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Brotherhood (2)
“아아아악! 짜증 나, 짜증 나아!”
차정우는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이를 매만지면서 억울함을 토했다.
“도와주러 오면 뭐 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주먹부터 휘두르는데! 젠장!”
그는 억울했다.
연우를 구하러 오고도 이런 꼴이라니.
이래서야 정말이지 저 사람이 소갈머리가 좁은 좀생이인지, 아니면 어디 다른 데서 주워 온 남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불만 있나?”
하지만 연우는 가만히 주먹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으니.
그에 차정우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진짜! 내가 5분만 먼저 태어났어도!”
“태어나면 뭐? 네가 형 해 먹고 나 때리게?”
“……그래도 저는 형님을 형님으로 모셨을 겁니다요, 형님!”
차정우는 여전히 가을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아른거리는 연우의 주먹을 보고 당장 꼬리를 말아야만 했다.
억울해도, 결국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이 있었다.
연우는 그런 동생의 뺀질함이 영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99층의 통과자들이 나타나는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버지와 어머니만큼은 반드시 무탈하게 나타나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아…… 내 신세야!”
차정우는 연우의 눈치를 살피다 못해 기가 죽어 지내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한 나머지 어깨를 축 늘어뜨려야만 했다.
남들은 닿지도 못할 만큼 지고한 자리에 오르면 무엇 하겠는가. 대신격들조차도 우러러보는 ‘낮(에로스)’의 수장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천적 관계는 유지 중이었다.
정말이지 이 지긋지긋한 형제의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차정우의 근심이 깊어질 무렵, 갑자기 옆에서 말없이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정우는 그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샤논이었다.
비록 얼굴은 투구에 가려져 볼 수 없지만, 어쩐지 차정우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너만큼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끄덕끄덕.
「우리 모두 피해자니까.」
두 사람은 언제부턴가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들끼리 언젠가 모임을 만들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일명 ‘인성왕 피해자 모임’.
줄여서 인피모라나?
「주인을 따라다닌 지 어언 십여 년 동안…… 그의 인성질과 뒤통수로 인해 참으로 많은 피해자가 양산되었고, 그들이 내뱉는 오열과 절규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지. 이걸 어떻게든 규제해야만 해.」
차정우는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정우는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희망에 찬 얼굴이었지만.
샤논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네. 그런 건.」
“뭐?”
「인성왕의 손바닥 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
차정우의 얼굴은 다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출입구 쪽을 응시하고 있는 연우를 질겅질겅 씹어 댔다.
“하아! 근데 진짜, 대체 내가 99층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안 거야? 저기 천마 영역 아녔어?”
「말했잖나. 우리 인성왕이 못하는 건 없다고.」
“젠장.”
또 생각지도 못한 무슨 수를 쓴 모양이네. 차정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말처럼 기분이 나쁜가 하면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샤논과 나눈 대화야 그 냥 장난으로 한 말들일 뿐. 사실 그는 여기서 연우를 만난 것에 적잖게 안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뭐…… 이제는 도망은 안 치니까.’
저렇게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해 볼 소지는 생긴 셈이니까.
차정우는 연우의 생각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렇게 있는 것도 부모님을 기다리려는……. 응?’
차정우는 그렇게 생각을 하다 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났다!”
「응?」
“우리 인성왕을 제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뭣이! 그런 위대한 분이 계시다고?」
샤논이 과장되게 반가워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 순간, 출입문 쪽에 포탈이 생기면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차정우가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
“엄마아아아!”
차정우는 99층을 통과하면서 조금 씁쓸해하고 있던 레아의 품에 와락 안겼다.
레아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래, 우리 아들! 왜?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형이 나 때렸어요!”
“뭐?”
연우는 이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도중에 뚝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레아가 쌍심지를 켜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너 이 새끼……!』
“형이 지금 저한테 나중에 잡히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해요!”
『야! 내가 언제……!』
“형이 지금 막 쌍욕 퍼부어요! 엄마 못 듣게 어기전성까지 쓰고!”
“차연우! 너! 엄마가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 너희들은 대체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싸우는 거니? 어?”
그리고 시작된 레아의 잔소리 폭격에 연우는 계속 어깨가 움츠러드는 쭈구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허! 맘 찬스……! 저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샤논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인 크로노스한테도 매번 개개기 바빴던 연우가, 저렇게 레아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는 게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이제부터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님! 신 샤논이 인사드리옵니다아!」
레아는 잔소리를 하다 말고 옆에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하는 샤논을 보고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네가 샤논이구나. 그동안 우리 아들들을 옆에서 많이 도와줬다고 들었는데, 정말 고마워.”
「아닙니다요, 마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것을요.」
샤논은 금세 특유의 붙임성으로 레아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연우는 손으로 얼굴을 덮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자신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닌데…….
정말이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 * *
[천마가 왜 원숭이들 엉덩이가 빨간지 잘 알 것 같다고 비웃습니다.]
“……조용히 해라.”
[천마가 조용히 풉, 푸부부붑,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냅니다.]
“아오, 진짜! 저거! 잡히면 진짜!”
손오공은 분통을 터뜨리면서 99층의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그리 많지는 않아도 몇 번씩 여기를 통과해 본 적이 있어서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고 느꼈다.
손오공이 가진 신화들은 하나같이 사고 치기를 좋아하는 천둥벌거숭이들밖에 없으니. 차정우처럼 대화로 미션을 해결한다는 건 좀처럼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방심하다가 ‘투전승불’의 신화한테서 볼기짝을 걷어차였었는데…… 천마는 그걸 두고 계속 놀려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출구를 열자마자 보이는 연우도 이쪽을 보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했다.
“……봤냐?”
“원숭이의 엉덩이가 빨개진 유래를 알겠더군요.”
“젠장!”
“왼쪽 엉덩이만 걷어차이셨던데, 짝을 맞춰야 하니 오른쪽은 제가 차 드리면 안 될까요?”
“뒈질래?”
“제가 이길 것 같습니다만.”
“아오! 진짜! 이것들을 모조리 어떻게 담가 버릴 수도 없고……!”
손오공은 분통을 터뜨렸다.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섭리라는 두 개의 원칙 중 빛은 천마고, 어둠은 이놈이다. 정말 이 우주, 이대로 리셋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은 걸까?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대는데, 순간 어쩐지 연우가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재빨리 차정우에게 이유를 물었다.
『저 새끼, 괜히 나한테 신경질 부리는 것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맞아요. 토라졌거든요.』
『……왜 저래?』
손오공은 차정우에게서 전후 사정을 듣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언제는 그렇게 냉철한 척하려고 하더니. 가족들 앞에서는 그래도 다르다는 건가.’
어쩐지 연우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그렇게.
뒤이어 같이려의 무덤에 입장했던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
녹턴은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온통 표정이 굳어 있어 차마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젠장! 이딴 스테이지를 고안한 게 대체 누구야?』
마지막으로 크로노스가 짜증을 팍팍 부리면서 나타났다. 그의 전신에는 온통 크고 작은 상처들이 곳곳에 나 있었다.
아무래도 손오공처럼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우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당신?”
레아가 다급하게 다가오면서 걱정스레 묻자, 크로노스는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 어어! 그럼! 괜찮아. 이 정도야 거뜬하지. 거뜬하고말고. 하하하!』
크로노스는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센 척했지만.
레아는 그가 미션에서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로노스를 이루는 신화들은 하나같이 개차반이 아닌 게 없었고, 남들보다도 훨씬 많은 신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신왕으로서의 삶도 삶이지만, 지구에서 시간의 톱니바퀴를 쉴 새 없이 굴리면서 전생을 하여 쌓은 영웅의 삶들도 있으니, 하나로 정립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남편은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 역시 자신이 갖고 있던 정체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단 뜻일 테지.
그렇게 모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우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크로노스와 레아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다시는…… 말없이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할게요.”
그가 어째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잘 알기 때문에 크로노스와 레아도 잠시간 거기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크로노스가 이 기회에 따끔하게 한마디를 해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레아가 먼저 다가가면서 연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
“부모가 자식에게 호강은 시켜 주지 못할망정 늘 마음고생만 시키고. 못난 부모를 만나서 네가 애쓰는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게는 두 분이……!”
“알아. 아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
연우는 레아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없이 눈물을 터뜨려야만 했다.
크로노스와 차정우는 차마 그 광경을 더 보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몇 년 만에 한 건지 모를, 아들의 어리광이었다.
* * *
“한 가지는 잘 알겠구나.”
손오공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연우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뭘 말입니까?”
“앞으로 생겨날 거마신룡의 눈두덩이가 항상 빨개져 있을 것 같단 거?”
“…….”
연우는 자신이 손오공을 놀렸던 게 기억나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대꾸했다간 끝없는 수렁에 빠질 것만 같았다.
“100층으로 가는 문, 열겠습니다.”
“야. 말해 보라니까? 울었지? 운 거 맞지?”
“…….”
연우는 하늘로 통하는 계단 위에 올라섰다.
『곧바로 들이칠 생각이냐?』
“예. 그럴 겁니다.”
크로노스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블케는 몰라도, 통천교주와 우마왕은 절대 만만치 않은 작자들이다. 내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마지막까지 뻗대던 놈들이야.』
연우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는 않겠죠.”
연우는 이미 이 모든 스테이지 들을 끝내고 난 뒤, 이블케를 잡고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되어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손오공과 함께 새롭게 짠 계획을 가족들에게 공유해 둔 상태였다.
크로노스와 레아는 걱정은 했어도 거기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연우가 이만큼 마음을 돌린 것만 해도 고무적인 일이었으니까.
다만,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다시 겪어야 할 아들의 마음고생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부모로서, 홀로 꿋꿋이 길을 걸어 나가려는 연우를 응원 해 주고 싶었다.
“그래도 할 겁니다.”
연우의 단호한 의지에 크로노스와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끼이익!
연우는 100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