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려의 조각 (3)
이예의 팔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수많은 빛의 입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정우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방금 전까지 이예가 있던 자리를 봐야만 했다.
휘이이-
[이예가 로그아웃에 성공하였습니다.]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
정우는 재빨리 특성과 감각을 최대로 끌어 올려 이예가 어디로 도망쳤는지를 쫓으려 했지만, 녀석의 신력은 아무런 좌표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마치 세계 밖, 공허 속으로 숨어 버린 것 같은 듯한 느낌.
‘금선탈각…….’
매미가 껍질을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간다는 말처럼, 이예가 자신의 한쪽 팔을 제물로 삼아 달아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력을 일부 남겨 두는 것으로 흔적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것일 테지.
“……제길.”
때문에 정우는 인상을 팍 찡그려야만 했다. 브라함의 원한도 원한이거니와, 이블케의 정확한 목적도 알아내야 하건만. 상황이 이래서야 아무런 득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녀석의 팔이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것이었으니.
[스킬, ‘용마안’이 해당 대상에 대한 리딩을 실시합니다.]
[해독이 이뤄집니다.]
[해독이 이뤄집니다.]
……
[해당 대상이 갖고 있던 정보량 중 32%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예의 팔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정우는 신력에 새겨져 있던 데이터, 즉, 신화의 일부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으니.
그 덕분에.
정우는 이예의 시선에서 이블케를 보고 있던 사념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화아악!
-네가…… 뭐? 천마의 얼굴이라고? 하! 우습군. 칠흑의 냄새가 풀풀 날리는 놈이 그놈이라고? 날 놀리려는 거라면 그냥 꺼져.
-오효효! 무슨 생각이신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월궁의 주인인 당신이라면 제가 품은 ‘빛’이 보일 텐데요?
-무슨…… 뭐지? 대체 넌 뭘 하는 놈인 거냐?
-제가 가진 비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께 제안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지?
-천마, 깨우고 싶지 않습니까?
-……!
천마는 ‘굴레’를 굴리고 난 뒤에는 항상 창공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세상을 굽어다 본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가만히 관찰하기만 하며, 이따금 신과 악마들이 피조물 들에게 정도 이상으로 개입하려 할 때만 나서서 그들을 제지한다.
이예는 항상 못내 그것이 불만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굴레’가 이렇게 계속 헛돌기만 하지는 않을 텐데.
이예는 천마와 칠흑왕의 계속되는 싸움이, 실은 천마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데서 생긴 참극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신(絶對神).
그러한 존재가 되어 칠흑왕을 완전히 꺾는다면.
세계의 법칙을 자신의 빛으로 전부 물들인다면 모두 끝날 것을, 왜 자꾸 천마는 헛된 노력만 하고 있는가.
물론, 이예도 천마가 왜 그러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절지천통. 땅과 하늘의 연결을 자르고, 피조물들로 하여금 신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완전한 자유를 주게 하는 것이 원래 그가 항상 가지고 있던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사실 이예는 천마를 따르면서도, 내심 속으로는 그런 천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옥황상제 같은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 절대신이 되는 것이 사달을 일으킬 뿐이지,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춘 자가 절대신이 되어 권선징악(勸善懲惡)만 올바르게 집행할 수 있다면 그보다 완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어디 있을까 싶었으니까.
이예는 천마가 바로 그런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방향으로 그를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든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마는 번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칠흑왕과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언젠가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거라며 낙천적으로 웃곤 했다.
그것이 스스로 손발을 강제로 묶는 짓인 줄 잘 알면서도.
언젠가 ‘굴레’가 멈추고, ‘꿈’이 끝날 거라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예는 그런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천마를 강제로 깨워야겠다고.
자신이 움직여서, 저 높은 탑 꼭대기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천마가 제 발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흔들어 놔야겠다고.
이예가 시의 바다에 몸을 담근 채, 이블케를 돕게 된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블케를 돕다 보면, 천마는 저절로 해방되거나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는 아직 회수되지 않은 려의 조각을 모을 예정입니다.
-려의 조각을?
-예.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저는 빛과 어둠, 두 개의 가능성을 모두 갖게 되는 것이니까요. 새로운 창생(創生)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효효.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천마와 칠흑왕의 손이 닿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천마에게도 칠흑왕에게도, 자신들의 손을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생기고 세계가 탄생한다는 뜻이니…… 당연히 제지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손에 닿는 걸 선호할 테니까요.
천마와 칠흑왕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세계 창조가 벌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천마나 칠흑왕에게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그들이 태초 때부터 갖고 있던 신화가 깨지는 셈이 되니까. 어쩌면 그들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몰랐다.
이블케는 이런 사실을 이예에게 말해 줌으로써 그가 자신과 손을 잡도록 설득했다.
어차피 이예로서는 천마가 창공 도서관을 나서게 하면 되는 것이니, 이블케를 돕다가 천마가 직접 나설 때 곧장 손을 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문제는 천마가 가진 고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이었지만.
그러다 이예는 이왕 이렇게 된 것, 한번 끝까지 가 보자는 생각에 탑이 부서지고 난 뒤에도 이블케와 함께하게 되었고.
정우와 부딪쳤을 때, 군림보가 그에게 주어진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야만 했다.
여태껏 대적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천마가 처음으로 ‘선물’을 준 것이니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봐도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과 의도를 갖고 있는지는 짐작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결국 정우에게 한쪽 팔이 잘리고, 쫓기듯이 도망치고 말았다.
‘천마. 천마의 생각……. 분명히 형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건 확실한데.’
정우는 천마가 아주 오랫동안 계획해 두었던 ‘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과 형은 그 위에서 그저 놀아나기만 하는 장기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정우는 천마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연우를 쫓아가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예의 사념은 곧 이블케가 가르쳐 준 계획에까지 닿아 있었다.
-오효효! 영혼석. 그 속에 려의 조각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우를 움직이게 하는 데는.
「잠깐! 정우야, 잠깐만 기다려!」
발데비히는 그런 정우의 생각을 읽고, 그를 말리기 위해 이쪽으로 몸을 날렸다.
연우가 떠나기 직전. 그를 남겨 두면서 했던 부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낮(에로스)’의 태양이 방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우는 듣기 싫다는 듯이 배광을 더 크게 내뿜으면서 발데비히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연우가 자신을 방해하리란 건 알고 있었으니까. 어떤 설득을 할지 모르니 아예 듣질 않을 생각이었다.
[‘낮(에로스)’의 태양이 내뿜는 햇살이 세계 전역을 가득 채웁니다!]
[‘밤(녹스)’의 잔재를 물리칩니다.]
[‘밤(녹스)’이 추방됩니다!]
「정우……!」
결국 발데비히를 비롯한 모든 ‘밤’의 존재들은 정우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아들아. 바로 영혼석을 찾으러 갈 거냐?』
정우를 통해 연우가 어디로 이동했을지 눈치챈 크로노스가 질문을 던졌지만.
“아뇨.”
정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으로 가 봤자 계속 한 박자씩 늦기만 할 거예요. 형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도 아니고.”
『그럼, 어쩌려고?』
“같이 형을 붙잡을 사람을 찾아야죠.”
『누구?』
크로노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적자로서 각성을 이루고 자신과 합일을 이뤘지만, 여전히 정우에게 연우는 높은 벽이기만 하다.
그런데 연우를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기나 할까?
그때.
정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녹턴이요.”
* * *
「……정우에게는 아무 말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하나이다.」
발데비히는 뵐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연우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그로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정우를 잠깐이라도 막을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안 되는 거군.’
[‘춤추는 녹색 불길’이 자신들이 내쫓긴 건 불가항력이라고 아버지에게 토로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아버지의 동생이 뿌리는 ‘낮(에로스)’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고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
[‘밤(녹스)’의 존재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에 우울한 기색을 보입니다!]
확실히 타계의 신을 모두 내쫓은 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그만큼 순식간에 격이 상승한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밤’에 있어서는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대적자로 각성을 하였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이겠지.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밤(녹스)’의 존재들에게 괜찮다고 위로합니다.]
[‘밤(녹스)’의 존재들이 아버지의 넓은 아량에 감격해합니다!]
‘거기다 이예의 데이터를 훔쳐봤다면 이블케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예측했다는 뜻일 테고…… 아무래도 좀 더 서둘러야겠어.’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곳에 영혼석이 있는 거 맞습니까?”
그는 손오공을 돌아보며 물었다.
황량한 사막이 훤히 펼쳐진 곳.
생기라고는 전혀 없어서 영혼석의 기운도 찾을 수 없건만.
손오공은 이곳에 영혼석이 있을 것이라며 연우를 데려와 여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연우의 질문에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여기…….」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발데비히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연우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유를 캐물으려는데.
쿠쿠쿠!
갑자기 그들이 있던 지반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적이 출현하였습니다!]
‘뭐?’
분명히 이 행성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연우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인즉, 연우의 감각을 속였다는 뜻인데…… 그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퍼퍼퍼펑!
공허가 허공 곳곳에서 열리면서 마법 폭격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감히 누가!」
발데비히가 노호성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연우의 그림자도 덩달아 높이 일어나면서 폭격을 모두 허공에서 치워 냈으니.
[‘검은 풍요의 요신’이 감히 아버지에게 이빨을 들이댄 자들에게 경고를 날립니다!]
[‘불결의 근원’이 으르렁거립니다! 대적자에게 당한 원한을 그들에게 갚고자 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밤(녹스)’의 위엄을 널리 퍼뜨리겠다고 경고합니다!]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적들을 노려봅니다!]
[‘밤(녹스)’이 일제히 살기를 드러냅니다!]
연우의 그림자에서 수많은 시선이 날카롭게 쏟아지는 가운데.
콰콰콰!
갑자기 연우와 손오공, 그리고 이랑진군이 있던 땅 주변으로 절벽이 지반을 뚫고 높게 치솟아 오르면서 깊디깊은 협곡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 위.
수없이 많은 전사들이 이쪽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웬만한 투신이나 전신조차도 아래로 볼 정도로 강렬한 투기(鬪氣)가 협곡, 아니, 행성 자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거…… 인?」
그들을 본 순간, 발데비히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는 영혼석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아버지!」
거인 집단의 선두에 선 자를 본 순간, 발데비히가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
이곳은.
그가 어린 시절 떠나왔던 고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