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려의 조각 (1)
“어떻…… 게?”
미카엘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길쭉한 칼날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물론, 그쯤 되는 존재면 심장이 뚫리거나 머리가 달아나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신력이며 그들을 지탱하는 신화와 신성이니까.
하물며 미카엘은 본래 품고 있는 신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이까짓 상처쯤은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었고, 영혼석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코웃음을 칠 정도의 찰과상에 불과할 터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도무지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칼날이 관통한 것은 단순히 그의 몸뚱이가 아닌 신령(神靈), 그 자체였으며.
미카엘이라는 존재를 성립게 하는 신화를 묶고 있는 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것은 스퀴테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과거에 이뤘던 신왕의 급을 넘어섰다는 크로노스의 본체.
그 때문에 미카엘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스퀴테를 보다가, 그 끝을 무심한 얼굴로 잡고 있는 정우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정우는 이예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주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의 상황이었건만.
대체 어느 틈에 이쪽으로 온 거지?
‘분명히……!’
분명히 이예가 뒤로 몸을 빼려 했고, 정우가 그쪽으로 빛의 파도를 터뜨리려 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빛의 파도는 이예가 아니라 별안간 미카엘 쪽으로 향했으니.
미카엘은 그것을 부랴부랴 막아내긴 했지만, 어느새 사각지대를 파고든 스퀴테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뒤통수치려는 새끼야. 내가 어렸을 때 워낙에 많이 당했거든.”
하지만 정우는 미카엘이 보내는 그런 의문에 찬 시선이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만 낄 따름이었다.
그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미카엘이 뒤에서 승냥이처럼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두 사람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거나, 어느 한 명이 빈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정우도 이예도 그런 것을 절대 바라지 않았으니.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날파리 같은 미카엘을 먼저 처치하고 나서 승부를 내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리고 기회를 노렸고, 정확하게 타이밍을 잡으면서 미카엘의 신령에다 칼을 박을 수 있었으니.
[스퀴테의 저주가 이식됩니다!]
[‘죽음: 동사’가 진행됩니다.]
[‘죽음: 갈사’가 진행됩니다.]
[‘죽음: 아사’가 진행됩니다.]
……
연우가 죽음이라는 개념이 형상화된 존재라지만,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신과 악마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바로 크로노스, 그였으니.
미카엘에게 죽음의 개념을 이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빌어먹을 어머니였지만, 이런 식으로 아주 작은 도움이 되어 주시기도 하는군.』
이런 개념 이식 방식은 크로노스가 ‘가이아의 저주’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기도 하니. 뜻하지 않게 그녀로부터 아주 작게나마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더군다나.
[‘낮(에로스)’의 태양이 상대에게 하사하였던 빛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신성이 부정됩니다!]
“아, 안……!”
미카엘은 뒤늦게 정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그를 황급히 떨쳐 내려 했지만.
쩌거거걱!
미카엘의 몸뚱이 위로 균열이 퍼져 나갔다.
애당초 말라흐에 내려진 신성은 ‘밤’에 대항하고자 만들어진 ‘낮’의 유지에 근간을 둔 것.
하지만 정우가 ‘낮’의 주인이 되고, 고대신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면서 그들에게 내려진 신성을 거두는 자격도 그의 몫이 되었다.
미카엘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배신을 하였을 때에 정우를 죽이는 것에 가장 우선을 두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타인이 쥐고 있는데 누가 좋아하겠나.
그래도 다행히 영혼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상처만 입지 않는다면 신성은 얼마든지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여겼었건만.
스퀴테에 의해 신화가 붕괴되기 시작한 이상, 신성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미카엘의 신성이 빠른 속도로 스퀴테의 검체를 타고 정우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미카엘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균열은 삽시간에 얼굴 전체를 뒤덮고 말았으니.
퍼석!
파아아아-
미카엘이 그대로 부서지면서 정우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미카엘은 뭐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리고 그만큼 정우의 배광은 더더욱 화려하게 빛났으니.
식령(食靈)이 끝난 뒤, 정우의 두 눈은 더 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순간.
쐐애애액!
한 줄기 강풍이 휘몰아친다 싶더니 미카엘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채채챙!
정우는 식령이 가져다주는 여운과 고양감을 느낄 새도 없이 스퀴테를 거칠게 휘둘러 강풍을 튕겨 냈다.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주선석, 절제의 돌이 들려 있었다. 미카엘이 사라지고 떨어지던 것을 낚아챈 것이다.
“……이런! 실패했나.”
한편, 강풍은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갖췄으니. 이예는 절제의 돌을 보면서 낭패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군림보에 의해 운신의 폭이 너무 좁은 지금, 유일하게 정우를 떨쳐 낼 수 있는 방법은 절제의 돌을 사용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여겼건만.
정우는 절대 그가 어부지리를 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리어 절제의 돌을 재빨리 자신의 입 안으로 밀어 넣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화아아아!
[주선석(절제)을 삼켰습니다!]
[‘낮(에로스)’의 태양과 주선석(절제) 간에 공명(共鳴)이 이뤄집니다!]
문제는 주선석의 성질이 정우와 두말할 나위 없이 잘 맞는다는 점이었다.
크로노스와의 합일에 미카엘을 식령하고, 절제의 돌까지 얻은 지금. 정우의 신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웬만한 신격도 휘둘릴 수밖에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이었지만,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것을 전부 수용하고 있었다.
파아앗!
스걱-
정우는 신력을 전부 스퀴테의 칼끝으로 끌어모아 위로 쳐올렸다. 아래에서 위로, 한 줄기 섬광이 땅과 하늘을 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군림보에 또 발목이 묶인 이예가 있었다. 왼팔이 잘려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궁수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한쪽 팔을 잃은 것이다.
정우는 그것으로 그칠 생각 따윈 없다는 듯, 군림보를 더 크게 밟으면서 이예의 머리 위로 스퀴테를 거세게 내리쳤다.
* * *
“일단 네가 할 일은 영혼석을 전부 모으는 거다.”
손오공은 연우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리다가, 그가 어느 정도 정신을 다잡았다 싶자 천천히 그런 말을 꺼냈다.
연우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영혼석이라면, 루시엘의 영혼 조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다. 너도 일부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14개의 영혼석 중에서 오만, 식욕, 색욕의 돌을 이미 품고 있었고, 그 외에 체질에 맞지 않아 따로 갖고 있는 순결의 돌까지 합친다면 총 4개를 갖고 있었으니까.
모든 신과 악마들을 통틀어 가장 많이 갖고 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 루시엘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등대지기였다가 태초의 불을 욕심내면서 천계의 공적이 되었고, 영혼이 부서지면서 14개의 조각을 남겼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전부 다른 신과 악마들로부터 어렴풋이 들은 것이 전부였다.
애당초 큰 관심도 없었고.
그런데 그것을 거론했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루시엘은 원래 등대지기였다. 등대지기가 뭔지는 아냐?”
“태초의 불을 지키던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태초의 불은?”
“우주 창생의 기원으로 알고 있고요.”
“우주 창생은 누가 이뤘지?”
“천마……?”
“그래. 천마가 이 세계에 남긴 잔재, 그것이 태초의 불이다. 그리고.”
손오공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달리 이렇게 부른다.”
“……?”
“려의 조각.”
“……!”
“지금 이블케와 우마왕 큰형이 찾고자 하는 바로 그 물건이지.”
연우는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손오공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려의 조각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그냥 차치하고. 본론부터 말하자면, 영혼석은 루시엘의 영혼이기 이전에 려의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나? 대체 영혼석이 무엇이기에 하나만 쥐고 있어도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한낱 피조물조차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신격조차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천마는 그렇게 물었다.
사실 그것은 연우가 항상 품고 있었지만 풀지 못했던 의문이기도 했다.
손오공은 그 이유에 대해서 그만큼 려의 조각에는 아주 큰 가능성이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마의 기원(起源)이 묻어 있는데, 그럼 엄청 대단한 물건이지. 루시엘은 그것을 계속 옆에 두고 있다 보니 결국 눈이 멀고 말았고, 그런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신과 악마들은 처음 려의 조각을 찾았을 때. 이것을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소지한다면, 혹은 어느 사회가 홀로 보유한다면 큰 사달이 벌어질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회 간에 협정을 맺었다. 아무도 려의 조각에 손을 대지 않기로. 만약 협정을 깨는 존재가 있다면 모든 사회가 힘을 합쳐 그를 몰락시키기로.
그리고 항상 절대선을 기치로 내세우는 말라흐에게 려의 조각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니.
이때 등대지기로 선택된 것이 바로 루시엘이었다.
당시 루시엘은 메타트론의 오른팔이라고 불릴 정도로, 차기 서기장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재능과 성품을 보유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다른 사회들도 모두 루시엘이라면 믿고 맡길 만하다고 판단하였지. 그만큼 그가 그동안 보였던 모습은 메타트론보다도 더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손오공은 비웃음을 던졌다.
“하지만 아주 강한 힘은 아무리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진 존재라 하여도 홀리고야 마는 요물(妖物)에 가깝다. 루시엘도 그렇게 려의 조각에다 손을 대고 말았지.”
“…….”
“네가 당장 할 일은 아주 간단해. 모든 영혼석을 한 자리에 모으고, 거기서 려의 조각을 골라내. 그것만 있어도 네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아주 넓어지니까.”
“정확하게 어떻게 넓어진다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손오공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내가 꼭 다 떠먹여 줘야 하냐? 꼭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해? 힌트. 허물.”
“아.”
연우는 그제야 손오공의 노림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오공은 천마의 얼굴이니. 려의 조각을 품게 된다면 아주 큰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한낱 루시엘조차도 천계를 위협할 정도로 강해졌는데, 천마의 얼굴이라면 오죽할까?
그리고 연우는 손오공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미후왕의 허물을 품고 있으니. 려의 조각을 갖게 된다면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천마에 대한’ 가능성을 품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이블케는 나와 같은 얼굴이기도 하면서 칠흑왕의 자아로도 활동했던 미친놈이었지? 그런데 너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잖아?”
손오공의 입술이 익살맞게 휘어졌다.
“그리고 조각은 조각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니. 이블케와 우마왕 형님이 조각을 찾아도 네가 도중에 가로채기도 쉬워지겠지.”
하지만 연우는 손오공의 노림수가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이블케는 려의 조각을 가지고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세계, ‘피안’을 만들 거라고 했다. 그것은 그만큼 려의 조각이 품고 있는 힘이 대단하다는 뜻. 그렇다면 연우에게는 여태껏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지도 몰랐다.
‘꿈’이 무너지지 않으며 연우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
손오공이 살아남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던 방법이 바로 려의 조각에 있을 것이다. 연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끝난 즉시, 연우는 곧장 움직였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이 세계는 칠흑왕의 ‘꿈’이니. 그의 대체 자아가 된 연우의 의식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만히 의식을 집중시키고, 의념을 투영해 ‘꿈’ 전체를 관조(觀照)하고자 했다.
이 ‘꿈’ 곳곳에 흩어져 숨어 있을 영혼석을 찾기 위해서.
분명히 탑이 붕괴되면서 각지로 흩어졌을 게 분명했다.
[영혼석을 검색합니다.]
[검색 중.]
[검색 중.]
그렇게 한참을 뒤지다가.
[죄악석(나태)을 발견하였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연우는 곧바로 축지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