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71화 (771/862)

21화. 려의 조각 (5)

손오공을 만나고 난 뒤.

연우는 홀로 여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꿈’은 반드시 이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이제야 겨우 되찾은 가족들이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 칠흑의 힘을 부여하고, 강제로 ‘황’으로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격을 끌어올린다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쉽지 않을뿐더러, 그런다고 해서 과연 가족들이 좋아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쨌거나 연우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가족의 생존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풍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영면(永眠)에 잠길 필요가 있었으니…….

그래서 이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고, 살고 싶다는 소망을 억지로 숨기고 외면하려 했다.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다 된 것이다.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고자 했다.

하지만 손오공이 말했다.

그것은 기만에 불과하다고.

네가 희생한다고 한들, 가족이 그것을 좋아하겠느냐고.

물론, 기억은 지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조작된 행복에 불과하다. 그리고 너는 가족들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갈이 그동안 피하고자 했던 진심을 다시 보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연우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그는 조금씩 길을 찾아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앞에는 손오공이 있어 틀린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해 주었고.

그리고 아주 작지만, 해결책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바로 ‘초월’이었다.

물론,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되어 초월을 이룬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몰랐다.

이미 그가 딛고 있는 격만 해도 ‘황’ 급이나 마찬가지였고,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초월이라고 하기 힘들었으니까.

그가 초월을 이룬다는 건, 칠흑왕이라는 존재의 틀마저도 훨씬 뛰어넘는다는 뜻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었다.

칠흑왕이라는 존재를 아는 이들에게 말한다면, 하나같이 ‘미쳤냐?’는 답변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연우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바. 때문에 이런 선택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중에 피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태초 너머의 태초…… 아니, 그런 태초 이전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

천마가 처음으로 눈을 뜨며 빛을 만들어 내고, 우주 창생을 시작하며 ‘굴레’를 굴리기 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 칠흑왕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는다니.

애당초 그런 존재는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해.’

연우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위치에 다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만 이 지겹기 짝이 없는 ‘굴레’를 이 손으로 직접 멈추고, ‘꿈’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직접 목공이 되어 ‘굴레’를 이루는 굴대를 뜯어고치고, ‘꿈’도 여기저기를 보수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가족들과 계속 함께 살아갈 생각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잃어버리고, 잃어야만 했던 것들을 전부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자신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옛 연인을 시작으로.

오로지 손녀 걱정만 하다가 눈을 감았던 브라함과 따스한 눈빛을 보내면서 떠났던 무왕까지…….

연우는 그 모든 것들을 원래 있었던 자리에 놓고, 그 사이에 자신도 있을 생각이었다.

‘개변(改變)’이라고 표현한 건 전부 그런 뜻이었다.

물론, 그런 과정들이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클 것이다.

어쩌면 실패하고 나서 연우는 일반적인 마성들처럼 될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정체성마저 상실해 본능만이 남았던 존재들. 악을 지르고 당장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심이 전부였던 그들도 한때는 자신처럼 어떤 목표를 가지고 뛰었던 존재들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나마 안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영면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연우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떻게든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다행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려의 조각.

그것을 이용해 천마의 힘도 같이 가질 수 있다면……!

단순히 함몰되기만 하는 칠흑왕의 구속에서 벗어날지도 몰랐다.

* * *

‘내가 이렇게 살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나?’

와중에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단연코 없었다.

그는 그동안 죽지 못해 살았던 망령에 불과했었으니까.

아버지가 자취를 감춘 뒤, 동생이 실종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을 때.

천애고아가 되어 도망치듯이 군대로 들어갔고, 아프리카로 파병을 갔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죽음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밀어넣었다.

그때는 당장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굳이 자살을 하지 않았던 건 어머니의 유훈이 있어서였을 뿐이었으니까. 그저 이렇게 막살다가 보면 언젠가 가족들의 곁에 있겠지…… 그런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 뒤에 동생의 행방을 알게 되어 탑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

그저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 과정에서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원수를 죽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다 동생이 깨어나고,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며, 어머니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연우의 마음속에 아주 작지만 살고 싶다는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겠다고 마음 먹은 지금.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에도라와 가정도 일구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지금.

연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결심을 세웠다.

이제야.

이제야……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 * *

「……그러니 칠흑왕이 되어 우리를 되살리겠다고?」

페트론은 연우의 설명을 듣고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도 칠흑왕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직접 만난 적도, 그와 관련된 것들과 마주친 적은 없어도, 전승은 종족 내에 계속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거인족들에게 있어서도 까마득하기만 한, 그런 존재가 되겠다고?

페트론으로서는 미쳐서 내뱉는 헛소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

연우는 틀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높이 올라가겠다고 말하는 거다.”

「미친……!」

“칠흑왕은 구속된 존재다.”

나지막한 연우의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항상 ‘굴레’니 ‘꿈’이니 하는 것에 단단히 구속되어 있지.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질 못해. 그러니 나는 그걸 전부 끊어 버릴 거다. 객관적으로 ‘굴레’와 ‘꿈’을 보고 난 뒤에야 굴대를 전부 뜯어고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페트론이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도중에 중단해야만 했다.

연우의 눈빛이 크게 빛나면서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무슨……?」

“무슨 소리긴. 너희들이 싫다고 해도 그냥 영혼석을 가져가겠다는 뜻이지.”

「……!」

「……!」

「……!」

대놓고 너희들의 의견 따위는 그냥 묵살하겠다는 연우의 말이 페트론 등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반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 선택해라.”

연우의 비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냥 이대로 소멸해 버리든가, 아니면 아주 미약하게라도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든가.”

「…….」

「…….」

「…….」

페트론 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만 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발데비히와 나레츠도 입이 쩍 벌어졌으니.

특히 나레츠가 받은 충격은 아주 커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동안 발데비히와 그가 모시는 신인 연우를 예언 속 구원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구원자가 대놓고 강짜를 부리니,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일 테지.

『푸하하하!』

손오공은 이런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치였지만.

연우만 들을 수 있도록 어기전성으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혹시 천마의 얼굴은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막 나가는 인성질이 참 우리들이랑 너무 똑같다 싶어서.』

『그쪽이랑 비교되는 건 제가 싫습니다만.』

『네가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은데?』

『아닙니다.』

『맞는데?』

『아닙니다.』

손오공이 피식 웃었다.

어쩐지 비웃음 같았지만, 연우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아니면 될 생각은 없고?』

『그게 되고 싶다고 아무나 막 되는 겁니까?』

『천마의 얼굴이 칠흑왕의 자아도 되는 마당에 반대는 되지 말란 법 있냐?』

『……그건 그렇군요.』

『거기다 네가 노리는 것도 그런 것 아냐?』

손오공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한편으론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블케 녀석이 천마와 칠흑왕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어서 목적을 이루려는 것처럼, 너도 그러려는 거잖아?』

『…….』

『다른 점이 있다면, 그놈은 단순히 도망칠 토끼 굴을 만들려는 거고, 너는 아예 칠흑왕과 천마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전부 입맛대로 굴겠다는 거지만.』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한 거 맞습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건 사실이니 말입니다.』

『잘했다.』

『……?』

『잘했다고.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고 해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거지.』

『…….』

연우는 손오공의 칭찬을 듣고 있노라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손오공도 애당초 그가 이런 결론을 내리기를 바라고, 그렇게 유도했던 건 아닐까?

단순히 가르쳐 주기만 하면 언젠가 힘을 잃고 바스러질 수 있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이라면 굳게 밀고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연우는 마음 한편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되기 전까지, 한번 세운 목표는 어떻게든 성공해 내고 말던 자신의 마음가짐이 다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연우는 여전히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거인들을 돌아보면서 짧게 말했다.

“날 믿으라는 소리는 안 한다. 대신에 발데비히를 믿어라. 그럼 되나?”

순간, 발데비히의 시선이 연우에게로 향하고.

거인들의 시선은 전부 발데비히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나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

페트론 쪽에 있던 어느 거인이 처음으로 적막을 깼다.

슬픔이 가득 섞인 목소리.

하지만 자그마한 희망을 품은 목소리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누이…… 당신이 만든다는 세상에서는 그들을 전부 만날 수 있을까?」

“최대한 노력해 보지.”

「나도! 나는 이런 황량한 곳 말고, 벼가 많이 자라는 논이 있는 곳에서 눈 뜨고 싶어!」

「나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다! 제기랄! 이번 생은 글렀어! 대체 모태솔로로 언제까지 살란 거야! 다음 생! 다음 생만이 답이다!」

「나는 돈 많은 거부……!」

「나는……!」

「나도……!」

한 명을 시작으로, 여러 거인들이 저마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각자가 가슴 한편에 품고 있던 소망들을.

하지만 좌절과 절망만 가득한 세계에서 절대 이룰 수 없던 그 소망들이 피어나는 순간, 연우는 다시 한번 더 새로운 신앙들이 속속들이 자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인족의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거인족의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

[모든 거인족의 신앙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새로운 칭호(거인족의 유일신)를 획득하였습니다!]

……

페트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고, 나로츠는 그제야 안도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발데비히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나 잊지 말라고, 형. 알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파아아 나로츠는 그 말을 끝으로 잘게 부서지면서 흩어졌다. 그리고 뒤따라 거인들도 줄줄이 마력으로 치환되어 영혼석으로 빨려 들어갔으니.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페트론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한 채였다.

「당신이 진짜 구원자라면, 다시 우리를 찾을 테지. 하나 찾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갈 거요.」

“마음대로.”

「……그 망할 예언이 진짜였으면 좋겠군.」

그렇게 페트론도 사라지고.

[영혼석(근면의 돌)을 획득하였습니다!]

* * *

……이제 세상에 남은 영혼석은 단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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