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손오공 (4)
손오공 앞에 직접 등장하기 직전.
미후왕의 허물이 연우에게만 밝힌 비밀이 있었다.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냐? 날 강제로 동굴에다 가둬 두려 하는데 왜 내가 가만히 있었느냐 하는.
-그러고 보니 의심해 본 적이 없었군요. 분명히 따져 보면 이상한데……. 미후왕의 인성으로 순순히 남아 있기로 한 게 이상한 일이니 말입니다.
-내 인성이 뭐 어때서, 새꺄?
-몰라서 묻습니까?
연우의 물음에 미후왕의 허물은 주먹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아오! 이제 대가리 좀 굵어졌다고……!
성격 같으면 일단 한 대 후려치고 생각해 보겠지만.
문제는 이제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연우의 격은 이제 그로서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괜히 버릇을 고치겠답시고 달려들었다간, 자신만 손해였다.
-대가리는 원래 굵었습니다. 그보다 이제 계속 미루던 약속이나 지키시는 게 어떠십니까?
-……뭘?
-아들.
연우는 손으로 미후왕의 허물을 가리키고.
-아빠.
자신을 가리키면서는 그렇게 말했다.
미후왕의 허물은 단박에 짜증이 섞인 얼굴이 되었지만,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한참 전에 했던 내기로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발목을 잡혀야 하는 건지.
웬만하면 이제는 잊을 때도 되지 않았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연우의 솜씨가 참 대단하다 싶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오히려 그런 연우의 성격이 더 도움이 될 듯했다.
-그거다.
-……?
-내가 너한테 본체에게 시키라 할 거.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수렴동에 남았을 때, 본체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오행산을 지키고, 자신을 찾아오는 수련자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 주라는 내용이었지.
손오공이 올바른 길?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미후왕의 허물이 말하는 투가 자못 진지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뭐라더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나? 하여간 딱 봐도 귀찮아서 나한테 일을 떠넘기는 걸로 보이기에 한 가지를 요구했었지.
-무엇을요?
-만약 ‘일’이 터질 경우, 미후왕이라는 존재를…… 필마온이었고, 제천대성이었으며, 투전승불이었던 존재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이다.
-본체는 웬만한 신격조차 만들기 어려운 신화를 수도 없이 많이 쌓았다. 각각의 신화에는 여러 이름들이 붙으며, 거기에 따라 본체의 성격이나 성향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지. 나는 그중에서 ‘미후왕(彌猴王)’이라는 신화만을 뚝 떼어다 빚은 허물이다.
-나는 그런 나의 존재가 본체를 이루는 수많은 신화들의 ‘대표’로 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거다. 워낙에 여러 일들이 터지는 탑이다 보니 언제 나에게 까지 영향이 끼치게 될지 알 수 없었거든.
-그리고 네놈을 만나게 된 거고.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손오공과 미후왕의 허물 간에 이뤄졌던 계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당신과 맺은 모든 약속이며 계약이 본체에게도 해당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래.
-그럼 지키셔야죠, 약속? 언제 지킬 겁니까?
-…….
* * *
연우와 미후왕의 허물 간에 이뤄졌던 대화를 모르는 손오공으로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난데없이 아버지라니!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뭔 개수작을……!”
물론, 연우는 여전히 태연했다.
“개수작이 아닙니다. 진짜지.”
“뭐?”
“화안금정,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걸로 확인을 해 보시죠.”
손오공은 화안금정에다 신력을 잔뜩 불어넣어 연우의 진실 여부를 가렸고, 곧 한 가지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진(眞). 진실이라고.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손오공은 한껏 구겨진 얼굴로 미후왕의 허물을 노려보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기에 이딴 일이 벌어지는 건지!
물론, 미후왕의 허물은 어쩌겠느냐며 그냥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냥 손오공이 여유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연우가 말했다.
“아무튼 아들아, 아버지가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이런 미친놈이!”
손오공은 당장에라도 공세를 퍼부을 태세였다. 그를 따라 신력이 살벌한 기세를 피며 폭발할 듯이 이글거렸다.
여전히 연우는 뻔뻔했지만.
“제천대성씩이나 되는 분이 한 번 입에 올린 말을 거두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건 저놈이……!”
“어쨌거나 대표한다. 하지 않습니까?”
“……좋다. 계속 그렇게 주장하겠다면 받아 주지.”
“……?”
연우 등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존심 강한 손오공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받아 준다고?
하지만 손오공은 어디 나사라도 빠진 사람처럼 ‘흐흐!’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대신에 내가 뿌린 거니 내가 거둬 주지. 어차피 때려죽이고 나면 빌어먹을 ‘아버지’도 같이 사라지는 거잖아?”
억지를 받아 줄 바에는 그냥 힘으로 없애 버리겠다는 선언에 연우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싸워서는 될 것도 안 된다.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게 맞다 싶어 뒤로 슬쩍 한 걸음 물러섰다.
“물론, 저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그게 본 목적이었구만. 뭔데?”
손오공은 여전히 신력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연우는 손오공이 교마왕과 사타왕을 상대하면서 쑥대밭이 된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여기는 너무 소란스럽고, 다른 곳으로 가셔서 이야기 나누시죠.”
* * *
연우와 손오공 등은 해운대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진 서면 쪽에 있는 어느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해운대는 이미 던전 브레이크가 벌어진 게 아니냐며 소란스러워진 상태. 협회의 플레이어들 중 상당수도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플레이어 시스템 가동이 전면 중단되었다고 해도, 이미 주어졌던 능력들까지 전부 거둬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예정되어 있던 대형 페스티벌도 취소되었다고 했다. 그들 중에 그런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손오공은 빨대를 들고 자신 앞에 나온 캐러멜 마키아토를 신경질적으로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연우를 잔뜩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기세를 은연중에 흘리면서 아무도 자신들을 인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 동주칠마왕의 목적을 가르쳐 달라?”
“예. 이왕이면 이블케와의 동맹을 결렬시킬 수 있는 방법도 같이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손오공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다.
“허! 이놈 보게. 처음 보는 자리에서 보따리부터 내놓으라는 거잖아?”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건지.
『너무 정확하게 보는데? 역시 본체. 눈썰미가 어디 가는 건 아니로군. 확실히 이놈의 낯짝이 아주 두껍긴 하지.』
미후왕의 허물이 중간에서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오공의 의견에 동의했다.
연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좋아. 그 방법을 말해 준다 치고. 그럼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손오공은 빨대를 놓으면서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나는 지금 생활에 아주 만족해하며 지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걸 깨고 너를 돕는다는 건 아주 밑지는 장사잖아? 내가 널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
“반면에 형제들은 하는 짓이 영 멍청해 보이긴 해도…… 아니, 실제로 멍청하긴 해도, 하나같이 나를 돕겠다는 내용들뿐이야. 그런 그들이 하려는 일을 훼방 놓고 너를 도우라는 건, 아무리 봐도 헛소리로 보이지 않나?”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손오공은 미후왕의 허물과 자신은 별개라고 딱 잘라 말했다.
분명히 자신에게서 일부를 떼어다 만든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각자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지고 산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정체성이 동일할 수 있겠냐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연우도 그것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후왕의 허물도 이제 와서 굳이 본체로 귀의할 마음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연우도 손오공에게 허물과 있었던 인연을 강조할 생각 따윈 없었다. 지금은 그저 그를 설득하고 마음을 사는 게 전부였다.
“지금 생활을 만족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아닙니까?”
손오공의 두 눈이 더더욱 가늘게 좁혀졌다.
“오히려 불만이 많아 보이십니다만.”
“헛소……!”
“제가 접했던 여러 ‘꿈’에서 당신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손오공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거기서 당신은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셨죠. ‘젠장. 또 실패인가.’”
“……!”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했었는데. 이제 보니 알 것 같습니다.”
“…….”
“손오공, 당신은 창공 도서관에 유폐되다시피 한 천마를 구하고 싶은 게 아닙니까?”
“……이 빌어먹을 놈이!”
손오공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를 주변으로 강렬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연우는 그것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에 천마가 창공 도서관에 있는 게…… 그동안 잠들어 있다고 알려진 게…… 원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그도 여기에 와서 손오공이 교마왕, 사타왕과 나눈 대화를 들어 보지 않았다면 여태 추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마는 부족한 영지를 채우기 위해 창공 도서관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수없이 ‘굴레’를 굴리고 ‘꿈’을 다시 깨우면서 생긴 결과일 터. 그리고 창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세계에 관여를 하지 않고 창공 도서관에 처박혀 힘을 비축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손오공은 매번 그런 천마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것으로 보였다.
다른 자아들을 상대하면서 엿보았던 수많은 ‘꿈’ 속에서. 손오공은 항상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꿈’이 저물 때면…… 항상 하늘을 보며 뭐라고 오열을 내뱉었다. 분기에 찬 얼굴로 다음에는 꼭 성공하고 말겠노라고 다짐하던 적도 있었다.
‘천마가 처음으로 ‘황(皇)’으로 각성하면서 우주 창생을 이룰 때, 손오공의 희생이 있었다고 했었지. 그 뒤에 천마가 ‘굴레’를 굴리기 시작하면서 그를 되살려 냈고. 손오공은…… 그 뒤로 계속 억겁의 시간을 고생하던 천마를 구하려 애썼던 거였어.’
천마의 얼굴들은 같은 영혼을 공유하면서도, 각각 별개의 인격과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다.
칠흑왕의 자아가 되어 활동 중인 이블케가 대표적인 예고, 손오공도 마찬가지. 그는 매번 천마를 구제하고자 애썼다.
‘라푼젤도 아니고, 무슨…….’
어쩐지 연우는 천마가 고고한 탑에 홀로 갇힌 라푼젤, 손오공이 그를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왕자처럼 보였다.
물론, 정작 두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간 미쳤냐면서 길길이 날뛰겠지만.
‘아마 수렴동에다 허물을 남기고 갔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겠지.’
탑은 천마가 칠흑왕을 누르기 위해 만든 구속구.
그곳 어딘가에 손오공이 남아 있다면 인연이 되어 찾아오는 플레이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면, 탑의 무게는 더더욱 커지게 된다.
하지만 정작 손오공은 천마를 도와줄 방법을 찾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그를 대체할 만한 다른 무언가를 놔둘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미후왕의 허물.
‘미후왕이라는 신화는 성장하는 손오공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실제로 그 덕분에 나도 톡톡히 효과를 보기도 했었고.’
연우는 미후왕의 허물 덕분에 제천류를 익혔고, 검뢰팔극을 깨달아 여기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이를테면, 미후왕의 허물은 그에게 있어 무왕만큼이나 소중한 스승인 셈이었다.
“함께하자는 교마왕과 사타왕의 제안을 바로 승낙하지 못하신 것도 전부 천마에게 득이 될지 안 될지 계산이 안 서 그러신 것 아닙니까?”
“…….”
손오공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연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니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네놈이, 어떻게?”
“천마가 창공 도서관에 갇히다시피 한 건, 칠흑왕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칠흑왕이 다시는 눈을 뜨지 않도록.”
연우의 두 눈이 손오공처럼 화안금정으로 요요히 빛났다.
“제가 만들겠습니다.”
순간, 손오공의 눈이 크게 커졌다. 온갖 감정이 두 눈가를 스치다가 곧 깊게 착 가라앉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형제나 가족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