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려의 조각 (8)
[용신안]
[화안금정]
[현자의 눈]
[‘천안통’이 상대가 가진 데이터를 파악 중에 있습니다!]
[‘천이통’이 상대의 프로세스를 분석 중에 있습니다!]
[상대는 현재 시스템이 보유한 프로그램으로 파악 및 분석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데이터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시스템을 업데이트합니다.]
[해석이 실패하였습니다.]
[시스템을 업데이트합니다.]
[해석이 실패하였습니다.]
[시스템을 업데이트합니다.]
……
[시스템에 대한 대규모 업데이트가 이뤄졌습니다!]
[대상에 대한 파악 및 분석이 다시 이뤄집니다.]
연우는 가장 먼저 시스템을 활용해 오케아노스에 대해 분석하고자 했다.
상대는 비마질다라를 압도적인 무위로 꺾고, 지구에 강제로 억류시켰던 인물.
여태껏 비마질다라에게 이런저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연우에게는 반드시 그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초월을 이루고, 개변을 통해 ‘굴레’와 ‘꿈’을 뜯어고친다면 그 역시 다시 나타날 수 있을 테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원한은 원한이었다.
절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분석이 끝났습니다.]
[결과를 출력합니다.]
“크게 다쳤군. 경계의 거주자와 싸우기라도 했나?”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연우는 오케아노스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를 둘러싼 여러 사념들을 분석하면 상당한 정보가 나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오케아노스가 꽤나 큰 상처를 입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겉보기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비마질다라의 사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신력의 양이 적었다.
게다가 영체는 온통 상처로 가득했으니.
하나하나에 경계 거주자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그와 한판 크게 겨뤘다는 뜻.
“승기는 잡지 못했던 것 같고.”
오케아노스와 경계의 거주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저렇게 존재가 소멸할 위기를 겪었을 정도로 크게 다툰 걸 봐서는 진즉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었고, 도중에 일이 틀어진 것일 게 분명했다.
‘아마도 비마질다라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려 했겠지.’
그것이 연우의 심기를 적잖이 언짢게 만들었다.
비록 경계의 거주자는 자신에 대한 충성을 미뤘지만, 어쨌거나 그가 품은 ‘밤’의 일원이었다. 언젠가 권속이 될 자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이거 발가벗겨진 것처럼 다 들켜 버리니 조금 부끄러운데.”
오케아노스는 민망했던지 검지로 콧잔등을 긁었다.
그러면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것은 그가 원래 알려진 대로 자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그만큼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겨 온 가면이기 때문인 걸까?
“그런데 조카님이 이 백부에게 이리 관심이 있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어떤가? 담소라도 잠깐 나누는 것은.”
“관심 없어.”
“조카님이 많이 바쁘시다는 것은 알고 있다네. 이 백부에게 불만이 아주 많다는 것도. 하지만 아주 잠깐이면 될……!”
“그러니까 말했잖나. 그럴 필요 없다고.”
연우가 피식 웃으면서 입꼬리를 차갑게 말아 올렸다.
“어차피 연옥로에다 처박아 버리면 알아서 술술 불 텐데 귀찮게 왜?”
「흐! 역시 우리 주인님. 상대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인성이 참 대단하쥬?」
간만에 샤논이 히죽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연우는 전혀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파아앗!
[‘축지’를 전개하였습니다!]
연우가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어느새 오케아노스의 뒤편을 점하면서 검결지를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한데 모은 검지와 중지에서부터 삐죽 솟은 그림자는 아주 날카로웠다.
그동안 연우가 크로노스와 합일을 이루면서 분석했던 스퀴테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임시로 만든 칼이었지만.
칠흑을 토대로 만들고, 연우의 권능이 상당수 부여된 만큼 실제 스퀴테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날카로운 절삭력을 자랑했다.
까아앙!
하지만 오케아노스는 비마질다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 절대 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주 쉽게 몸을 측면으로 틀면서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파동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뻗쳐 나갔고.
[인스턴스 던전,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아노스가 구축한 심상 세계가 활짝 열리면서 주변 배경이 뒤집혔다.
육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끝도 없이 푸른 물결이 이어지는 바다가 나타났다.
오케아노스가 원래 갖고 있는 신위는 ‘바다’. 정확하게는 ‘원시(原始)의 바다’였다. 모든 신적인 존재와 피조물들의 근원이 잠들어 있는 바다.
“이런. 아무리 내가 싫다고 해도 두어 마디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너무 각박한 것 아닌가?”
“말했지?”
연우는 검결지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연옥로에 처박히고 난 뒤에 하라고.”
[검붉은 구비타라]
연우는 잇달아 공세를 퍼부었다. 검결지를 휘두를 때마다 검뢰가 연거푸 떨어졌다.
원래대로라면 팔극(八極)에서 끝났어야 할 검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면서 곱절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구극(九極), 십극(十極), 십일극(十一極)…….
십극만 하더라도 기존 검뢰의 1,024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검뢰를 그어 댔다.
웬만한 은하 따윈 그냥 송두리째 잡아먹을 힘은 심상 세계를 이루고 있던 바닷물을 금세 말려 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결계의 내벽이며 외벽까지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뇌기가 튀어 오르면서 그을음을 남기고, 균열을 따라 충격파가 더해지면서 더 크게 벌어졌다.
그만큼 폭압적인 힘을 연거푸 전개하는 건, 폴리모프를 유지해야 하는 연우로서도 상당히 부담 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는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집행자로서의 운명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종말이 빨라집니다!]
[아마겟돈이 예정되었던 시기보다 훨씬 앞서 전개됩니다!]
……
[‘굴레’가 빨리 감깁니다!]
[‘꿈’이 빨리 저물어 갑니다!]
그만큼 인과율을 소모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더군다나 비마질다라에게서 검붉은 구비타라를 선물받으면서 검뢰는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변했고, 육체도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되면서 격이 한껏 높아져 이 정도는 괜찮았다.
물론, 과부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연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놈을 물리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테니까.
콰쾅! 콰콰콰-
쿠르르릉!
퍼퍼퍼펑-
그리고 검뢰가 번뜩일 때마다, 오케아노스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훨씬 강하군…… 이럼 큰일인데……?”
그때마다 오케아노스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이건, 단순히 경계의 거주자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다 낫질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는 식의 변명이 절대 통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그 역시 강하다고 자부했고, 이블케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을 거란 자부심이 있었건만.
이건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물론, 그런 오케아노스의 허탈함을 이해할 연우가 아니었고.
콰르르릉!
결국 오케아노스는 한계치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인스턴스 던전, ‘망망대해’의 내구도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오케아노스’라 명명된 대상의 격이 흔들립니다!]
[신화가 부서집니다.]
[파편이 쏟아집니다.]
심상 세계가 무너지는 만큼, 결국 오케아노스의 존재를 이루고 있던 신화도 조금씩 부서지면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천안통이 신화의 파편을 회수합니다.]
[천이통이 신화의 파편을 분석합니다.]
연우는 그 속에서 오케아노스가 품은 과거를 어느 정도 읽어 들일 수 있었다.
* * *
어느 파편에서.
오케아노스는 어린아이였다.
“우리 첫째는 참 아이답지 않군. 맏이라 그런가? 욕심도 없고, 떼를 쓰지도 않고.”
“얼마나 의젓한지 몰라요.”
오케아노스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여느 아이들처럼 울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았다. 마치 세상사를 초월이라도 한 듯한 모습에 다들 애늙은이가 따로 없다고 말했지만, 그러면서도 차기 올림포스를 이끌 진정한 왕재(王才)라며 칭찬했다.
하지만 오케아노스에게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었다.
‘전생(前生)을 기억하는 건가?’
정확하게는 이전 ‘꿈’에 대한 기억이라고 봐야 했다.
지금은 완전히 없던 사실이 되어 버린 지난 ‘꿈’에서 살던 오케아노스라는 존재의 기억이, 어린 오케아노스에게 남아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한동안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연우가 만났던 다른 ‘꿈’의 토르가 이번 ‘꿈’의 토르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였듯이, 이전 ‘꿈’의 오케아노스도 현재의 오케아노스와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오케아노스는 새롭게 태어나고 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의젓하다고 말하던 모습도, 사실 이 세계에 별다른 정을 주지 못해서였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갈 턱이 있을까. 그가 기억하는 사실은 전부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기억하고 있는 인물 들조차 전혀 다른 얼굴과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어린 오케아노스는 못내 괴롭기만 했다.
하지만 오케아노스의 괴로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자랄수록, 그의 무의식 한 편에서부터 새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역시나 오케아노스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실은 각각 별개의 인물이었던 자들.
어떤 오케아노스는 말도 못 할 만큼 악당이었지만, 또 어떤 오케아노스는 대적자의 운명을 살기도 했었다. ‘꿈’의 종말을 직접 봤던 오케아노스도 있었고, ‘꿈’과 ‘굴레’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갖고 있지 않은 오케아노스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모든 오케아노스의 기억이 어린 오케아노스에게 깃들었다는 점이었고, 이들은 저마다 다른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어린 오케아노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철이 들고 빠르게 강해졌으면서도, 은둔적인 성격을 띤 것이 전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어린 오케아노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걸까? 분명히 전부 사라진 사실들인데…… 왜 그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서 나에게 전해진 거지?”
영혼이라도 같다면 또 모를까, 다른 오케아노스와 그는 영혼도 전혀 달랐다. 별개의 인격이며 존재란 뜻이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이 지긋지긋한 ‘꿈’을 그만 꾸게 해 달라는…… 그런 뜻일까?”
따지자면 운명론에 가까웠지만.
오케아노스는 더 이상 허망하게 ‘꿈’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머릿속에 잠들어 있는 다른 오케아노스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겪었던 삶을 직접 들어 보고, 그들의 생각을 공유하고자 했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들이 있으니, 그것들을 잘 조합해 본다면 어떻게든 길이 보이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오케아노스는 ‘꿈’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집행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칠흑왕의 눈을 가려야만 한다는 것.
하지만 종말이라는 것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타이밍을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어떤 ‘꿈’은 제대로 된 문명이 태동하기도 전에 사라졌을 만큼 너무 빨리 끝났고, 또 어떤 ‘꿈’은 우주가 모든 법칙을 잃고 쇠락했을 때 즈음에야 겨우 끝나기도 했었으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하고 의견을 구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올림포스가 ‘낮’의 진영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단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 우라노스에게라도 상담을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그러자고 마음을 먹었을 때, 만나게 되었다.
“네 새로운 동생이다. 인사 나누려무나.”
아주 어린 크로노스를.
그리고 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아이가 종말의 신호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