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차연우 (4)
의심.
경계.
연우는 공동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런 시선들을 받아야만 했다.
‘무슨 짓거리인지 모르겠군.’
벌써 30여 분째였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상대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무장 상태는 어떤지, 스킬은 무엇을 갖고 있는지, 가호와 축복이 있는지, 혹시 다른 동조자는 없는지, 신화는 어떻게 되는지, 빈틈은 없는지, 있다면 노릴 수 있는지 등…….
날카롭게 서로를 탐색하고 있는 지금, 아주 잠깐이라도 허점을 보인다면 둘이서 손을 잡고 곧장 들이칠 게 보이기 때문에, 연우는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그냥 자리를 피해도 될 테지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단 뜻이겠지.
‘귀찮은 의심병 환자 새끼들.’
연우는 자신도 똑같이 그러고 있으니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다른 신화들도 슬슬 상황 판단을 마치고 개인행동을 시작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어쩌면 신왕과 사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끼리 연합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만약 두 개 이상의 신격이 정말 제대로 손을 잡았다면, 이쪽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연우는 독식자와 영왕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건,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할 짓은 못 되는군.”
그때, 영왕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전력이 여기서 가장 우세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다고 본 거고.’
그리고 실제로도 그게 맞았다.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부위가 무엇인지 간단하게라도 소개하는 건 어떻지? 그런다면 서로가 손을 잡건, 결렬하건 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영왕의 시선이 연우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제일 약체인 것 같은 너부터 말해 보라는 뜻.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던졌다.
“플레이어. 됐나?”
꿈틀!
영왕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여기 있는 모두가 플레이어 차연우에게서 비롯되었다.
이건 노골적으로 그의 의견이 멍청한 소리라며 조롱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떠보려면 제대로 떠보든가. 너도 말하지 않는 걸 우리더러 말하라고 하면 제대로 말할 것 같나?”
영왕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지만, 연우는 도리어 콧방귀를 뀌었다.
짝!
그때, 여태 가만히 있던 독식자가 박수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신경전이든 탐색이든, 쓸데없는 데 더 이상 시간 빼지 말자고. 어쨌거나 목표는 모두 같을 테고, 그걸 이룰 때까지만 임시 연대를 하면 그걸로 끝이지 않나. 다만, 중요한 건 여기에 낄 자격이 있냐는 거지. 안 그래?”
‘저놈은 영왕과 내가 신경전이 극에 달했으니 자신에게 유리했다고 판단했겠군.’
연우는 독식자가 여기서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분명 무력은 영왕보다 뒤처질지 모르지만, 가장 의심이 많고 타인을 믿지 않았을 때가 바로 저 때였으니까.
연우는 회수했던 2개의 조각 중 한 개만 꺼내 보였다.
“여기.”
“나도 여기 있다.”
“이걸로 다 똑같이 한 개씩 갖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군. 뭐, 2개 이상 갖고 있다고 해도 밝히지는 않겠지만. 안 그래?”
독식자는 무조건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들을 슬쩍슬쩍 덧붙여 댔다.
그러면서도 중재를 하는 척하며 분위기를 자신이 주도했다.
“일단 정보를 한 가지 공유하자면, 남은 조각 중 하나는 ‘거인의 신’도 갖고 있다.”
연우와 영왕의 눈빛이 동시에 빛났다.
“확실한가?”
“어떻게 알아낸 거지?”
“영업 비밀. 나도 거의 죽다 살아났던지라.”
독식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검은 가면 아래 두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아무튼 그걸 빼앗을 때까지만 손을 잡자고 제안하고 싶은데……. 하지만 서로가 이렇게 의심을 하고 있어서야 오히려 자중지란만 일으킬 테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자고.”
독식자는 무언가를 어루만지듯, 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띠링!
[‘마나의 맹약’이 제안되었습니다!]
“조건은 거인의 신을 잡기 위한 연대. 자격은 조각 소유자 한정. 기간은 거인의 신이 숨통이 끊어지기까지. 페널티는 신화 삭제. 어때?”
연우와 영왕은 아주 잠깐 서로를 곁눈질하면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계산을 해 보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받아들였을 때, 자신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를.
그만큼 ‘신화를 삭제한다’는 페널티가 주는 무게가 아주 컸다.
그냥 바로 경쟁에서 탈락하라는 의미였으니까.
이것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마나의 맹약은 상대가 제아무리 초월을 거듭한 존재라 할지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속 박과 같았다.
“좋아.”
“하지.”
연우와 영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어차피 약체인 자신에게 어떤 악조건이 들어와도 별 차이가 없을 거란 생각에.
반대로 영왕은 그걸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을 거란 판단에.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가지면서 모두가 동의를 표했고.
“좋아.”
독식자의 엷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의 심장을 따라 무언가가 단단히 구속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의 맹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계약 당사자들의 영혼을 서로 엮고 있습니다. 맹약을 어길 시, 제시된 페널티대로 처벌이 집행됩니다.]
[또한, 기존 처벌과 별도로 마나에 대한 불신이 영혼에 새겨지게 되니 유의하십시오.]
마나에 대한 불신은 마나 스트림으로의 접근 권한이 박탈된다는 뜻이다.
경지가 높은 존재일수록 치명타로 작동할 수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그럼 거인의 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지.”
독식자는 가면을 고쳐 쓰면서 자신이 파악했던 정보들을 하나 하나씩 늘어놓았다.
* * *
거인의 신은 눈을 뜨자마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왜 기억이 나질 않는 거지? 아니, 있기나 했었나?’
분명 있기는 했을 것이다.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이란 형태로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거세되고 없었다.
마치 너의 정체성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모든 거인들의 신이라는 신화로도 충분하다며, 앞으로 이렇게 살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거인의 신은 싫었다.
‘감히 누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말한단 말인가!’
거인의 본질은 투쟁(鬪爭).
그 때문에 신이고 악마고 간에 거인족과 직접 부딪치기를 꺼려 했다. 그들은 싸움에 미친 나머지 너무 흥분을 하면 동족끼리도 내분을 밥 먹듯이 하는 미친 작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투쟁은 외부로만 발산되는 게 아니었다. 내부로도 화살이 돌려질 때가 있었다.
바로 스스로에게.
지금 거인의 신이 겪는 투쟁이 그러했다.
그가 현재 갖고 있는 투쟁이라는 신화는 억압과 구속에 대한 투쟁이었고, 이름이 없다는 상황은 바로 그런 억압과 구속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신도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다.’
거인의 신은 망자 거인들이 자신을 보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발데비히라고 했던가? 제사장이었던 자는 부디 자신들의 구원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고, 자신은 필시 그러겠노라고 대답하였다.
거인족이 아주 오래전에 떠났던 행성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거인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반드시 세상을 바꿔 달라고 간청했고, 자신은 그래 주겠다고 화답했다.
이토록 많은 신도들이 구원을 바라고 있을진대, 어찌 신이 되어 그것을 모른 체 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그때부터 거인의 신은 눈을 뜬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서 어떻게든 결여된 부분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자신을 찾지도 못했는데 신도들을 구원하는 대사까지 추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계속 깊게 파고들다 보면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움직이는 건 그 뒤에 해도 상관없었다.
조각이 바로 자신의 발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건 기물(奇物)이다. 취하게 되면 되레 내가 휘둘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다른 놈들에게 순순히 내어 줄 이유도 없겠지.’
그러던 그때, 거인 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또 귀찮은 놈이 찾아왔군.’
조각의 냄새를 맡고 찾아왔던 놈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귀찮았던 놈이 있었다.
바로 그놈이 다시 온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무리까지 끌고서.
착!
발소리가 크게 들리자, 거인의 신도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가부좌를 튼 그대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저 멀리 공동 입구에 서 있는 독식자를 바라봤다.
“이것은 기물이니라. 그대에게 필요한 게 아니란 뜻이지. 그런데도 다시 왔는가?”
“필요하고 말고는 내가 정한다고 말했을 텐데.”
독식자는 허리띠 뒤쪽에서 두 개의 단검을 꺼내더니 각각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파앗-
거인의 신에게로 몸을 날렸다.
[‘거인의 신’에 대한 레이드가 시작됩니다!]
[현재 파티 참여자: 3명]
“여전히 무모하군.”
거인의 신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옆에는 아주 기다란 뼈칼이 꽂혀 있었다.
무기가 없기에 자신의 늑골을 직접 뽑아서 갈아 만든 무기였다.
덕분에 지금 그에게는 늑골이 하나 부족했지만, 이 정도 통증은 크게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신력을 받쳐 주려면 신체의 일부를 쓰는 것이 가장 좋았다.
콰아아앙!
거인의 신은 거칠게 일격을 내리쳤다.
웬만한 피조물은 풍압만으로도 찢어 버릴 수 있는 위력.
거인의 신은 독식자가 이것을 정면에서 부딪쳐서는 절대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쩌어엉!
“흐음?”
독식자가 교차시킨 단검이 뼈칼을 정면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힘에서 밀리고는 있었지만, 독식자는 분명히 그의 공격을 막아서고 있었다.
거인의 신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뼈칼을 연속으로 휘둘러 댔고, 독식자는 그럴 때마다 기이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공격을 일일이 쳐 내고 흘리면서 반격까지 시도했다.
“그렇군! 그새 조각이라도 얻었나?”
거인의 신은 독식자를 따라 감도는 보랏빛 기운이 무엇인지 깨닫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긴 저것이 있다면 신격에 가까운 힘을 보이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에 휘둘리고 말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지만.
“금세 잃겠군.”
순간, 가면 아래 독식자의 눈동자가 차갑게 일렁였다.
“무슨 말이지?”
“말한 그대로다. 그대는 곧 기물에 홀려 기물을 잃게 될 거란 뜻이지. 비단 기물만이 아니다. 정신도 잃고, 목숨도 잃고, 신화도 잃겠지.”
“헛소……!”
“헛소리가 아니니라. 자신의 이름도 몰라 스스로를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작자가 기이한 힘을 얻는다 한들, 그걸 제대로 활용할 수나 있겠느냐?”
거인의 신은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설마 다른 신화들이 멍청해서 여태 조각을 회수하지 않았던 걸까?”
“……!”
“극도로 힘만 추구하는 걸 보니, 주변에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나 보군. 동료라 할 만한 것도, 연인도, 친구도…… 전부. 힘만이 그대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정체성인가 보지?”
“……시끄러!”
콰아아앙!
독식자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횡으로 거칠게 뿌렸다. 마력이 폭발하면서 시야를 가렸지만, 거인의 신은 여태 단 한 발자국도 제자리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쐐애액-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는 또다른 공격이 있었다.
“허튼짓일 텐데.”
거인의 신은 옆에 하나 더 세워 두었던 뼈칼을 왼손으로 뽑으면서 그쪽으로 돌렸다.
차아아앙!
영왕의 비그리드가 뼈칼에 걸렸다.
“쳇.”
영왕은 혀를 차면서 연속으로 비그리드를 휘둘렀다. 극한에 다다른 팔극검이 연속으로 펼쳐지고, 독식자가 반대편에서 거인 신의 시선을 교란시켰다.
콰콰콰쾅!
쿠르르, 쿠르-
하지만 거인의 신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여유롭게 그들을 힘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연우가 하늘 날개를 한껏 펼치면서 공간을 열고 나타나 하체를 쓸어 왔지만.
“날파리는 몇이나 꼬여도 날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이리도 모르나?”
거인의 신은 도리어 훈계하듯이 쓴웃음을 던지면서 쥐고 있던 뼈 칼로 바닥을 후려쳤다.
그러자 해일이 일어나듯이 땅거죽이 거칠게 뒤집히면서 연우 등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쿠르르……!
“말하였지만, 나는 그대들과 드잡이질을 할 생각 따윈 없다. 뭘 노리려는 건지 모르지 않지만, 그대들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 같으니 썩 꺼져라.”
거인의 신은 멀찍이 떨어진 세 사람을 보면서 차갑게 외쳤다.
신력이 얼마나 가득 담겨 있던지, 동굴이 금세 무너질 것처럼 떨릴 정도였다.
공명정대함을 드러내면서도 당당해서, 결단코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런 거인의 신을 본 순간, 연우는 생각했다.
‘……저놈은 대체 뭐지?’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거인의 신 간에 괴리감이 너무나 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