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려의 조각 (9)
오케아노스는 이미 대적자로서의 기억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크로노스에게서 짙은 칠흑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죽여야 하나?
아니면 그냥 지켜봐야 하나?
크로노스는 칠흑왕의 냄새가 짙게 묻어날지언정 절대 집행자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직’ 집행자가 아니었다.
원래 집행자라는 것은 여러 후보를 두고 보다가, 갑자기 쥐여 주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가장 편한 것은 후보가 될 만한 이들을 보이는 족족 미리 제거해 두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종말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천마는 ‘굴레’라고 부르는 이 세계의 법칙은 아무리 제동을 걸려고 해도 계속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형?”
자신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에.
오케아노스는 차마 그런 눈망울을 보면서 못된 짓을 저지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칠흑의 냄새가 풍긴다고 해서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내가 집행자와 다를 게 뭐가 있는 거지?”
그런 고민도 있었다.
크로노스는 아직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게 아니다. 정확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 일단 지켜보자.
오케아노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때부터 멀리서 크로노스를 가만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버지 우라노스에게 하려던 사정 설명은 일단 잠시 접어 둔 상태였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최대한 조용하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크로노스가 전혀 조용하질 못하다는 점이었지만.
“아하하하!”
“와, 왕자님! 제발 그만하십시오! 그러시면 정말 위험합니다아!”
어렸을 때부터 사고뭉치였던 크로노스는 점차 자라면서 더 큰 사고뭉치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심했던지, 오죽하면 오케아노스가 ‘저거 혹시 사고 치다가 종말을 앞당기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였을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이런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것은, 사실 저런 아이들도 웃고 떠들 수 있는 맘 편한 세계를 만들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여러 우주를 전전하면서 칠흑의 냄새를 풍기는 수많은 후보들을 만나 보았고, 그들과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은 더더욱 커지게 되었다.
집행자가 되는 것은 세상을 종말로, 혹은 파멸로 이끌 만큼 커다란 한을 품었을 때이니.
그 한을 풀어 줄 수만 있다면 근본적으로 종말이 찾아올 일은 없지 않을까?
거기서 오케아노스는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마치 계시라도 내려온 것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신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효효효! 그 한을 만약 대적자가 품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때 만나게 되었다. 이블케를.
* * *
“……이런 식으로 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오케아노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흩어지는 신화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부서진 신화 대부분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다른’ 오케아노스의 것들이긴 했지만, 연우는 유독 그중에서도 그의 영혼을 구성하는 신화들을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냉소적인 쪽에 더 가까웠다.
“결국 도망쳤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말하는군.”
“……뭐?”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블케가 만들려고 한다는 피안인지 뭔지, 결국 세상에서 낙오된 찐따 새끼들이 자기들이 도망칠 만한 토끼 굴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나?”
“그게 무슨!”
“내게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공감하고, 함께 손이라도 거들어 줄 줄 알았나 보지? 그건 좀 기분 나쁜데?”
연우는 코웃음을 쳤다.
“나도 너희들처럼 똑같은 찐따라고 생각했다는 것 아닌가?”
「와우! 우리 주인님, 독설 아주 심해지셨네. 그만해. 그렇게 후드려 패다가 진짜 찐따 새끼 울겠다.」
샤논이 낄낄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말리는 듯하지만 오히려 오케아노스를 놀리는 웃음소리.
오케아노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희들이 무슨 사연을 품었고, 어떤 사정이 있고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이것만큼은 잘 알겠어.”
연우는 자신이 엿보았던 신화의 뒤 내용이 무엇인지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구구절절한 자기 사연을 늘어놓으면서 이 ‘꿈’의 종말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차라리 그런 수고를 덜어서 새로운 피안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나. 거기서는 신과 악마도, 천마와 칠흑왕도 없으니 더 이상 종말 걱정 없이 살아도 된다. 뭐, 그딴 말들을 하지 않았을까?
오케아노스는 혹했을 테고.
만약 당시에 거절했더라도, 결국 자신이 하려는 일에 한계를 느끼고서 가담했을 테고.
저들이 ‘형제’라고 부르는 집단은 결국 그런 식으로 이블케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찐따’ 어벤저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뭘…… 알겠다는 거냐?”
“너희들에게 자격 따윈 없다는 것.”
연우는 검결지를 아래로 내렸다.
방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심상 세계를 터뜨릴 것처럼 굴던 검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비마질다라도 불쌍하군.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에게 당하고 만 거였으니까. 차라리 영혼까지 사라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만약 저승에서 이딴 몰골을 보았더라면 흑역사라고 땅바닥을 치며 부끄러워했을 테니.
“비마질다라와의 약속 때문에 여태 참았지만. 이제는 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군. 그래도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고 있길래 좀 그럴듯한 뭔가가 있을 줄 알았더니. 쯧!”
“넌……!”
오케아노스는 여태껏 자신이 고민하고 판단 내렸던 모든 것들이 단번에 부정당하자,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저 마음, 다 이해하지. 아무리 해탈한 성인군자라도 우리 주인 님하고 두어 마디 대화 나누다 보면 꼭지가 돌아 버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오케아노스의 육체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죽더라도 연우에게 발악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에 손을 펼쳐 권능을 풀어냈다.
하지만.
“케르눈노스.”
콰르르릉!
[‘케르눈노스’가 강림합니다!]
[심상 세계, ‘망망대해’와 외부 간에 균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 오케아노스 앞으로 벼락이 내려치더니, 그대로 그의 권능을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튕겨 냈다.
더벅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깡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기질이 강하게 드러나는 신이었다.
[케르눈노스가 ‘오케아노스’라 명명된 대상에게 살기를 피웁니다!]
“아까 전부터 여기에 들어오고 싶어 죽으려 했지? 난 더 이상 손 섞기 싫으니까 그쪽이 알아서 해.”
[케르눈노스가 ‘오케아노스’라 명명된 대상에게 선전 포고를 합니다!]
[공세가 이어집니다!]
케르눈노스는 연우에게 별다른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몸을 날렸다.
케르눈노스는 오랫동안 비마질다라와 인연을 맺어 왔던 존재. 연우에게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서로 간에 우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비마질다라가 오케아노스에게 인형처럼 부려지다 죽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고.
연우가 녀석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도 같이 참전하고자 몇 번이나 연우에게 시그널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연우는 원체 자신이 점찍은 먹잇감을 남들에게 나눠 주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를 계속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제 녀석과 손을 섞기도 싫어질 만큼 짜증이 나, 그제야 케르눈노스를 부른 것이다.
「다른 신들이었으면 자길 무시하냐고 길길이 날뛸 것을, 저 신은 별말 없이 오히려 고맙다고만 하네. 그동안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주 좋은 호구였잖어?」
샤논은 그림자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면서 실실 웃어 댔다.
연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녀석을 내려다봐야만 했다.
“여기 있어도 되나?”
밖에서 다른 권속들과 같이 안 싸우냐는 질문이었지만.
「다른 놈들도 많은데, 뭐.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거 있겠어? 오히려 나 같은 충신이 자리를 지켜야 우리 주인님 마지막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배웅해 드릴 수 있지.」
“누가 들으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군.”
「흐흐. 크게 다르진 않잖아?」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도 원래 주인님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동안 너무 진지하고 우울해 보여서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연우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렇게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샤논의 목소리에 담긴 걱정과 안도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
어차피 오케아노스는 케르눈노스가 제거할 테니, 그는 마저 가던 길을 갈 셈이었다.
그런 연우를 보면서 샤논이 외쳤다.
「인성이! 인성이 다시 폭발하러 간다!」
* * *
[‘낮(에로스)’의 태양이 내려옵니다!]
차정우가 녹턴 등과 함께 려의 무덤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게 된 것은 ‘밤’에 의해 잠식되어 허우적대고 있는 절교와 짐승들이었다.
“우리 형, 아주 단단히 깽판을 쳐 놨네.”
[집행자의 운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연우가 더 이상 인과율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보고 부랴부랴 넘어온 것이긴 한데.
아무래도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대지에서는 칠흑이 아지랑이처럼 너풀너풀 피어오르면서 한창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었으니까.
“……왔군.”
그때, 이랑진군은 차정우를 뒤늦게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를 비롯한 천교의 신들은 행여 저기에 휘말렸다간 같이 ‘밤’에 잠식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모두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있었다.
차정우는 이랑진군을 보자마자 다른 말 없이 스퀴테를 겨누었다.
“한판 붙으실?”
“……너희 형제들은 일단 사람을 만나면 협박부터 하고 보는 게 특징인가?”
이랑진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차정우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확하게는 적일지 모르는 사람이 대상이지. 그쪽한테서 형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는데. 당연한 거 아냐?”
“하! 정말이지…… 신왕 크로노스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어.”
이랑진군의 한숨 소리에 크로노스가 재빨리 모습을 비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거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와!』
“그럼 아니란 말인가?”
『당연하지! 내가 소싯적에 좀 많이 활동적이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녔……!』
“썰을 풀자면 오늘 하루 가지고도 부족할 것 같은데. 괜찮소?”
『……윽!』
크로노스가 한순간 아무 답변도 하지 못하고 주춤 물러섰다.
“대체 다들 무슨 말들을 하는 겁니까. 꼰대들처럼 옛날이야기는 그만하시고.”
“……꼰대라니. 그건 좀 불쾌한데.”
『야! 이 아버지가 그래도 저기 있는 놈보단 어리거든? 싸잡아서 취급하지 마라.』
“우릴 막을 건가? 그것부터 확실하게 말해.”
차정우는 반발하는 아버지의 외침을 그냥 무시하고, 이랑진군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랑진군은 양손을 높이 들었다.
“그럴 리가. 가족 다툼에 굳이 끼어들 생각은 없다. 그동안 사왕과 관계를 맺긴 했지만, 애당초 따지자면 우리 사회는 ‘낮’에 속하는 편이고.”
“뒤통수치면, 알지?”
“……알았으니까, 협박 좀 그만 했으면 하는데.”
이랑진군은 차정우가 일부러 자신의 속을 살살 긁어 대도 절대 덤빌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연우가 적들에게 하고 다니던 패악질을 이때껏 옆에서 보고 다녔는데, 굳이 그들의 적이 되어서 그 꼴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은가?
차정우도 그럼 되었다는 듯 그냥 천교를 지나쳤다. 한순간, 녹턴과 이랑진군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둘은 서로 간에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탁!
그렇게 려의 무덤 앞에 착지했을 때.
차정우는 새로운 인물들을 볼 수 있었다.
“네가 차정우란 놈이냐? 쌍둥이라더니 확실히 생김새는 똑같군. 아주 둘 다 못생겼어.”
차정우는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용마안을 통해 두 사람이 손오공과 케르눈노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들유들하게 웃는 쪽이 손오공. 말없이 앉아 있는 쪽이 케르눈노스.
순간 크로노스가 케르눈노스를 보면서 살짝 눈가를 파르르 떨었으나, 차정우는 미처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도 제가 형보단 잘생겼죠.”
“쌍둥이가 무슨 차이가 있어?”
“있죠. 같은 영혼을 공유하고도 손오공보다 천마가 더 잘생겼던데요.”
[천마가 옳은 소리를 한다면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순간, 손오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본 적도 없잖아?”
“안 봐도 척 하면 척이죠.”
[천마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두 번 끄덕입니다.]
“이 새끼들이…….”
손오공은 연우와 똑같은 짓을 벌이는 차정우와 이쪽을 가만히 보면서 히죽대고 있을 천마의 시선을 보면서 짜증을 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더 잘생긴 걸로 하자.”
“하자가 아니라 그게 사실이긴 합니다만…… 뭐, 일단 넘어가도록 하죠.”
“그래그래. 네 똥 굵다.”
“두 분은 형과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희를 막을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럼요?”
손오공은 피식 웃으면서 옆으로 물러나 려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안내해 주려고. 네 형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