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연우 (6)
찰칵!
연우는 마지막으로 거인 신의 신화까지 영혼 속에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순간에 몸이 부쩍 커진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잠시 잃었던 힘을 되찾은 것에 불과했지만.
어쩐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힘을 잃었었던 것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처럼 다가왔다.
그건 아마도 거인의 신이 마지막에 주고 간 여운이 짙어서겠지.
너는 그래서 인간이라던 말.
그것이 연우에게 가슴 깊이 낙인처럼 박혔던 것이다.
하지만.
‘정신은 맑아.’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깨어 있었다.
그동안 답답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에서 한순간 해방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난 인간이었지.’
연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신격을 쌓긴 했어도.
그리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많은 난관을 넘었어도.
결국 자신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부족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가족과 동료를 바라는.
그런 인간.
그러던 그때.
“이딴 짓을 잘도 저질렀군.”
연우는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를 싸늘하게 식히면서 출현하는 존재감에 몸을 반대로 돌렸다.
이미 망가졌던 육체는 재수복이 끝난 상태. 손끝에 마력이 잔뜩 응집된 오러가 맺혔다.
그곳에는 사왕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독식자의 부름에 따라 재빨리 길을 찾아왔건만.
정작 도착하고 나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지글지글 끓는 마그마밖에는 없으니.
그렇게 복잡하게 꼬여 있던 개미굴도 통째로 날아가고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큰 폭발이 있었는지…… 좀처럼 짐작이 가질 않았다.
여기 있는 동굴은 웬만한 신격들이 두들겨 대도 절대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내구도를 자랑했을 텐데.
사왕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작자가 연우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한낱 쥐새끼에 불과한 피조물이었을 텐데.
그사이에 다른 놈들을 잡아먹고 저만큼 커 버릴 줄이야.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군.”
사왕은 금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우리의 기원(起源)이었나?”
사왕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단단히 섞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부 결여가 되었는데…… 어째서 너는 그런 게 보이질 않는 거지?”
사왕은 진심으로 분개했다.
자신이나 다른 신화들도 이렇게 무작정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만약 제대로 된 기억만 갖고 있었어도. 정체성만 지녔더라도 이렇게 다른 신화를 죽여서 그걸 채우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탑에 있을 시절, 미션 때문에 수십 수백 명으로 갈라졌을 때에도 이렇게 다투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쉽게 통과했다.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만큼, 판단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수가 없으니 끝까지 자신을 찾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이름만 알았더라도…… 이런 일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사왕은 단순히 기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온전한 기억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연우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기 혹은 질투라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질투.
하지만.
“아니. 미안하지만 기원 같은 건 없어.”
연우는 단순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왕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헛소……!”
“인간이고자 하는 신화. 그것이 나였던 것 같거든.”
“……?”
사왕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연우는 더 이상 대답해 줄 이유가 없다는 듯 고요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왕은 여유롭기만 한 연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뭐, 아무래도 좋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최후의 승자가 된다면 전부 해결될 테니. 그래서 제안하겠다. 나와……!”
사왕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몸을 물려야만 했다.
콰아아앙!
연우가 다짜고짜 손끝에 맺힌 오러를 터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한 일격.
투쟁의 신위를 품고 있던 거인의 신을 삼킨 이상, 연우는 이미 사왕도 쉽사리 상대하기 힘든 강적이었다.
퍼퍼퍼펑!
사왕은 그림자를 높이 쭉 올려 그것들을 전부 옆으로 쳐 내면서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말을 하고 있는데 감히!”
“동맹 제안이라면 거절하지. 나는 뒤통수 때린 전적이 있는 놈과는 절대 손을 잡지 말자는 주의라.”
연우가 어느새 사왕 앞까지 다다르면서 검결지로 녀석의 목젖을 찔러 갔다.
순간, 사왕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걸리고 말았지만, 설득 따윈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 반격을 가하려 했다.
그림자와 오러가 다시 충돌하려던 그때.
[‘거마신룡’의 신화가 삭제되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주신’의 신화가 삭제되었습니다!]
“……!”
“……!”
연우와 사왕은 동시에 몸을 굳혀야만 했다.
뭐?
누가 죽어?
신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강자에 속할 거마신룡이……?
그렇다는 건!
한순간, 연우와 사왕의 머릿속에 똑같은 순서로 사고가 빠르게 이어졌고.
결국 동시에 똑같은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마지막 신화가 나타났다!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출현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와 함께 발밑에서부터 새카만 어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저갱처럼 너무나 짙은 어둠. 한 번 잠기고 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그것을 본 순간 연우와 사왕은 재빨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키키키킥.
먹을 거다. 먹을 거.
어서 이쪽으로 와. 나와 놀자. 나의 배 속으로 들어와서 같이 놀자.
거기서 풍기는 악의와 사념(邪念)은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아찔거리게 만드는 힘을 담고 있었다.
‘제길! 어째서 왜 아직까지 안 보이나 했더니!’
연우는 저것이 원래 집행자로서 운명을 마치고 난 뒤에 자신이 겪었어야 할 모습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연에서 무수히 많이 봤던 칠흑왕의 자아들, 마성과 똑같은 모습.
스스로를 잃어버려 칠흑왕의 부품으로만 전락하고만 마성은 하나같이 탐욕에 가득 찬 본능만 남아 있으니.
저것도 저랬다.
거마신룡과 신왕을 잡아먹은 것처럼, 연우와 사왕도 단숨에 집어 삼킬 생각으로 보였다.
‘거마신룡이 그래도 어느 정도 저항해 주지 않을까 했었는데, 무리였나?’
모든 의욕이 거세되었던 거마신룡으로선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건 대체……!”
한편, 사왕은 칠흑왕의 대체 자아에게 적잖게 당혹해하고 있었
신이면 신, 악마면 악마. 심지어 ‘황’이어도 본질적으로 뭔가가 느껴져야 하는데, 저것에서는 그런 것조차 감지할 수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그가 원래 알고 있던 마성과도 궤를 달리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벽…… 아니, 늪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사왕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의 신 등이 그러했듯, 뒤쪽에서 터진 연우의 오러가 녀석을 단숨에 휩쓸고 지나가면서 칠흑왕의 대체 자아에게 작렬했다.
콰콰콰쾅!
쿠르르르-
간지러.
간지럽다고!
이러지 말고 내 배 속으로 들어와. 다른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자!
물론, 그런 정도로는 칠흑왕의 대체 자아에게는 타격을 주기는커녕 간지러운 곳을 긁어 주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연우의 저항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더 크게 날뛰어 댔으니.
하지만 연우로서도 그걸로 녀석에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남은 신화를 흡수하고, 려의 조각을 합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사왕좌’의 신화를 회수했습니다!]
[‘세 번째 조각’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모든 조각을 회수하였습니다!]
[퀘스트를 완수하였습니다.]
……
[보상으로 ‘려의 등불’이 주어집니다.]
화아악!
연우는 자신에게서부터 황금색 배광이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광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힘이었다.
이건…….
‘천마.’
연우의 눈이 커졌다.
‘천마의 힘……!’
세상의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우주 창생을 이끌어 냈다는 진리의 빛이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고.
놀자. 나랑 놀자!
그 순간, 칠흑왕의 대체 자아가 단숨에 튀어 올라오면서 그대로 연우를 잠식했다.
꿀꺽.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 * *
키키키킥!
먹었어. 먹었다고! 전부 다 먹었어! 이제는 내가 진짜 ###야!
그런데.
그런데 뭐지? 왜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거야?
왜 아직도 내 이름을 알 수가 없는 거냐고!
수많은 사념들이 마치 파리 떼처럼 시끄럽게 왱왱 울어 댔다.
칠흑왕의 대체 자아는 적잖게 당혹해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신화였던 연우를 삼켰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으니까.
오로지 본능만 남은 녀석에게는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리고.
‘미쳐서 팔짝 뛰는군.’
연우는 칠흑왕의 대체 자아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짙은 어둠뿐.
하지만 연우에게는 이미 익숙한 장소였다. 오히려 친숙하기까지 했다. 마성들과 수도 없이 싸웠고, 결국 승리를 거듭했던 장소였으니까.
녀석은 자신을 삼키기만 하면 그대로 심연 속에 녹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오히려 이게 필요 없었겠는데.’
연우는 여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황금색 배광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려의 등불]
등급: 측정 불가
설명: 시원(始原)의 불. 태초에 첫 우주가 탄생했을 때에 일어났다는 불씨이다.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그대가 가야 할 길을 비춰 줄 것이다.
려의 등불이 왜 주어졌는지는 알 것 같았다.
수많은 신화들에 둘러싸여도 정체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재차 반격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신격들이 이걸 꺼려 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거인의 신이 말한 것처럼 신이란 오롯이 걷는 자. 길도 스스로가 개척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을려의 등불이 밝혀 준다면?
그때부터는 신격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인도를 받는 신은 더 이상 신이라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신격들은려의 조각을 회수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 했고, 피조물들은 이것을 얻어 길을 제시받고자 했다.
하지만려의 조각이 가진 힘만을 원했던 연우로서는 별 의미가 없었던 셈이었다.
그저 퀘스트를 깨는 데 필요한 도구 정도라 해야 할까?
‘아니. 려라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으니 의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닌 셈인가?’
연우는 여태껏 자신이 품었던 칠흑과는 전혀 상반되는 힘에 조금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스킬, ‘하데스의 식령검’이 생성되었습니다!]
그의 손바닥 위로 짙은 멍울이 생기면서 톱니 이빨이 활짝 열렸다.
이제 다시 밖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삼켜라.”
연우는 하데스의 식령검을 그대로 심연에다 들이받았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