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려의 조각 (7)
“그래. 그러니까 설득을 못 했다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못했단 거잖아. 그렇지?”
“그, 그게……!”
교마왕은 붕마왕이 계속 쏘아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애썼지만, 붕마왕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도저히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매번 철없이 지내는 교마왕을 대신해, 셋째이자 의형제들 중에서도 홍일점인 붕마왕은 사실상 동주칠마왕 내에서 실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워낙에 성격도 다부지다 보니 교마왕이며 다른 의형제들도 이따금 우마왕보다 그녀를 더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붕마왕은 교마왕이 손오공을 데려오지 못한 것에 대해 연신 질책을 해 댔고, 그럴 때마다 교마왕은 자꾸만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나도 가고 싶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붕마왕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말이 도로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다 구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사타왕을 바라봤지만.
“…….”
스윽!
사타왕은 휘파람을 불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교마왕에게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설마 막내가 귀찮다면서 그냥 가라고 했다고 돌아온 건 아니지? 큰 오빠가 세운 계획에서 막내가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건 알고 있지?”
“하, 하하! 모, 모를 리가 없잖아! 하지만 막내가 자기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했던 데다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했었…….”
“전혀 모르고 있었네.”
“…….”
“돌아오긴 왜 돌아왔니. 그냥 나가 뒈지지 그랬어. 그럼 악어의 눈물이라도 흘려 줬을 텐데.”
“…….”
계속 독설이 이어지는 통에 교마왕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붕마왕의 한숨은 더욱 커졌다.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팼다.
“아, 이럼 정말 큰일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
붕마왕은 말을 잇다 말고 도중에 고개를 들었다. 교마왕과 사타왕의 시선도 같은 곳으로 돌아가던 그때.
[손오공이 강림합니다!]
콰쾅!
갑자기 의형제들이 머물고 있던 막사가 날아가면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 손오공이었다.
반가운 얼굴이니만큼 모두가 반색해야 했지만.
의형제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휘휘휘!
손오공을 중심으로 막대한 투기가 넘실대고 있었으니까.
“형제님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영혼석 좀 회수해 가겠습니다. 아주 좋은 곳에 쓰일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
“……!”
“……!”
그 순간, 의형제들은 일제히 신력을 개방했다. 그러면서 서로 간에 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막내는 그들이 영혼석을 갖고 있단 사실을 몰라야만 했다. 여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다는 건, 누군가가 막내에게 일러다 바쳤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손오공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이쿠! 그냥 찔러 본 건데. 진짜 있나 보네?”
“……!”
“……!”
“……!”
“하여간 우리 형제님들 이렇게 순진해서 얻다 쓴담? 하여간 좀 받아 가겠습니다. 쓸 데가 있어서!”
손오공이 거세게 지면을 박찼다.
콰아앙!
쐐애애액-
“마, 막아!”
“젠장! 왜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데!”
우마왕을 제외한 다른 의형제들은 그동안 손오공에게 시달린 시간이 워낙에 많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합격진(合擊陣)을 갖추면서도, 어떻게든 손오공을 뜯어말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이미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손오공은 폭주 기관차나 다 름없었으니.
콰르르릉-
뇌벽세와 화염륜이 잇달아 터져 나가면서 의형제들이 죄다 튕겨 났다. 막사가 무너지면서 불기둥이 몇 번이나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퍼퍼퍼펑!
쿠쿠쿠쿠
[‘복마전’과 ‘동주칠마왕’에 내분이 발생하였습니다!]
“무, 뭐야?”
“또 무슨 일이지?”
현재 동주칠마왕이 자리를 잡은 곳은려의 무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당연히 일대에는 절교의 숙영지가 건설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소속 악마들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혀를 찼다.
그들 대부분이 보유한 신화에서 동주칠마왕과 갈등을 겪었던 이들이니만큼, 저들이 또 소동을 일으킨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이건?”
사타왕은 손오공에게 또 두들겨 맞을까 싶어 슬쩍 뒤로 내빼려다 말고, 갑자기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고 눈을 번뜩였다.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강림합니다!]
“하! 막내가 왜 그러나 싶더니. 너와 손을 잡은 거였나!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겠군.”
사타왕은 연우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어 댔다.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이 투기마저 넘실거렸다.
그의 신위는 전투. 정확하게는 ‘호전광(好戰狂)’이었다. 싸우는 것을 워낙에 좋아하다 보니 신화가 겹겹이 쌓이고, 감히 자신이 넘볼 수 없는 벽이었던 우마왕에게 반해 동주칠마왕에 속하게 된 케이스였으니.
손오공이야 오랫동안 부딪치다 보니 별반 새로울 게 없었지만, 연우는 전혀 달랐다.
오래전에 연우와 한차례 부딪쳐 본 적도 있거니와, 그 뒤로도 몇 번씩 충돌했지만 제대로 된 결착을 내지 못했으니 이참에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사타왕은 연우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몸을 날렸다. 마치 맛난 먹이를 발견한 사자처럼, 매서운 일격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휘이잉, 콰아아앙!
하지만 사타왕의 주먹은 연우에 게 닿기도 전에 갑자기 위로 삐죽 치솟아 오른 그림자에 가로막혔다.
“비켜!”
연우는 너 같은 잔챙이에게 소요할 시간 따윈 없다는 듯, 움직이던 그대로 거세게 일갈을 내질렀다.
[‘그림자 영역’이 크게 확장합니다!]
[‘밤(녹스)’이 내려옵니다!]
[대적자의 운명이 다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흡!”
사타왕은 자신을 에워싼 그림자에 막대한 힘이 실리자, 한순간 헛바람을 들이켜며 신력을 잔뜩 끌어 올렸다.
[신물 ‘파초선’의 힘이 더해집니다!]
[바람의 힘이 도중에 차단됩니다.]
“무, 뭐…… 컥!”
퍼어어엉!
사타왕은 거의 자신과 한 몸이 되다시피 한 파초선을 제대로 사용하기도 전에 이미 크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는 과연 알까? 이미 파초선에 대한 분석은 연우가 오래전에 끝내 둔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독으로 작용해 버렸다는 것을.
“이, 이런!”
“안 돼!”
다른 의형제들이 뒤늦게 연우를 발견해서 어떻게든 그를 제재하려 했지만.
“감히 나를 두고 등을 돌려?”
“마, 막내야!”
“제발 좀 그만할……!”
손오공이 사악하게 웃으면서 가한 난타에 그대로 휩쓸려 나가고 말았다.
결국 그사이 연우는 붕마왕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으니.
붕마왕이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이미 그녀의 그림자가 주인의 의지를 거스르고 전신을 속박하고 목젖에다 날카로운 날까지 갖다 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위에다 연우도 검결지를 짚은 자신의 손끝을 가져다 댔으니.
여차하면 목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자세에 붕마왕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원하는 게 뭐야?”
“영혼석 내놔.”
“이런다고 해서 네가 칠흑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생기지는 않……!”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까 내놔.”
“…….”
붕마왕은 아주 잠깐 갈등했다.
그녀는 사실 이 자리에서 죽거나 소멸하는 것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기회주의자인 교마왕이나 단순한 호전광인 사타왕과 다르게, 그녀는 우마왕의 계획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찬동하여 가담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막내와 천마를 구할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죽는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막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붕마왕이 알기로, 손오공은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절대 무의미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사이.
쿵!
쿵!
“으어어…….”
“저놈, 그새 더 세졌어……! 정말 사람 맞냐……!”
손오공에게 처맞을 대로 처맞은 둘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붕마왕은 손을 탁탁 털고 있는 손오공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살아남을 생각.”
“……큰오빠가 하려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비슷해. 이 빌어먹을 우주를 처음부터 뜯어고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다 정말 다 죽어! 끝도 없다고!”
“이렇게 힘없이 또 ‘굴레’가 굴러가는 걸 지켜보느니, 차라리 다 망하더라도 바로잡으려는 것뿐이야. 애송이도 그걸 바랄 테고.”
“…….”
붕마왕은 손오공을 어떻게든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그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다른 말은 절대 들어 먹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국 신경질적으로 영혼석을 내놔야만 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태생적으로 절교 놈들과 계속 손을 잡고 있는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니까.
[영혼석(친절의 돌)을 습득하였습니다!]
연우는 그것을 회수하자마자, 곧장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밤(녹스)’이 만연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큰 혼란에 잠겼습니다!]
[‘시의 바다’가 기습을 받아 궤멸의 위험에 처했습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짐승이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짐승이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
[‘멸망을 노래하는 자’가 감히 아버지를 거스르려는 자들에게 멸망을 선고합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밤(녹스)’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선사하고자 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옛 숙적들에게 전염병을 선물합니다!]
[‘춤추는 녹색 불길’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불태워 정화시키고자 합니다!]
……
[디스 플루토가 죽음을 퍼뜨립니다!]
절교의 악마를 비롯해 이블케가 만약을 대비해 주둔시켰던 짐승들까지, 연우가 퍼뜨린 그림자에 붙들린 채로 거기서 솟아난 권속 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악마들이 지르는 비명과 짐승들이 울부짖는 괴성으로 세계가 들썩였지만.
[확보한 인과율 중 상당수가 급속도로 소모됩니다.]
[남은 인과율: 41, 40, 39, 38%…….]
이미 연우가 전력을 개방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들이 연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동안 연우가 그들에게 열세인 듯한 인상을 풍긴 건 어디까지나 ‘꿈’과 ‘굴레’의 존속을 위해서였을 뿐.
하지만 그것을 내던진 이상, 연우는 이미 이 우주와 세계가 가진 인과율(因果律)과 억지력(抑止力)의 의지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바로 칠흑왕이 가진 본질, 그 자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끄어어어어!
그렇게.
연우는 곳곳에서 울부짖는 적들을 지나 어느 동굴 앞에 다다를 수 있었으니.
이블케와 우마왕, 그리고 통천교주의 흔적이 그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자의 돌 안에 박힌 죄악석의 마력도 그쪽으로 계속 꿈틀대고 있었으니.
이곳이려의 무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동굴 입구를 통과하려던 도중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뚜벅.
뚜벅.
동굴 안쪽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연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청객이 올 거라 생각은 하였지만, 조카님이신지는 몰랐군.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게 처음일 테지? 반가우이.”
오케아노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