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차연우 (2)
연우로서는 조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여러 신화 중에서 왜 하필 만나도 거마신룡인 건지.
아직은 되도록 신격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연우였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리 썩 달갑지 않았다.
막말로 저 녀석 혼자서 활개를 치기만 해도 나머지는 줄줄이 죽어 나갈 게 분명할 테니.
‘최대한 뒤로 빠져서 어부지리라도 취할 생각이었는데. 이를 어떡한다?’
사실 연우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신격을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영락으로 갖은 고생을 했던 여러 신격들이 들었다면 어처구니 없다고 할 소리일지 모르지만.
이미 ‘황’ 급에 다다라 봤던 그로서는 신격에 이르는 것이 이제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막말로 신화에 해당하는 업적만 세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탈각과 초월쯤은 이룰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쉽게 여긴다고 해도 실제로 시도를 하려면 그만한 시간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연우는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준비를 했다가 저들이 힘이 다 빠졌을 때 즈음 한꺼번에 전부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들의 눈에 여기 있는 자신은 별 게 느껴지지 않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할 테니. 오히려 그냥 지나치기 쉬우리라.
그래서 연우는 군인 연우에 이어 나타난 거마신룡을 보고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눈을 살짝 깜빡이기만 해도, 자신 따위는 그냥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 테니.
‘그런데…….’
그러다 연우는 수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왜 저렇게 기력이 약해 보이지?’
거마신룡의 원래 크기를 생각해 본다면, 저기 있는 녀석은 아주 작아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러면서 가진 힘도 같이 줄어들었는지, 분명히 대기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마력은 있을지언정 다른 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만 빠져 있을 뿐.
원래 연우가 아주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있는 것도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신화의 일부라면, 당연히 이런 곳에 갇힌 것에 대해 경계심을 보일 테니까.
저것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한 작전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안일해. 잠을 자고 있는 것도 죽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고. 뭐지? 왜 그런 거지?’
연우는 아주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것이 있었다.
‘거마신룡에 대한 신화만 떨어져 나가서……?’
거마신룡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데에는 아주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여러 초월종들의 인자를 흡수한 것도 있었지만, 칠흑왕의 자아로 거듭나면서 그런 인자들이 전부 융화한 것도 있었다.
여러 요소들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셈인데, 만약 추측대로 다른 연결 고리 없이 거마신룡이라는 신화만 뚝 떨어져 나간 것이라면. 저기에 있는 건 정체성이란 게 전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거마신룡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이 저렇게 현저히 약해진 것도, 의욕이 없어 보이는 것도 납득이 갔다.
‘그럼 다른 신화들도 그런 건가?’
연우는 어쩌면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고유의 신화들만 간직한 개체들. 이전의 기억 따윈 전혀 공유하지 않는 저마다 다른 정체 성을 가진 존재들이 여기 있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이번 스테이지 미션은 난이도가 더 복잡해지는 셈이었다.
‘그럼 왜 나는 고등학생인 ‘차연우’가 되었으면서도 왜 다른 기억들이 남아 있는 거지?’
문득 그런 의문도 들었지만, 연우는 자세한 건 우선 이것부터 해결하고 난 뒤에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블케 놈을 쫓으러 왔다가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군.’
웬만한 신격들도 통과할 수 있을까 싶은 난이도였으니.
아니, 이건 오히려 쌓은 신화가 더 높고 탄탄할수록 불리해질 수 밖에 없는 난이도였다.
너무 격차가 큰 신화를 상대하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어쩌면 이곳에 먼저 들어온 이블케나 우마왕, 통천교주 등이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건 그만큼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하튼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 미션을 어떻게든 통과해야 이블케를 잡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연우는 문득 군인 연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학생은 별로 놀라질 않는 것 같은데.”
이제는 대놓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우는 이번에도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놀랄 게 뭐 있어요? 저렇게 큰 인형이 왜 여기에 있는지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굳이 겁먹는 게 이상한 것 같은데.”
“인…… 형?”
“예. 예전에 저런 거 동영상으로 본 적 있어요. 니스 카니발? 뭐, 그런 거에서 대형 인형 잔뜩 들고 퍼레이드 하던데. 저것도 그런 게 아닐까요?”
“…….”
“……왜, 왜 그래요? 무섭게.”
연우는 침묵하는 군인 연우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뒤로 물러서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래도 군인 연우의 차분한 시선은 좀처럼 그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이 빌어먹을 의심병 환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방심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을 그냥 버리게 만들 수 있을까?
“너……!”
군인 연우가 뭐라고 말을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콰콰쾅!
쿠쿠쿠쿠-
별안간 동굴이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위험할 정도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면서 빛이 번쩍였다. 뜨거운 열풍마저 불어오자, 연우와 군인 연우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쏠렸다.
하나는 붉은색, 다른 하나는 검은색으로 빛나는 두 광원(光源)이 날개를 펼치면서 거마신룡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 눈이 그대로 멀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은 빛무리였지만.
연우는 그들이 각각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붉은색은 신왕, 검은색은 사왕인가?’
각각 올림포스의 주신이 된 신화와 명계의 절대자가 되었던 신화.
굳이 따지자면 신왕 쪽이 더 강하겠지만.
‘큰 차이는 없을지도.’
추측대로 신화 부분만 떨어져 나간 것이라면 사실 엄청난 무력 차는 없을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명계의 절대자가 가진 무게는 올림포스의 주신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것이었으니!
‘문제는 저 둘도 힘을 합쳐야 겨우 잡을 수 있을까 싶은 게 거마신룡이라는 거겠지만.’
연우는 직감적으로 자신과 군인 연우가 그런 것처럼, 신왕과 사왕도 먼저 만났다가 부딪치기 전에 거마신룡을 먼저 잡기로 협의하고 사냥에 나선 것으로 파악했다.
‘자신’이라면 분명히 그리했을 테니까.
‘물론, 저 동맹이 오래가진 않겠지만.’
아무리 각각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저 둘도 이 군인 연우처럼 의심병 환자일 게 분명하니 언제든 빈틈이 보인다면 서로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 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둘 모두 전력을 다해 거마신룡과 싸우려 하고 있었다.
검은 벼락이 떨어지고, 붉은 불기둥이 지면에서 치솟았다.
크르르르……!
거마신룡도 슬슬 두 신들의 공세에 짜증이 났던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면서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대기가 거칠게 울렸다. 그것만으로도 연우는 속이 뒤집힐 것 같은 현기증과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이대로 여기에 계속 붙어 있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는데.’
연우는 슬쩍 군인 연우 쪽을 곁눈질했다.
녀석은 제 딴에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려는 게 보였지만, 결국 그것이 고작이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가로 갖가지 감정이 스쳤다. 불신. 경악. 충격.
군인으로서의 기억만 갖고 있는 녀석에게 저런 광경들은 상식을 모조리 뒤집는 장면이겠지.
처음 연우도 동생이 남긴 회중시계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믿기 어려웠을 테니, 현실주의자인 군인 연우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군인 연우를 떨쳐 내기엔.
스걱!
푸화아악-
“너……?”
군인 연우는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연우가 자신의 혁대 뒤쪽에 있던 대검을 단번에 뽑아 목젖을 그어 버리자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두 신과 용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해도, 만약을 대비해 위치나 자세 전부 이쪽에 유리하게끔 잡고 있었건만.
“미안하지만 ‘경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
연우는 차갑게 웃으면서 군인 연우의 미간에다 대검을 깊숙하게 박아 버렸다.
퍽!
군인 연우가 그대로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츠츠츠-
녀석의 몸뚱이가 해체되면서 연우에게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신화, ‘카인’이 다시 합쳐졌습니다.]
동시에 연약하기만 하던 육체에도 조금씩 힘이 돌아왔으니.
‘이것만 해도 충분해.’
고등학생의 육체는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체력이 다해서 버거웠지만, 군인일 때는 전혀 달랐다.
연우는 두 신과 용을 피해 재빨리 뒤로 몸을 빼냈다.
최대한 조용히.
물론, 이런다고 해서 저들의 예민한 감각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저들이 싸움에 집중하느라 자신에게 관심도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사냥하려 한다고 해도 언제든지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길 거고.’
연우는 바쁘게 자리를 빠져나가면서 다른 굴로 이동했다.
‘이곳은 천마가 세운 탑의 스테이지 미션과 비슷한 체계로 이뤄져 있어. 그렇다면 단순히 신화를 분리해 두기만 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판을 뒤집을 만한 히든 피스들을 곳곳에 숨겨 뒀을 거야.’
그리고 연우는 그런 히든 피스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 것 같았다.
‘시원의 불.’
려의 조각에 담겨 있다는 태초의 힘이라면, 제아무리 피조물이라도 다른 신화들을 물리치기에 충분할 테니.
‘여기에 들어온 만큼, 그 불을 가질 수 있는지 자격을 증명해 보라는 거겠지.’
연우는 판단을 마치자마자, 굴의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면서 벽과 천장 등을 눈으로 빠르게 살폈다.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는 장소라면 어떤 힌트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기 중에 흐르고 있던 마력을 느끼고, 그것을 강제로 끌어와 체내에 크게 휘돌렸다.
이미 지나 봤던 길이라 그런지 마나를 감지하는 건 별반 어렵지 않았다. 마력으로 가공하고, 거기에 맞춰 마력회로를 개척하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지.
[마력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마력회로’가 개설되었습니다.]
[회로의 수가 2개로 확장되었습니다.]
[회로의 수가 3개로 확장되었습니다.]
……
휘휘휘!
마력회로가 점차 형태를 갖출수록.
연우가 입고 있던 옷이 새카맣게 물들면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근육이 크게 찢어졌다가 아물고, 골격이 틀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눈높이가 높아지고, 체내에 활력이 돌았다.
[스킬 ‘마력회로’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어 ‘아트만 시스템’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스킬 ‘용마안’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몸에는 더 이상 노폐물과 탁기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굵고 짙게 흐르는 마력만 있을 뿐
물론, 그걸로도 힘을 되찾았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연우는 더 이상 거기에서 무언가 다른 시도를 하지 않았다.
‘찾았다.’
이미 용마안을 통해 동굴을 길게 가로지르는 아주 희미한 결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뚫어져라 관찰하지 않았더라면 놓칠 수밖에 없을 틈.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거기까지.”
연우는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동작을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핵 고개를 돌린 곳에 검은 광채를 뿜어 대는 사왕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웬 쥐가 있나 했더니, 그런 걸 발견했을 줄은 생각 못 했는데.”
“…….”
연우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풍기는 기운은 심장을 바싹 조이게 만드는 사왕을 가만히 지켜봤다.
분명히 신왕과 같이 거마신룡을 잡고 있어야 할 텐데…… 벌써 사냥이 끝난 걸까?
최후의 승자는 그가 된 거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원래 사왕이 가지고 있는 기질 외에 다른 기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왕은 그런 연우의 의문 따위를 해결해 줄 생각 따윈 없는 듯, 곧장 공격을 시도해 왔고.
[스킬 ‘하늘 날개’가 생성되었습니다!]
연우는 마력을 한껏 크게 돌리면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