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86화 (786/862)

11화. 려의 횃불 (2)

칠흑왕의 후예…… 즉, 집행자는 항상 그 세계에 대한 강한 증오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야만 세계와 우주를 종말로 몰고 가는 일을 스스로 집행할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이 살던 세계를 직접 부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한 반발과 제재를 거스르면서도 종말을 집행할 수 있는 의지, 달리 말해 그만한 원동력과 심리적 기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내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부터가 여기에 강한 미련이 있다는 뜻이겠지.’

연우와 이블케는 비록 서로 다른 연원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동일한 존재에 가까웠다.

‘칠흑왕’이라는 거대한 개념적 카테고리에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심연 속에서 다투면서 서로 간에 신화와 칠흑이 뒤섞이기도 했으니.

그렇기에 연우는 현재 이 ‘꿈’ 속에 있는 존재들 중에 이블케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고, 반대로 가장 먼 존재라고도 여겼다.

자석의 S극과 N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양극단에 서 있지만, 결단코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러니 연우는 당연히 자신이 떨어진 이 장소 어딘가에 분명히 이블케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어디냐, 대체?’

연우는 화안금정으로 두 눈을 요요히 빛내면서 자신의 의념을 개방했다.

[‘그림자 영역’이 아귀계를 따라 조심스럽게 퍼져 나갑니다!]

츠츠츠-

연우의 그림자가 아귀계의 지표 면을 따라 퍼져 나가자, 그의 신형도 조용히 그 속에 녹아 사라졌다.

그림자는 아주 느릿하게 퍼져 나가면서 지표면에 노출된 대상이 품고 있던 데이터를 낱낱이 분해했다.

이블케와 관련된 데이터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뽑아내기 위해서.

[해당 대상을 분석합니다.]

[연관 데이터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당 대상을 분석합니다.]

[연관 데이터를 찾을 수 없습니다.]

……

그리고.

[해당 대상을 분석합니다.]

[연관된 데이터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찾았다.’

연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또 다친 상태로 오셨네요. 조심하시지…….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날개가 꺾인 서큐버스가 상처를 잔뜩 입은 아귀‘들’을 돌보고 있었다.

* * *

‘서큐버스라.’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서큐버스는 인큐버스와 함께 꿈을 거닌다고 알려진 마족으로, 달리 몽마(夢魔)라고도 불렸다.

다만, 마족이나 악마 계통 중에서도 하급에 위치해 흔히 마왕들의 시중을 들거나, 사자(使者)로 부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악마는 악마인지라, 아귀 따위는 절대 가까이할 수 없을 까마득한 존재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 있단 말이지?’

연우는 시스템이 읽어 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서큐버스에 관해서 빠르게 파악했다.

[한쪽 날개 꺾인 서큐버스]

이름: 아웃라인.

종족: 영락한 몽마.

……

육도 중에서도 최상위 세계로 손꼽히는 ‘천상’ 속 어느 우주를 다스리던 몽마왕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었으나, 쿠데타로 쫓겨나면서 아귀계로 숨어들고 말았다. 현재는 영락에 영락을 거듭하며 쇠락하는 중이다……

연우는 설명을 빠르게 내리면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확인했다.

……현재는 아귀계에 존재하는 아귀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아귀 중에서도 가장 덜떨어진 존재들을 거두어 키우고 있다.

‘동질감을 느끼고, 아귀를 직접 거두어 키우고 있다.’

연우는 직감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블케가 아귀로 있을 때에는 너무 허약해서 다른 것들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고 했었지.’

만약 자신이 훔쳐본 이블케의 신화가 사실이라면, 아마도 이 서큐버스가 이블케에게는 은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블케의 마력향(魔力香)도 짙게 배어나고 있고.’

사실 연우는 천마의 얼굴이며 칠흑왕의 자아가 되기까지 한 이블케가 어떻게 최약체로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도 그랬었으니.’

연우는 애당초 성인이 될 때까지 마나의 존재조차 모르고 지내지 않았던가.

비록 태생이 신왕의 혈육이긴 하다지만, 그래도 영락해 버린 존재들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유전자가 특출하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롯이 그 혼자만의 노력과 의지로 이룬 성과인 셈이었으니.

연우는 이블케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하고 여기고 있었다.

‘아니면 자신의 가능성을 잘 모르고 있다가, 특별한 일을 계기로 각성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고.’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블케의 미련은 바로 이 서큐버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연우는 ‘아웃라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큐버스를 가만히 관찰했다.

“다들 다투지 말고, 천천히 나눠 먹으렴.”

서큐버스는 매일 아침만 되면 어디론가 떠났다가 먹을 것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

대개 목이 너무 마른 나머지 지표면을 따라 흐르던 유황불을 물로 착각해 마신 멍청한 마물의 사체나, 거대 아귀들이 심심풀이로 뜯어 먹다가 버린 아귀들의 뼈다귀가 전부였다.

하나같이 아귀계에서는 줘도 먹지 않을 하품의 먹이에 불과했지만.

새끼 아귀들에게는 그것만 해도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던져 주는 족족 게걸스럽게 먹기 바빴다.

그럴 때면 서큐버스는 얼마든지 더 구해 올 수 있으니 나눠 먹으라고 일렀지만, 지능 수준이 짐승만도 못한 아귀들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살점이 많은 부위가 있으면 너도나도 달려들면서 오히려 상대까지 같이 잡아먹으려 들 정도였으니.

서큐버스는 먹이를 구해 오는 것 말고도, 아귀들의 싸움을 중재하는 것으로도 힘을 잔뜩 빼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는 피 냄새에 두 눈이 뒤집힌 나머지 서큐버스를 노리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서큐버스는 절대 고생을 멈추지 않았다.

아귀들이 배가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먹이를 잔뜩 먹어 치우고는 낮잠을 즐길 때면, 서큐버스의 눈에는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휴! 이러니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연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심미안이었지만.

‘뭐,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 다른 법이니까. 이 세계에서는 저런 흉측한 놈들이 취향에 가까울 수도 있는 거고.’

연우는 혀를 가볍게 차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나저나 이블케가 어느 아귀지?’

그림자 속에서 계속 아귀들을 관찰해 봐도, 여전히 이블케를 특정할 수가 없었다.

서큐버스가 다루는 아귀가 수백 마리나 될 정도로 워낙에 많은 데다가, 놈들이 가진 기질이 하나 같이 비슷하다 보니 분간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귀가 하급 마물에 속하고, 영혼이 저급하다고 할지라도 세세한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건만…… 여기 있는 놈들은 마치 어느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큰 차이가 보이질 않았으니.

차라리 특이한 습성이라도 가진 녀석이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일단 이 서큐버스를 제거해 볼까? 그런다면 나오려나?’

이 서큐버스를 미끼 삼아 이블케를 엮어 내고, 단숨에 녀석이 가진 려의 등불마저 훔치려 했던 연우로서는 슬슬 엉덩이가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더 시간을 내어 주게 되면 어떤 식으로 횃불을 완성할지 몰라.’

연우가 결국 그림자를 올려 서큐버스의 목을 치려던 그때.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여태껏 잠잠하기만 하던 서큐버스의 속마음에 새로운 형태의 사념이 깃들었다.

‘분명히 올 때가 됐는데?’

그냥 겉보기엔 밖으로 나간 심부름꾼이라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연우는 서큐버스의 사념에 처음으로 탐욕이 깃드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태껏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새끼 아귀들을 돌보는 성녀 같던 모습이 아닌, 진짜 악마와 마족다운 사이함이 풍겼기 때문이었다.

‘와야 해. 반드시……!’

‘그래야만 내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왜! 왜냐고! 왜 안 오는 거지? 내가 남긴 메시지를 읽지 못한 거야? 어째서? 그걸 읽었어야 해! 그래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런 곳에서 썩을 이유가 없잖아!’

서큐버스는 애타게 기다리던 게 계속 나타나질 않자, 초조해졌던 건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어 대기까지 했다.

손끝이 잔뜩 뭉개지면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간 나머지 그걸 미처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던 그 순간.

‘와, 왔어!’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서큐버스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하고.

이미 그전부터 아귀계의 법칙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고 있던 연우는 가만히 그곳을 주시했다.

츠츠츠츠!

[‘새로운 몽마왕의 사자’가 강림합니다!]

하늘을 따라 검은 먹구름이 와류를 그리면서 잔뜩 모여들더니, 대형 포탈이 활짝 열렸다.

웬만한 마왕들조차도 가볍게 으스러뜨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아귀계 전체를 강하게 짓눌렀다.

아니, 그건 단순히 짓누르는 수준이 아닌, 으깨 버리는 수준에 가까웠으니.

“커, 커헉!”

실제로 서큐버스는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손발이 땅바닥에 들러붙은 채로 어깨가 부서지고, 날개가 으스러지면서 핏물이 바닥에 후두둑 쏟아졌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아귀들은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몸뚱이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일대가 삽시간에 온통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저급한 핏줄 따위가 감히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드는 것이냐?”

머리를 지면에다 처박아야만 했던 서큐버스의 귓가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락에 영락을 거듭하면서 누더기만 걸치는 것이 고작이었던 서큐버스와 다르게,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된 외양을 뽐내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인큐버스였다.

‘감히……! 원래는 내 발이나 핥던 사냥개 따위가……!’

서큐버스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흐흐! 눈빛을 보니 잔뜩 화가 난 얼굴이로군. 왜? 원래는 네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기만 했던 환관 나부랭이 따위가 이렇게 오만하게 있으니 배알이라도 뒤틀리나? 앙?”

인큐버스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면서 오른발을 들어 서큐버스의 뒤통수를 자근자근 짓밟아 댔다.

그 때문에 서큐버스는 숨을 잔뜩 삼켜야만 했다.

여기서 인큐버스가 장난으로라도 까딱 발에 힘을 주었다간 그녀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으깨져 버렸을 테니.

그 때문에 인큐버스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서큐버스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쳇’하고 혀를 차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것이 네년이 말했던 그것인가?”

그곳에는 아귀들이 겁에 잔뜩 질린 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다른 아귀들은 죄다 죽어 살아남은 개체라고는 십여 마리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인큐버스의 시선이 닿은 건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체구를 가진 놈이었다.

왜소한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아귀들과 다르게 겁에 질린 기색이 없어 두 눈이 흐리멍덩하기만 한 녀석.

겁을 상실한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백치인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다른 놈들과는 조금 다른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서큐버스의 대답에 인큐버스가 흥이 돋는다는 얼굴이 되어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말로만 듣던 천마의 얼굴이라?”

그러다 미심쩍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겉보기엔 그저 그런 최하급 아귀로만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지 고한 존재의 영혼을 품은 전생자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제, 제가 몇 번이고 확인하였으니 진짜입니다. 지, 지,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흠.”

“그, 그러니 부디 신원 복원을……!”

연우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의 대화 내용을 들으면서 전후 사정을 빠르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잘못 생각했었군. 서큐버스가 이블케의 은인이었던 게 아니야.’

연우는 지금이 여태 숨어 있던 이블케가 나올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팔아먹은 원수였던 거지.’

연우의 판단이 끝나기 무섭게.

“드. 디. 어. 찾. 았. 구. 나.”

“나. 의. 오. 랜. 트. 라. 우. 마. 들. 이. 여.”

흐리멍덩하기만 하던 새끼 아귀의 눈가에 처음으로 초점이 잡히면서.

입술 양 끝이 크게 벌어지고 뾰족한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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