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76화 (32권) (776/862)

32권

1화. 차연우 (1)

[‘려의 무덤’에 입장했습니다.]

[이곳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 및 연결이 일절 단절됩니다.]

[방호벽이 해체됩니다.]

[가호가 해제됩니다.]

[축복이 해제됩니다.]

……

[새로운 환경이 제공됩니다.]

……

츠츠츠-

연우는 려의 동굴에 입장한 순간부터 자신의 육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같잖은 짓인가 싶어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시스템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존재가 부정됩니다.]

[존재가 부정됩니다.]

연우는 그런 자신의 시도조차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스템의 모든 기능을 발아래에 두는 그였지만, 이전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꿈’을 직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던 그였지만, 여기서는 그런 모든 것들이 통하질 않았다.

지금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폴리모프는 물론, 그 너머에 있을 본체인 거마신룡이며 칠흑왕과의 연결 고리까지, 모조리 끊어지면서 ‘차연우’라는 존재만이 남고 있었다.

‘이건 좀 기분이 더러운데.’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연우는 아주 잠깐 고민 끝에 적당한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해체(解體).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칠흑왕의 대체 자아라는 사실도.

용왕이라는 사실도.

거인들의 신이라는 사실도.

올림포스의 수장이라는 사실도.

사왕.

영왕.

독식자.

탑에 입장했을 때의 모습까지…….

마치 옷을 한 겹 한 겹 벗는 것처럼.

여태껏 그가 지나왔고, 그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신화들이 툭툭 떨어지면서 싹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격도 저절로 자취를 감추고, 신성도 홀연히 사라졌다.

대신에 여기에 남은 건.

‘탑에 입장하기 전의 나…… 로군.’

연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잘한 상처와 화상이 남아 있는 손.

신이 되고 나서 육체의 재구성이 일어나 말끔히 사라졌었던 상처들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미친개처럼 뛰어다니던 시절에 입었던 상처들.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닌…… 가.’

그러다 연우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카인’으로서의 신화도 툭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키도 한 뼘 작아진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도 그가 즐겨 입던 검은 코트가 아니었다.

흰 셔츠와 스트라이프 바지.

교복이었다.

연우는 그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거울을 볼 수 없어도,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은 아주 어리고 앳된 얼굴을 지니고 있으리란 걸.

고3. 동생이 실종되고 어머니가 많이 아프던 시절, 방황만 일삼아야 했던 어린 연우가 그곳에 있었다.

‘갑갑하군.’

무력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몸이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온 우주를 뒤덮던 감각과 인지도 전부 사라진 상태.

누군가 손으로 목을 옥죄는 것처럼 너무 갑갑하기만 했다.

여러 우주와 세계를 넘나들던 신들이 천계라는 한정된 공간에 처음 갇혔을 때 느낌이 이랬을까?

마치 감옥에라도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그때.

화아악!

눈앞으로 동굴이 나타났다.

꼬불꼬불한 형태로 길게 나 있는 굴.

수도 없이 많은 다른 굴로 연결되어 있어 마치 개미집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힘도 전부 앗아 가고, 이상한 동굴에 떨어뜨려 놓고서는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그런 연우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해 주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띠링!

[히든 퀘스트(단 하나의 나)가 생성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 단 하나의 나]

설명: 당신이 현재 들어온 ‘려의 무덤’은 아주 오래전, 태초의 태초에서부터 전해지던 비밀 장소입니다. 본격적으로 ‘굴레’가 굴러가기 전, ‘꿈’이 시작되기 전에 처음으로 ‘빛’을 만들어 냈던 존재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귀소됩니다. 조금 전에 입장한 당신도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이상함을 느끼거나 억울해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여태껏 꾸역꾸역 힘겹게 쌓아 올린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리고 모처럼 이런 기회를 맞은 만큼, 마음의 평안을 가지면서 지난날에 대해 한번 추억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제한 시간: -

제한 조건: ‘려의 무덤’ 입장자.

달성 조건:

1. 이곳에는 당신과 당신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있습니다.

2. 그들을 처치하든 아니면 함께 손을 잡든, 연합하십시오.

3. 미로를 무사히 탈출하십시오.

보상: ???

이게 무슨 참신한 헛소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던 도중.

“이봐, 학생.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나?”

갑자기 뒤편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 아니, 학생인 자신보다 대략 몇 살 더 나이를 먹었을 것 같은 또 다른 자신이 서 있었으니까.

빡빡 깎은 머리에 군복까지. 누가 봐도 ‘카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자신이 분명했다.

‘이딴 스테이지 미션을 고안한 게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고약한 취미로군.’

하지만 여기 있는 연우와 다르게, 군인 연우는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여기 있는 연우가 어린 시절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뒤에 대한 기억은 없나? ‘군인’으로서의 정체성만 가지고 있는 거군.’

아무래도 입장했을 때 떨어져 나간 신화 중 일부가 뭉쳐져서 다른 인격체를 형성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연우는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잘 알 것 같았다.

“아, 아저씨…… 여긴 대체 어디죠?”

연우는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참 앳되어서 낯설다 싶으면서도, 지레 겁을 잔뜩 먹은 척하면서 몸을 덜덜 떨었다.

고3인 자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생각에서 내린 판단이었다.

‘어차피 여기서는 내가 제일 약체다.’

군인 연우와 부딪칠 생각은 절대 하지도 않았다.

이때도 싸움을 좀 하긴 했었다지만, 결국 그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 주먹을 쓰는 수준이었을 뿐.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고 특수 부대까지 이끌던 군인 연우를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만약 예상대로 떨어져 나갔던 신화들이 저들끼리 다른 정체성을 갖췄다면, 여기서 아무 힘도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포지셔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약자들끼리 뭉쳐야 할 판이니.

‘추억을 가져 보라더니. 이딴 걸 말하는 거였나.’

연우는 퀘스트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리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다 눈을 진지하게 빛냈다.

‘다행히 군인 시절의 나는 미친개이긴 했어도, 어린 민간인까지 건드렸을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민간인은 철저하게 보호하려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상부와 많은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민간에 숨어 있던 테러리스트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많이 받았었다.

그래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 건, 사라진 동생과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군인 연우는 어린 연우를 여전히 조금씩 경계하면서도, 두려워 하는 그에게 다가와 어떻게든 달래 주려 했다.

“너무 걱정 마, 학생. 대체 누가 우리를 이런 곳으로 납치했는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군인 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던 야상까지 벗어서 건네주었다.

“동굴 바람이 많이 쌀쌀하지? 일단 이거라도 입고 있어.”

“고, 고맙습니다.”

연우는 조심스레 그가 건네는 옷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일단 이 녀석은 우리가 납치된 걸로 파악하고 있나.’

아니, 어쩌면 일종의 기만책일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잘못된 정보를 던져서 반응을 확인하는 건, 이미 이때부터 있었던 습관이었으니까.

타인에 대한 철저한 불신.

아마 그것이 이때에 가졌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아저씨라도 만나서 다행이에요. 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연우는 군인 연우가 던진 미끼를 전혀 모른 척 넘기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학생, 여기에만 계속 있을 게 아니라 같이 출구부터 찾아보자.”

“예? 예!”

연우는 당황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군인 연우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파악했던 것처럼.

동굴은 개미굴처럼 아주 복잡해 보였다.

다행히 굴만 길게 파여 있을 뿐, 다른 함정은 특별히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학생은 혹시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한 기억 같은 건 없나?”

군인 연우는 주변을 경계하는 듯 두리번거리면서도, 힐끔힐끔 연우를 곁눈질해 댔다.

그의 손이 뒤쪽 혁대에도 슬쩍 걸쳐지는 것을 연우는 놓치지 않았다.

여차하면 바로 저기 있는 대검(帶劍)부터 뽑아 들려는 거겠지.

“모르겠어요. 친구들이랑 놀다가 PC방에서 나왔고…… 갑자기 어지럽더니 이곳에 있었어요. 아저씨는요?”

“나? 나는 보다시피 군인이라. 그냥 훈련만 받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여기 있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거짓말하는군.’

연우는 이미 군인 연우가 어깨에 달고 있는 견장을 본 상태였다.

UN 다국적군에게만 주어지는 마크.

녀석은 아프리카에 있었던 ‘카인’이 분명했다.

정체도 모르고, 얼굴도 똑같이 생긴 고등학생에게 진실을 말해 줄 생각 따윈 없다는 뜻이겠지.

‘그럼 나도 미끼를 한번 던져 볼까.’

“아저씨도 모르는 거군요. 하…… 엄마 보고 싶다.”

연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울먹였다.

순간, 군인 연우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니가 계시나?”

“네. 그런데…… 사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세요.”

군인 연우의 눈빛이 다시 달라졌다.

‘걸렸군.’

“그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나도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거든. 혹시 공통분모가 있나 싶어서.”

“저도 잘 몰라요.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공부를 잘 못해서 알아듣지 못했어요. 무슨 발견되지 않은 불치병이라나…….”

“어쩌면 그건지도 모르겠다.”

연우가 고개를 슬쩍 들어 군인 연우를 바라봤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어머니도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던 병을 앓고 계셨었어. 어쩌면 그거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납치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보통 불치병은 유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크게 보고되지 않은 병이라면 유전자 보유자들을 모아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려 할 수도 있겠지.”

“그, 그런 건 여, 영화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요?”

“세상에 돈 많고 미친놈들은 아주 많으니까. 그중에 우리 어머니들과 비슷한 병을 앓게 된 사람이 있다면 무슨 수작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그, 그, 그런……!”

“게다가 학생과 나,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 맞아요!”

“이것도 끼워 맞추기일지 모르지만, 그런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

연우는 군인 연우의 그럴듯한 논리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 헛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야만 했다.

‘잘도 이상한 곳으로 유도하는데.’

으레 이 나이대의 고등학생들이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럴듯한 포장으로 속이기가 쉽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어리숙한 이미지는 충분히 심어 둔 것 같으니. 경계도 조금 풀렸고. 이제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계속 그에게 의지하는 뉘앙스를 풍겼더니, 군인 연우의 눈빛도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일말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 듯했지만.

그렇게 둘이서 얼마나 움직였을까?

‘다른 차연우도 슬슬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나?’

감각이 둔해져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으니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잠깐 멈춰.”

연우는 군인 연우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뚝 멈췄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모퉁이 뒤에 거대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영왕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사왕……? 신격이 된 자신이 있다면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하고 당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잠깐 기다려. 뭐가 있는지 보고 올 테니까.”

군인 연우는 연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슬그머니 모퉁이 너머를 엿보았다.

그러고는 그답지 않게 적잖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제기랄! 저게 말이 돼? 무슨 게임도 아니고.”

연우는 잰걸음으로 다가가 군인 연우의 허락 없이 슬쩍 모퉁이 너머를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동을 가득 채운 채로…… 용 한 마리가 잠들어 있었으니까.

거마신룡.

그의 원래 본체가 미니미 사이즈가 되어 그곳에 앉아 있었다.

물론, 미니미라고 해도, 여전히 수십 미터는 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흉악한 몸집이었지만.

‘……첫 플레이 시작부터 최종 보스를 만난 기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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