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려의 횃불 (1)
[100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그동안 99개의 시련과 난관을 통과한 그대여, 그대가 걸어온 길과 그대가 쌓은 업에 무한한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 앞에 마지막 시련이 놓여 있습니다.
99층에서 획득한 려의 등불은 당신의 영혼 속에 깃든 채, 당신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등불은 때때로 당신에게 편한 길을 가라고 잘못된 방향을 속삭이기도 하므로, 그것에 넘어갔다면 결코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려의 등불이란, 바로 그런 내면의 속삭임입니다.
내면의 목소리는 언제나 당신에게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도록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때로는 당신을 유혹과 타락의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가릴 줄 아는 것이 바로 이성이며, 또한, 자기 수양(自己修養)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수양은 탑의 꼭대기에 서고, 세상에 오롯이 서고자 하는 당신에게 있어서 평생 함께 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품은 ‘려의 등불’을 ‘횃불’로 키우십시오. 당신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수록 횃불은 더더욱 환히 밝혀져 당신을 빛으로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커진 불길을 저 끝에 있는 성화대에 붙이십시오.]
100층의 시련을 본 순간, 연우가 느낀 점은 설명은 장황할지 몰라도, 너무 내용이 두루뭉술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연우가 지켜보고 확인했던 시련들은 하나같이 뭔가 명확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는데, 이건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려의 등불을 횃불로 바꿔라?
대체 어떻게?
하지만 연우는 이것만큼 마지막 시련에 어울리는 내용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저 성화대에 붙은 불이 칠흑왕의 어둠을 전부 물리치고, ‘꿈’을 전부 환하게 밝히는 이정표가 되었었겠지.’
저 아주 높은 끄트머리에 놓인 성화대는 아마도 탑, 실제로는 여의봉의 중심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에 불을 붙일 정도가 된다면, 능히 천마의 후계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언제나 자신들은 옛것들에 불과하니 이제 슬슬 후대에 모든 걸 물려주고 떠나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천마가 바라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천마가 당신에게 네가 그런 계획들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렸지 않았냐면서 헛웃음을 흘립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끝까지 막지 않았던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천마가 세상의 일은 자신 같은 주관자가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이의 몫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집행자니 대적자니 하는 것들이 날뛰어도 가만히 보고만 계셨던 겁니까? 당신의 아들이 그리 잘못되었는데도?’
[천마가 말없이 당신을 보며 웃습니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천마가 말없이 당신을 보며 웃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나오시니 한 가지는 확실하겠네요.’
연우는 모든 감각을 개방시켰다.
휘휘휘!
[7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검고 붉은 날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뜨거운 그림자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연우는 성화대 위에 놓인 황금색 구체를 보면서도, 그 너머에서 여전히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천마를 정확하게 응시했다.
99층을 지나오면서 한결 눈이 밝아진 덕분일까?
연우는 창공 도서관에 앉아 읽던 책을 조용히 내려놓으면서 이쪽을 굽어다 보고 있는 천마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천마는 웃고 있었다.
마치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처음 그가 창공 도서관에 갔을 때처럼, 말 없는 응원을 해 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방해하지 않으시리라 믿고, 제멋대로 하겠습니다.’
천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순간, 연우는 두 날개로 한껏 홰를 치면서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황금색 구체로 달려들었다.
이블케는 현재 시련의 내용처럼 심상 세계에 갇혀 려의 등불을 횃불로 열심히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려의 등불이라는 건 영혼의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니, 아마 자신을 구성하는 신화들을 되돌아보고 있지 않을까.
거기서 등불을 키울 만한 요소들을 바쁘게 찾고 있을 게 분명 했다.
연우는 그런 녀석의 신화 속으로 들어가 모든 걸 훼방 놓을 생각이었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 녀석을 아예 송두리째 잡아먹을 속셈이었다.
[천마가 당신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지 묻습니다.]
물론, 천마의 말마따나 쉽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타인의 신화에 쳐들어간다는 것만큼 무모한 짓도 없을 테니까.
그곳은 상대가 살아온 생애의 총화(總和)라고 할 수 있으니, 자칫 거기에 휘말리거나 억눌려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이미 크로노스의 신화를 드나들면서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어 봤던 연우였기에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하물며 까마득한 세월 동안 칠흑왕의 주 자아로 살아오면서 천마와도 줄곧 대적해 왔던 이블케가 아닌가?
녀석이 가지고 있을 신화의 총량은 연우로서도 도저히 짐작하기 힘들 만큼 엄청나게 두터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거기만큼 녀석을 완전히 집어삼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도 없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직접 뛰어드는 셈이었지만…… 연우는 당장 이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피안이라는 세계를 만들어 도피하려는 이블케와 다르게, 연우는 칠흑왕의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그것마저 탈피하여 ‘꿈’과 ‘굴레’를 제 입맛대로 고치려 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정도 위험 부담은 당연히 감수해야만 했다.
『정우야, 말했던 대로 지금 여기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연락은 못 하게 된다.』
그렇기에 연우는 구체에 다다르기 직전에 차정우에게 어기전성을 날렸다.
차정우가 우마왕과 부딪치다 말고, 흠칫 놀라면서 이쪽으로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잘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의 동공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두려운 것일 테지.
연우가 구체 속으로 발을 들인 순간, 두 형제의 만남은 마지막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이블케를 사냥하는 것부터 칠흑왕을 탈피하고 초월을 이루는 것까지…… 연우는 이제 더 이상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수레바퀴를 돌릴 생각이었다.
그 과정 그 어디에도 되돌아갈 퇴로 따윈 없었다. 그저 일직선으로 달리기만 해야 했다.
그렇기에. 연우는 동생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마지막에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노라고.
그 끝없는 수레바퀴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길에서 다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정우의 도움이 필요했다.
원래대로라면 혼자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지만, 연우는 더 이상 스스로 짊어지는 일 따윈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연우는 이제 더 이상 신이 아닌, 인간이었으니까.
『응. 걱정 말고 다녀와.』
차정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부모님, 잘 부탁한다.』
연우는 엷은 미소를 띠면서 후련하게 구체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파아앗!
세상이 뒤집혔다.
* * *
[‘어느 아귀의 보랏빛 세계’에 입장하였습니다.]
‘이름 한번 불길하군.’
연우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보라색은 흔히 불길의 상징 혹은 전조로 통한다. 그만큼 이블케가 살아온 생애가 험난했다는 뜻이겠지만.
‘그보다 녀석을 여기서 어떻게 찾는다?’
연우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눈을 가만히 좁혔다.
이곳은 생명체가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험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황불이 강을 이루며, 대지는 온통 악의와 원념을 품고 있어 시커멓게 빛나고 있었다.
그 위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들도 하나같이 괴상망측한 모양을 한 것들투성이었으니.
죽은 거인족들의 고향도 이만큼 망가진 환경은 아니었다.
연우 역시 명계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지옥을 거닌 적이 있었다지만, 그곳도 결단코 여기만 큼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여기가 어딘지 금세 알 것 같았다.
아귀계(餓鬼界).
‘육도(六道)’ 혹은 ‘6계(六界)’라고 불리는, 차원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다는 세계.
윤환전생을 벌이는 피조물들이 전생에 쌓은 죄업이 너무 크다면 떨어진다는 곳이기도 했다.
‘분명히 그놈은 여기서 태어났었지?’
연우는 현인-이블케와 대립을 하면서 녀석이 가진 신화의 단면을 몇 가지 훔쳐봤었다.
그중에는 녀석이 가진 태생도 있었으니.
이블케는 원래 아귀계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최하급 아귀로 태어나, 천적들의 눈치를 보면서 해골이나 쓰레기 따위를 주워 먹던 신세였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계속 포식에 포식을 거듭해 이성을 갖추게 되고, 그때부터 진화를 거듭했었다.
다만, 그만큼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기에 집행자로 점지되었고, 종국에 가서는 세계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 뒤에는 마성이 되어서도 계속 포식을 거듭하면서 끝내 주 자아가 되어 버렸고.’
지금이야 냉철한 판단력과 기민한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지만, 원래는 포악한 흉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녀석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 더 이상 갈등이 없는 세계를……?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군.’
연우로서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여하튼 이제 찾기는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인지 영역을 함부로 확장했다간 이쪽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지금쯤 그놈도 내가 들어온 걸 알고 있을 테고. 이건 눈치 싸움이야.’
어떻게 해야 위치를 들키지 않고, 녀석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당분간은 권능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해야만 했다. 권능은 신위를 법칙에다 새겨넣는 행위. 권능만큼 위치를 들키기 쉬운 소재도 없었다.
‘칠흑을…… 쫓을 수 없으려나.’
그러다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블케는 려의 등불을 만들고자 자신의 신화 속으로 들어왔고, 녀석은 칠흑을 등불과 뒤섞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
세계 창조 혹은 우주 창생이라는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괜히 ‘꿈’과 ‘굴레’를 다루는 것이 천마와 칠흑왕, 단 두 개체만이 고작일까.
아무리 이블케가 두 존재의 속성을 동시에 띠고 있다고 해도, 무(無)에서부터 무언가를 새롭게 빚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건 천마나 해냈던 것이지, 당장 이블케가 가진 격으로는 턱도 없었다.
실제로 이블케가 만들고자 했던 것도 거의 소우주에 가까운 개념이었고.
나중에 그것을 확장시켜 ‘꿈’과 ‘굴레’만큼 키울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당장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런 소우주를 만들 수 있는 ‘소재’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연우도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녀석이 쉽게 다룰 수 있을 만한 소재가 뭐가 있을까?
‘자신의 신화.’
연우는 별반 어렵지 않게 이블케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신화를 바탕으로 옛 우주를 복원한다는 개념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녀석이 보았을 ‘꿈’은 아주 많아. 그런데 왜 하필 많고 많은 ‘꿈’ 중에서도 자신이 처음 태어났던 이 ‘꿈’인 거지?’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미련이라도 남아 있나.’
연우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집행자로서 자신이 송두리째 잡 아먹었던 세계에 남은 미련이라니. 정말이지 아까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연우는 더더욱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 미련이 이블케의 특이점(特異點)이겠군. 그걸 찾아서 제거하 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녀석은 반드시 나타난다.’
연우가 차갑게 웃었다.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깽판 놓는 건 또 내가 자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