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려의 조각 (2)
그때부터.
연우는 세계와 행성 각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임자!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거 아니지? 이거 진짜 비 맞지?”
“비다! 비가 내린다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비가 내리니 기근이 해소되고 저수지에 다시 물이 차오르겠구나! 다시 황금빛 들판이 보이겠구나!”
“신이! 신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셨도다!”
영혼석은 가지각색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그냥 지하 암층 지대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성 자체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대기의 순환을 어그러뜨리고, 지층 전체에 악한 기운을 심어 농작물이 자라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곳은 십 년이 넘도록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 비가 내리지 않고, 항상 뜨거운 뙤약볕만이 내리쬈다.
그 덕분에 많은 동식물들이 기근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 인간들은 초근목피로 생명을 겨우 이어 나가다, 그걸로도 부족해지자 상대를 잡아먹고 먹히는 등 끔찍한 광경까지 벌어졌다.
푸르렀던 하늘은 전부 사라지고 메마른 사막만 남은 세상.
하지만 연우가 그런 영혼석을 거둬들인 순간, 행성은 지난 상처를 전부 씻어 내려는 듯 비를 억 수로 퍼부어 댔다. 십여 년 동안 미루고 미뤄 뒀던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동물들은 저마다 동굴에서 뛰쳐 나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고, 메마른 땅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씨앗들은 발아를 시작했다.
인간들은 전부 하나같이 눈물을 펑펑 터뜨리면서 신의 위대함을 노래했다.
그런 신성들이, 전부 연우에게로 모여들었다.
“눈보라가 그쳤다! 불! 불을 어서 가져와!”
“……드디어 저 지옥 같던 해일이 끝났구나.”
“생존자는? 생존자는 없나?”
“신이 우리의 부름에 대답을 하신 것인가?”
그 외에도 문명이 제대로 태동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빙하기가 해제되고, 쉴 새 없이 풍랑이 휘몰아치던 바다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괴물이…… 또 괴물이 인신 공양을 바란다고?”
“말도 안 돼! 대체 언제까지 마을의 처자들을 갖다 바쳐야 하는 거야!”
“오, 신이시여. 부디 우리를 구원하소서.”
“내 딸, 내 딸…… 불쌍해서 대체 어찌하니!”
“이, 이보오! 괴물이, 지금 밖에 괴물이!”
“왜 그러나?”
“그 끔찍한 괴물이 죽었소!”
“뭣이?”
“아아! 역시 신은 계셨구나!”
어떤 곳에서는 야생동물이 우연찮게 그것을 먹어 끔찍한 괴물이 되어 있기도 했다.
어설프게 쌓은 영성을 바탕으로, 인간을 직접 잡아먹으면서 부족한 신성을 채우려던 녀석들은 각 문명과 행성의 발전을 저해하던 끔찍한 존재들이었으니.
그들이 퇴치되고 난 뒤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욕구와 야망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태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의 신앙은 갑작스레 나타나 말없이 그들을 구원해 주고 떠난, 어느 이름 모를 신인(神人)에게로 향했다.
“아아,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물론, 연우가 영혼석이 있을 거라고 예상해서 도착한 장소에 영혼석이 없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심상찮게 여겨 그것을 회수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 영혼석의 악영향이 그대로 작용한 곳들이었다.
하지만 연우가 지나친 장소들은 하나같이 연우에 대한 환호와 칭송으로 가득했다.
물론, 그런 것들은 현재 연우가 받고 있는 신앙에 비하면 아주 자그마할 뿐이었다.
그는 탑을 부순 자였으며, 올림포스의 주신이었고, 칠흑왕의 대체 자아였으니까.
이미 그를 인식하고 있는 초월자들로부터 받는 신앙만 해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올림포스와 타계의 신들이 열렬하게 보내는 신앙은 모든 피조물들의 신앙을 끌어모아도 닿지 않을 만큼 방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이상하게 오히려 그런 것이 좋았다.
여태껏 자신이 느꼈던 것과는 아주 상반된, 신선한 성질의 신앙이었으니까.
* * *
[이곳은 행성, ‘데스투루도’입니다.]
연우는 행성에서 가장 높이 서 있는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지표면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시커멓게 칠해진 하늘과 붉게 물든 대지. 그 위로 수많은 인간들이 터덜터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끔찍한 몬스터, 언데드였다.
탑에서는 수도 없이 봤던 몬스터였고, 그만큼 퇴치법이나 싸움 방식에 대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선까지라야 가능한 것이었지, 개체 수가 일정 수를 넘어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는 법이었다.
언데드는 너무나 손쉽게 감염이 이뤄진다. 그래서 전파가 빠르고, 자연을 쉽게 부식시킨다. 언데드가 크게 창궐하기 시작하면, 일대는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을 만큼 엉망이 되기 십상이다.
데스투루도가 바로 그러했다.
온통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행성이었지만.
연우는 그곳에 있는 것이 오히려 끔찍하게 느껴졌다.
‘질이 떨어져.’
연우가 아무리 죽음의 개념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그로서는 오히려 불쾌하기만 한 장소였기 때문에 빨리 청소를 해 버릴 속셈이었다.
손가락으로 지표면 어느 한가운데를 가리킨 채 가볍게 튕긴 순간.
콰르르릉-
스파크가 터진다 싶더니, 거친 폭발이 단숨에 행성 표면 전체로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신기한 것은 거친 폭발이 후폭풍과 열기를 동반하면서도, 죽음이 이식된 지표면만 쓸어버린다는 점이었다.
키아아악!
쿠에에엑!
언데드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사망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열풍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불이 붙은 괴로움에 몸부림칠 시간도 없는 빠른 소멸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언데드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고?”
“신벌! 신벌이 내렸다!”
연우는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시피 한 희망에 찬 목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언데드가 휩쓸린 자리 한복판에서부터 무언가가 쏙 뽑히더니 연우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영혼석(분노)을 획득하였습니다!]
[영혼석(오만·식욕·색욕·나태·질투)가 영혼석(분노)와 강하게 반응합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영혼석(분노)을 강제로 집어삼키고자 합니다!]
[영혼석(분노)이 강하게 저항합니다.]
[영혼석(오만·식욕·색욕·나태·질투)이 영혼석(분노)의 저항을 분쇄합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흡수를 시도합니다.]
……
[영혼석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죄악석 6개가 모였습니다.]
[남은 죄악석을 흡수할 경우, 완전한 죄악석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현자의 돌’이 보다 완전해졌습니다.]
연우의 가슴팍에 자리 잡은 현자의 돌이 크게 공명하면서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영혼석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생긴 반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만의 돌이나 식욕의 돌을 얻었을 때처럼 엄청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영혼석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 봤자, 바다에 강물을 끼얹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연우는 죄악석이 완전한 모습을 갖춰 감에 따라 손오공이 말했던 ‘려의 조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영혼석을 이루고 있던 기운. 그 속에 아주 옅게 남아 있는 흔적들이 바로 려의 조각이었다. 아무리 연우라고 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작은 흔적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영혼석이 하나둘 모일수록 원래의 형태를 되찾아 갔다. 현자의 돌 중앙에 단단한 조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연우는 이것이 완전한 모습을 갖췄을 때 어떤 형상이 될지 상당히 궁금했다.
‘신앙과도 잘 감응하고 있고. 이건 좀 신기한데.’
애당초 려의 조각이 ‘황’에서부터 비롯되어서 그런 것일까.
연우가 행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새롭게 수확한 신앙은 바로 려의 조각과 연결되고 있는 중이었다.
투쟁과 죽음 같은 부정적인 성질의 신앙만 받다가 이렇게 희망과 환호로 가득한 긍정적인 성질의 신앙을 받으니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나쁘냐고 한다면, 또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신기하다고 할까?
“신앙이란 마약이지.”
그러던 그때, 이랑진군이 연우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는 연우가 영혼석을 모으는 내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신이든, 악마든, 초월자가 되면 맛이 가는 사람이 적잖게 있지. 그만큼 신앙이 주는 힘이란 아주 달콤하니까. 그 크기는 절대 중요한 게 아니야. 오히려 기존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신앙을 얻었을 때가 더 위험하지.”
이랑진군은 마치 거기에 휘둘리지 말라는 듯 말하는 것 같았다. 격을 두고 본다면 연우가 더 높을지 모르지만, 신으로서 보낸 시간을 따진다면 그가 훨씬 위에 있었으니까.
연우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성질의 신앙은 처음이었으니, 아주 잠깐이지만 홀렸던 게 사실이었다.
만약 갓 탈각을 했을 때에 이런 신앙을 느꼈더라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기존에 얻지 못했던 신앙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만큼 다양한 발전을 이룰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화나 신위, 그리고 신성 따위는 전부 신앙에 기반을 둔다.
얼마나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고, 그들이 얼마나 커다란 지지를 보내는지에 따라 신앙의 크기가 정해지는 것과 동시에.
그런 신도들이 알고 있는 신화의 종류가 무엇인지에 따라, 신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종류도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이랑진군의 경우, 인간들은 그를 치수(治水)의 신으로 여긴다.
문명의 태동기에 인간들은 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만큼 수해에 있어 아주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치수는 중요한 숙제였고, 치수를 이뤘다는 신화를 가진 이랑진군에게 자연히 열렬한 기원과 신앙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연우가 이룬 신화도 하나같이 투쟁과 죽음에 관련된 것들이었으니, 신앙도 전부 그런 종류였다. 특히 ‘신도 죽이는’ 신화는 더 큰 충격을 주고 있으니 그쪽으로 더 많은 신앙이 쏠렸다.
하지만 지금 받는 신앙들은 전혀 다르다.
희망과 구원. 그것들은 연우의 신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집행자이자 칠흑왕의 자아로서는 도저히 쌓기 힘들 것이 분명한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을 잘 활용한다면 지금 그를 속박하고 있는 칠흑왕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초월이라.’
연우는 이만큼 격을 쌓고도 아직까지 이루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셈인가.’
마음 한편에 그런 생각을 담아 두고서.
* * *
[이곳은 ‘시리우스 항성계(恒星系)’입니다.]
연우는 어느 행성에 도착한 순간.
갑자기 뜻하지 않은 메시지를 만나고 말았다.
[대적자(對敵者)가 완전한 각성을 이뤘습니다!]
[종말의 집행을 막기 위해 대적자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정지되었던 아마겟돈이 다시 시작됩니다.]
“……!”
연우의 망막 한편에 떠오르는 메시지.
그리고.
휘휘휘!
[죽음의 군단이 복귀합니다!]
[‘밤(녹스)’이 귀환합니다!]
정우를 막으라면서 두고 왔던 디스 플루토와 타계의 신이 일제히 그의 그림자 쪽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