았다. 본체 놈이 저렇게 나올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식!
미후왕의 허물은 비웃음을 던지더니 연우를 돌아봤다.
『그거 말했나? 우리가 나눴던 약속은 본체에게도 해당된다는 거? 탑에서 나는 ‘미후왕’이라는 존재 자체를 대표하고 있었거든. 그게 조건이었고.』
“그렇습니까?”
그에 연우가 국어책 읽듯이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린 손오공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빠가 왔는데 냉큼 인사하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