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려의 조각 (4)
연우가 거두었던 망자 거인 말고 또 다른 거인족이 있다고?
그러다 연우는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발데비히가 말했던 그의 고향에 대해서.
거기엔 분명히 멸종한 것으로만 알려진 거인 중 상당수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다면 저들이 있는 것도 말은 되었다.
하지만.
‘영혼석의 냄새는 뭐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감각을 예민하게 세워 행성의 내핵까지 단숨에 침투시켰다.
그사이.
[죽음의 군단이 출현합니다!]
[망자 거인들이 자신들의 옛 동족들을 바라봅니다!]
[두 거인 집단이 서로를 적대시합니다!]
발데비히를 중심으로 망자 거인들이 줄지어 나타나면서 협곡 위에 서 있는 거인족들을 노려봤으니.
한순간,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내뿜는 투기가 충돌하면서 행성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투기로 봐서는, 분명히 우리의 동족이 맞는데?」
「하지만 저들에게도…….」
「우리의 냄새가 아주 심각하게 나는데?」
망자 거인들은 협곡 위의 거인들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런 곳에 아직까지 옛 동족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들에게서 ‘산 자’의 향이 아닌, ‘죽은 자’의 향이 풍긴다는 것이 기묘했다.
그랬다.
협곡 위에 있는 거인들은 전부 언데드였다.
탈각이나 초월을 이룬 영혼을 겨우겨우 행성이 가진 에너지로 묶어 붙잡아 둔 지박령(地轉靈)
「배신자들……!」
그런데 협곡 위 거인들은 망자 거인들을 분명 난생처음 보는 것일 텐데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이를 갈면서 흉흉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배신자?」
발데비히가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계속 고개를 들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픈데……. 일단 대가리부터 땅바닥에 처박아 두고 이야기 시작할까?”
손오공이 내심 불쾌함을 토로하면서 주먹을 살짝 들었다. 여차하면 곧장 뇌벽세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하지만 협곡 위 거인들은 그럴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더더욱 살의를 풍겼으니.
발데비히가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며 앞으로 나서려던 그때.
「못난 놈들.」
그때, 협곡 위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협곡 위 거인들이 일제히 당혹해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일반 거인들보다 덩치는 작지만, 무시 못 할 위세를 풍기는 거인이 낭떠러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대장! 대장이 어, 어떻게 여기에……?」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그, 그건 아니지만…….」
「날 놔두고 가면 모를 줄 알았나? 썩 물러나! 뭣들 하는 거야?」
대장이라 불리는 자는 서슴없이 힐난을 던져 댔다.
「동태 눈깔 새끼들. 상대도 누군지 봐 가면서 개개야지, 대체 뭘 하는 거야?」
그러고는 대장은 낭떠러지 끝에 서서 이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발데비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으니까.
대장이라는 자가 익살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이야, 형?」
* * *
연우 일행이 안내된 곳은 지하에 위치한 던전형 도시였다.
마치 개미굴처럼 통로들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곳곳에 위치한 공동은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덩치 큰 거인족들이 사는 곳인 만큼 크기도 하나같이 크고 넓었다. 어쩌면 수천 명도 넘었을 개체가 지냈을지도 모를 대도시였지만.
지금은 백 명도 안 되는 소수만이 살아 황량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대다수의 건물이며 공동이 버려진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발데비히는 그런 곳들을 보는 내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거인족이 맞은 비운(悲運)이 꼭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어떻게 되긴. 그냥 망한 거지.」
기억 한편에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는 막냇동생, 나로츠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발데비히는 처음 나로츠를 봤을 때,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주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동생의 얼굴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가 ‘죽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데비히는 지하 도시로 향하는 내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봤고.
나로츠는 그때마다 엷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발데비히에게는 하나같이 충격적인 것들뿐이었다.
「…….」
「알았어, 알았어. 제대로 대답하면 되잖아.」
나로츠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했다.
「형도 너무 어린 시절에 이곳을 떠났으니 잘 몰랐을 테지만. 선조들 중 다수가 탑으로 건너간 건 알고 있지?」
「그래.」
「하지만 종족 전부가 탑으로 넘어간 건 아니었어. 계속되는 전쟁이 지긋지긋했던 일부는 남았었고, 그들의 후예가 바로…….」
「우리였다는 거구나.」
「어. 덕분에 종족을 유지하기에는 개체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 혈통도 이래저래 잡다하게 섞이고 말았지만.」
발데비히 형제가 반거인인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종족은 계속 몰락을 거듭해야 했어. 행성 자체가 부서지고 있었거든. 종족이 가진 격도 나날이 하락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 꼴이 되고 만 거지.」
「…….」
「아버지가 형을 탑으로 보냈던 건 그런 종족의 몰락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하려고 그랬던 거고.」
아버지는 형이라면 어떻게든 종족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고 계셨거든.
나로츠는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다른 형제들도 전부. 워낙에 행성을 뒤덮은 재앙이 커서.」
「아!」
발데비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유성이 떨어졌어.」
뒤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우와 손오공, 이랑진군은 그것이 영혼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참 신기한 이능(異能)이 많은 돌이었는데…… 하여간 여차여차해서 우리는 거기에 기생(寄生)할 수 있었어. 종족은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는 게 우리들의 생각이었으니까.」
영혼석은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바로 당시 무리를 이끌고 있던 나로츠였다.
그들의 영혼을 강제로 영혼석에다 묶어 두는 것으로 어떻게든 삶을 조금이라도 연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나마 갖고 있던 신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격도 같이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리고 이 황량하기만 한 행성에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나로츠와 동료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버텼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지?」
발데비히는 자신에게 마지막 힘을 넘겨주고 사라졌던 거인족의 마지막 왕, 발데비히의 유언을 떠 올렸다.
-우리의 제사장이 말하였다. 언젠가 우리를 인도할 존재가 찾아올 것이라고. 나는 그것이 너이며, 또한 저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왕 발데비히가 말했던 예언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가 그 예언을 믿고 오랫동안 기어 다니는 혼돈의 노예로 살았던 것처럼, 이곳에 있는 동생과 동족들도 어떤 믿음이 있어 남게 되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응. 예언이 있었거든. 언젠가는 구원자가 올 거라던 예언.」
‘역시…….’
「그런데 진짜 이렇게 왔네?」
나로츠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
「나는 그 예언이 말하는 대상이 형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대체 날 뭘 믿고?」
「그냥. 감?」
발데비히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로츠는 기억만 얼핏 남아 있을 뿐 그와는 이렇다 할 추억도 쌓지 못했었으니까.
더구나 어린 시절에 그는 상당한 겁쟁이었다. 말투도 어눌하고 행동도 느릿하기만 한 겁쟁이.
그런데 그런 느낌이 있었다니.
「이거야. 형이 찾는 돌이. 영혼석이 진짜 이름인가 봐?」
그러다 나로츠는 어느 공동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른 공동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 하지만 그만큼 폐허가 되어 버린 곳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제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영혼석이 결계로 단단히 보호되고 있었으니.
[영혼석(근면의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현재 접근이 불가합니다.]
멸종된 종족의 맥을 이어 주고 있는 만큼, 영혼석은 아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우는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고 제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계가 격렬하게 침입을 물리치려 했지만.
파지직, 쾅!
[‘그림자 영역’이 결계 안쪽으로 스며듭니다!]
[결계의 기능을 해제합니다.]
[결계의 성분을 해제합니다.]
……
[결계가 무효화되었습니다!]
연우는 너무 손쉽게 결계를 헤치면서 제단 앞까지 다가갔다. 영혼석에서부터 백여 개나 되는 페어링이 곳곳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통해 마력을 공급받으며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다치지 않게 영혼석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그만둬!」
별안간 나로츠 쪽 거인들이 연우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망자 거인들이 그걸 놓치지 않고 불쑥 모습을 드러내면서 가로 막았다.
쾅!
「비켜!」
「거기에 손대지 말고 꺼져!」
거인들은 어떻게든 망자 거인들을 물리치려 아등바등했다. 그럴수록 영혼석, 근면의 돌에서 배출되는 마력량도 덩달아 커졌다.
발데비히가 나로츠를 재빨리 돌아봤다. 나로츠는 손으로 얼굴을 와락 덮으면서 탄식을 터뜨렸다.
「이런……!」
「왜 저러는 거지?」
「별것 아냐. 그러니까 회수를 할……!」
「손대지 마! 그게 사라지면 우리는 전부 끝이란 말이다!」
나로츠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른 거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발데비히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너흰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신께서는 죽음을 직접 사역하시는 분이다. 영혼석을 회수해도, 우리처럼 계속 존재를 유지할 수 있……!」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군.」
「뭐?」
「우리는 이미 영혼도 닳을 대로 닳아서 사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회수해서 되살리겠단 거지?」
「……!」
발데비히는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념만 겨우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혼석이라는 근간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 모두가 소멸하고 만다는 뜻이었으니.
그제야 여기서 영혼석을 회수한다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거인이 한쪽 입술 끝을 크게 비틀었다.
「우리를 구원할 자라고? 네가? 어렸을 때 종족과 터전을 버리고 갔던 놈이 무슨……!」
나로츠는 구원자들을 기다린다고 하였지만, 사실 애당초 거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예언이라고 남아 있는 게 진짜 예언인지, 예언자인 척한 놈이 술에 취해 멋대로 지껄인 말인지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영혼석이 사라지면 그들은 전부 ‘죽음’을 맞아야만 한다.
윤환전생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죽음.
그들로서는 그딴 개죽음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헛된 삶이라고 해도, 현상 유지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 와중에 다른 방법이 생겨서 이런 지긋지긋한 생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건!」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아주 많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종말을 맞아야 했던 우리를, 네가 이제 와 어떻게 구원해 준다는 거냐?」
「페트론! 조용하……!」
「너나 조용히 해, 나로츠! 아무리 네가 수장이라고 해도, 우리의 생존 여부까지 쥐고 있는 건 아니니까!」
페트론이라 불린 거인은 나로츠의 화를 묵살했다. 거인족은 단숨에 나로츠와 페트론, 두 패로 갈라져 금방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거인족의 위계질서는 아주 단단하다. 그것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나로츠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페트론은 나로츠를 무시하고 발데비히를 노려보았다.
연우도 같이.
그런데.
“가능하다면?”
연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페트론은 바라봤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너희들이 사라져도 되살리는 것, 가능하다고.”
페트론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우리를 놀리려는 거냐?」
“내가 왜? 그냥 너희들을 밀어 내고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건데.”
「……!」
순간, 페트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실 그도 연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자신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개변(改變)을 할 거다.”
「……뭐?」
“초월을 해서 이 ‘꿈’의 모든 법칙과 인과를 바꿔 버릴 생각이다. 그런다면 구원 없이 몰락하고 말았던 너희들도 다시 번성을 이룰 수 있겠지.”
페트론뿐만 아니라 나로츠까지도 똑같이 연우를 돌아봤다. 발데비히는 물론, 이랑진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손오공만큼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연우를 보고 있었다.
「자세히…… 말해 봐.」
페트론이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