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려의 조각 (6)
행성, ‘포말-하우트’.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농부들은 한창 쟁기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으, 날씨 진짜……!”
“오늘 분명히 날씨 흐리다고 하지 않았어?”
“기상학자 놈들이 그렇지, 뭐! 어디 그놈들 예상이 틀린 게 하루 이틀인가?”
“아, 진짜 너무 더운데. 이것들 오늘 안으로 다 해야 하는데 가능할까? 마도구로도 한계가 있는데. 음!”
농부들은 아직도 한참 남은 밭을 보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이상 더위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농사일을 차일피일 계속 미루던 차에, 간만에 날씨가 선선해질 거란 소식을 듣고 일을 개시했었건만.
선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햇살이 뜨겁기만 하니 그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러다간 정말 기한 내에 일을 마감하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 등골이 쭈뼛 섰다.
지주 영감은 평상시에는 사람 좋아 보여도, 지시한 일들이 제때제때 끝나지 않으면 아주 엄하기 이를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 같은 소작농으로서는 지주가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이니 갑갑할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그냥 쟁기를 버리고 도망쳐 버리자니 여건이 이곳만 한 곳도 잘 없는 데다가, 소작농들의 복지를 챙겨 주는 지주는 더더욱 없다 보니…… 어디 딴 곳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오늘 하루는 무리를 해서라도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데 턴, 저 친구는 참 대단하단 말이지?”
“그러게. 우리는 전부 죽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인데. 종일 일만 하고 있으니.”
“어제도 그랬던 것 같았는데.”
“어제가 뭐야. 한 달 내내 저러고 있구만.”
“허! 저러다 젊은 사람이 몸 축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도 적당히 쉬엄쉬엄해야지.”
농부들은 저 멀리 혼자서 밭뙈기를 갈고 있는 젊은 사내를 보며 걱정에 찬 얼굴이 되었다.
1년 전이었던가? 지주가 새로 참여하게 된 일꾼이라며 소개해 주었던 청년이었다.
말수가 적어서 아직까지 친해진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을 가장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농부들로서는 저절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더위 속에서도 그나마 밭이 이 정도까지 경작된 건, 저 청년 덕분이기도 했으니.
사실 그가 일사병으로 쓰러지면 남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던 것도 있었고.
“어이, 턴! 좀 쉬면서 해!”
결국 한 명이 크게 소리쳐서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청년은 고개만 살짝 끄떡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에 몰두했으니.
“아마 전생이란 게 있다면, 저 친구는 소였을 게 틀림없어. 사람이 어찌 저렇게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누? 신기하단 말이지.”
농부들은 청년이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절대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디서 비 한 바가지 안 쏟아지나? 그럼 정말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흠!”
고개를 든 한 사람을 따라 다른 농부들도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기만 할 뿐,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 * *
[천마가 당신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
청년, 농부들이 ‘턴’이라고 부르는 녹턴은 묵묵히 쟁기질에 몰두했다.
농부들이 저들끼리 조용히 사담을 나눈답시고 자신을 가리켜 소니 뭐니 떠들어 대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모른 척했다.
[천마가 당신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그리고 망막 한편에 떠오른 메시지도 똑같이 무시했다.
남들이 안다면 기겁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였지만.
녹턴에게는 그저 쓸데없이 시야만 가리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천마가 당신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이왕이면 아예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계속 왜 저렇게 알짱거리기만 하는 건지.
거기다 녹턴은 행성 너머, 그로서는 도저히 어딘지 짐작하기 힘들 만큼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이런 시선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분명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녹턴이 자신에게 고정된 천마의 시선을 읽기 시작한 것은 무왕의 승화 이후였다.
당시 그는 탈각과 초월을 실패하였고, 하나뿐인 스승을 잃은 채로 정처 없이 세계를 방황해야만 했다.
도중에 연우를 도와 탑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긴 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우가 사제이기에 참여한 것일 뿐.
그는 이미 세상사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빙왕과 트와이스도 언제부턴가 그의 곁을 떠났을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방황을 했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그러다 녹턴은 아주 우연찮게 천마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어이가 없기도 했다.
아들을 잃었으니, 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자신을 통해 덜어 내려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녹턴으로서는 천마에게 호의적일 이유가 없었으니, 그냥 무시로 일관했다.
왜 그러는지 질문도 던지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언제부턴가 천마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떠올라도 마찬가지.
그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천마도 거기에 대해서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내가 이 행성이 오고 난 뒤부터 좀 달라졌었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 감정이 실렸다고 해야 할까.
아주 미약하지만, 천마의 시선에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녹턴도 아주 잘 아는 감정이었다.
그리움.
그리고 미안함.
녹턴이 무왕에게 가졌던 감정이었다.
천마는 이제 아예 대놓고 자신에게 올포원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기도 했다.
‘내 무의식 한편에 남아 있는…… 그 기억 때문인가? 확실히 이곳은 손재원이 처음 소환되었던 이세계와 많이 닮았으니. 아니, 그곳이 확실하긴 해. 시간은 아주 많이 지났지만.’
언제부터였던가?
녹턴은 탑에서 나온 뒤, 정처 없이 우주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이따금 꿈을 꾸었다.
정확하게는 백일몽이라고 해야 하리라.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오르고, 이따금 꿈에 너무 취한 나머지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웬 이상한 가족들 틈바구니에 둘러싸여 다 같이 웃고 있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입은 채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그것은…… 올포원의 기억이었다.
정확하게는 올포원이 ‘비바스바트’라는 이름을 얻기 전, ‘손재원’으로서 겪었던 시절의 기억.
녹턴은 자신이 녹턴인지, 아니면 손재원인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호접몽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억 속에는 현재 자신이 있는 행성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처음 손재원이 사라진 아버지, 천마를 쫓아 도착했던 세계.
인신 공양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던 미개한 세계가 바로 이곳 이었다.
당시에 손재원은 정말이지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굴렀고, 끝내 신격이 되고자 하는 괴물을 처치하고 그 영성을 갈취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피조물들을 강제하고자 하는 초월자들에 대한 원한을 처음으로 품게 된 계기이기도 했으니.
탑에서 절지천통을 그리도 부르짖었던 건, 전부 이곳에서의 기억이 손재원에게 아주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녹턴이 도착한 것이다.
그토록 많은 문명과 행성이 있는 이 우주에서, 하필이면 왜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유와 별개로 녹턴으로서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데자뷰처럼 느껴졌으니.
1년 넘게 이 행성에 남아 있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와 현재는 상당한 시간 차가 있었다.
이미 인신 공양 같은 말도 안 되는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오히려 문명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신론(無神論)이 대세처럼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무신론만이 아니었다. 보통 괴력난신으로 통칭되는 이상 현상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아주 많았다.
-신같이 증명되지 않은 존재에게 기대지 않고, 자력으로 일어서서 세상을 살아간다.
언젠가 손재원이 꿈꿨던 세상, 절지천통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 바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간 차가 있다고 해도, 그토록 신적인 존재들에게 휘둘리던 문명이 이토록 크게 바뀌게 된 경우는 거의 찾아올 수 없는바.
이것은…… 어쩌면 손재원이 왔다 갔다는 흔적은 아닐까?
신기한 점은 보통 그만한 영웅이 왔다 갔다면 전설이나 신화 따위로 남아 숭상을 받을 텐데, 여기서는 단순한 영웅담이나 동화 정도로만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손재원의 기억을 조금씩 복원하고 있는 녹턴으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천마의 시선도 점차 강렬해졌으니.
녹턴이 최근 들어 이상하게 답답한 마음이 되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조만간에 이곳도 떠나야겠어.’
녹턴은 손재원의 기억을 굳이 거부하거나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 따위에 진절머리를 쳤겠지만, 너는 너로 살라는 스승님의 유언이 있었으니 이 기억도 자신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냥 흐르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녹턴이 바라마지 않는 삶이었으니…….
[손님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녹턴은 갑자기 새롭게 추가된 메시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이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녹턴의 시선이 농부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 *
“넌……!”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건 처음이야. 그렇지?”
“……헤븐윙이로군. 완전히 소생(甦生)하게 된 건가?”
녹턴은 연우와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도 전혀 다른 기질을 풍기는 차정우를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비슷해. 그런데…….”
차정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익숙한 시선이 이곳에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녹턴도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
피식.
녹턴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세상사에 무감하기로 유명한 분께서 최근 들어 관심사가 많아지신 모양이로군.”
차정우는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다.
자신이야 ‘낮’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녹턴에게도 이 시선이 닿아 있는 걸까?
단순히 자신이 녹턴을 데리러 오려 하니 따라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이전부터 천마가 녹턴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
‘천마의 안배에…… 녹턴도 있었던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차정우는 어쩐지 자신이 정답을 선택한 것 같다는 확신을 받을 수 있었다.
“녹턴.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좋아. 가지.”
“그래. 나와 같이 가 줄…… 으, 응?”
차정우는 녹턴을 설득하려다 말고, 갑자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아직 용건을 꺼내기는커녕, 어디로 같이 가자고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양 대답하고 있었으니.
사실 차정우는 녹턴을 설득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그를 찾기 전에 빙왕과 트와이스를 만났었기 때문이었다. 녹턴을 만나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말에 각오를 다지면서 왔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하지만 녹턴은 여상한 태도였다.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세상에 이제 단둘만 남은 사형제이니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그렇게 사이좋은 관계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놈을 도우러 가는 것이겠지?”
차정우는 눈을 더 크게 뜨다가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도움이 필요해.”
“좋다. 하지만 하루만 기다려라.”
“하루?”
차정우는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고.
녹턴은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무너진 기량을 제대로 복구하려면 하루 정도는 필요하니까.”
녹턴이 기량을 되찾는다?
언젠가 무왕은 녹턴의 기예가 자신과 견줄 만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었으니.
그것을 되찾는다는 말에 차정우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