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려의 횃불 (4)
자신이 그동안 어렵게 쌓은 신위를 아무렇지 않게 내던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별반 미련이 남아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일반 신이나 악마들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제정신이냐며 길길이 날뛸지도 몰랐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평생을 공들여 닦았고, 길러 온 것을 저렇게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을 테니까.
신화가 신성을 부여하고 신앙을 끌어들이는 매개체라면, 신위는 그런 신적인 특성들을 정립해 주는 정체성과도 같은 것.
또한, 법칙을 제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는 만능열쇠와도 같았다.
그것이 없어져서야 더 이상 신이라 할 수도 없고, 설사 격을 유지한다고 해도, 신위를 소지하고 있을 때만큼 뛰어난 권능은 행사하지 못했다.
실제로 여태 그림자 속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샤논이나 한령 등은 탄식을 멈추지 못할 정도였다.
「하여간…… 우리 인성왕. 대단해, 아주. 뭘 하든지 간에 상식을 초월한단 말이지. 보통 갖고 있는 게 많으면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기 마련인데. 저렇게 미련 없이 내던질 줄이야.」
「그만큼 승리를 자신하시는 것이니 승부수를 띄우는 것일 테지.」
「그래도 이번엔 좀 너무한 거 아냐? 이래서야 우리는 이제 밖으로 나설 수도 없잖아.」
샤논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포함한 모든 권속들은 ‘죽음’을 매개체로 이곳에 묶여 있었으니.
하지만 연우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쳐서야 그들의 존재 성립의 근간도 같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이야 연우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이 그림자에 속박되어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외부 활동을 조금이라도 하려 했다간 곧바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기다려 봅세.」
하지만 한령은 별다른 걱정이 없다는 투였다.
「언제나 그러하셨듯, 우리에게 늘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시는 분이 아니신가.」
「눼이눼이. 열렬한 신봉자라 마음 편해서 좋겠습니다.」
샤논은 비꼬듯이 말했지만, 그 역시 연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만큼은 한령에 못지않기 때문에 뒷일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언제는 다른 사람들이랑 다 같이 간다더니. 이번에도 혼자서 다 해 먹으면 우리가 나설 길이 없잖아?’
자신이 모시는 주군 앞에서 조금이라도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마지막까지 저렇게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가는 연우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기에.
그걸 못해서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 * *
“말도…… 안 돼……! 커헉!”
이블케는 새카맣게 물들어 가는 심상 세계, 아니, 자신의 신화를 보면서 울부짖었다.
이미 그의 전신도 온통 새카만 저주로 둘러싸여 온몸이 금세 바스러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죽음’이 ‘칠흑왕의 주 자아’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데이터에 감염되었습니다!]
[칠흑과의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
[칠흑에 대한 데이터 손실 피해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서둘러 바이러스를 잡고, 손실된 데이터를 복원하십시오.]
[칠흑의 내구도가 하락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칠흑을 찾아 보충하십시오.]
연우가 터뜨린 죽음의 신위는 말 그대로 바이러스와 같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져 나가 마침내 숙주마저 잡아먹는 악질 바이러스.
어떻게든 잡아 보려 해도, 너무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졌기 때문에 백신이나 방화벽마저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아니, 그런 백신마저도 ‘죽음’을 맞으면서 같이 사라져 버렸지만.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요?”
까마득한 세월 동안 숱하게 많은 존재들을 보아 왔다지만.
이블케는 도저히 연우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만큼 신위를 내던진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신위를 어떻게든 지키려다가 힘없이 죽은 신들을 숱하게 보았으면 보았지, 반대의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연우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조차도 신왕좌를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지 않았었나!
하물며 죽음의 신위는 애당초 칠흑왕이 그를 후예로 점지하면서 내려 준 것.
즉, 연우와 칠흑왕과의 연결 고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해치우고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되려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져?
죽음의 신위가 없어서야 칠흑왕의 자아로 다시 복귀하는 게 힘 들어질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블케의 의문에 대한 연우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순간, 이블케는 둔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오효효효! 오효! 오효효효!”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시시각각 죽음이 그를 잠식해 나가고 있어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 죽은 피가 쉴 새 없이 튀었다.
“그래…… 요. 당신은…… 처음부…… 터…… 원래부터…… 그랬던 사람…… 이었었지요. 왜…… 그걸 잊고 있었던 건지…… 오효효효!”
한순간, 이블케를 둘러싼 기질이 확 돌변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저도 어떻게든 당신을…… 먹어 치워야겠군요!”
비록 시시각각 신위가 붕괴되고, 신성이 위태롭다지만.
이곳은 그를 구성하는 신화 속.
여전히 그에게 한없이 유리한 전장이었다.
또한, 칠흑왕의 주 자아를 이루고 있는 신화는 애당초 양을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두텁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을 맞으려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어떻게든 연우를 잡아먹어 이 저주를 떨쳐 내야만 했다.
이블케는 그런 판단하에 모든 신화를 발동시켰다.
[‘칠흑왕의 주 자아’의 부름에 그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신화들이 호응합니다!]
이블케를 둘러싼 짙은 칠흑을 따라, 가지각색의 모습을 자랑하는 또 다른 이블케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 자아의 신화, ‘새끼 아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 자아의 신화, ‘실험체666’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 자아의 신화, ‘천마의 망가진 얼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주 자아의 신화, ‘심연의 흑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99층에서 분화되었을 게 분명한 이블케의 모든 신화들이 다 튀어나온 것 같았다.
연우가 자신의 신화들을 모두 죽여 흡수하고, 차정우가 담론을 통해 합일을 이뤄 냈던 것처럼.
이블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99층을 통과한 모양이었다.
“많이도 불러 댔군. 나 하나 잡자고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서 똘똘 뭉쳤나?”
연우는 그들을 보면서 냉소를 터뜨렸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 쌍은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지는 칠흑을 따라 새로운 모습의 이블케가 계속 모습을 비치고 있었으니까.
신조차도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인 모든 이블케의 신화들이, 연우를 노려보면서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의 숭고한 뜻 때문이다.”
“칠흑왕이니 천마니 하는 것에 더 이상 묶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이다.”
“비록 우리가 여러 개로 갈라졌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뜻과 목표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음이니.”
“그래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걸림돌이 될 것은 어떻게든 치워 낼 것이다.”
연우는 이블케가 말하는 ‘걸림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냉소가 더 짙어졌다.
“그러니.”
“우리의 위대한 뜻을 폄하하지 말지어다.”
[주 자아의 신화, ‘현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새카만 어둠으로 만들어진 마성이 말했다.
그러니 너 역시 이제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니라.
[‘칠흑왕의 주 자아’가 ‘칠흑왕의 대체 자아’에게 공격을 개시합니다!]
파아앗!
현인을 시작으로, 이블케의 모든 신화들이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죽음’에 감염되어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처절함과 포악함이 더 강하게 풍겨 나고 있었다.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철렁거릴 만한 상황이었지만.
연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새 잊었나 보지? 아니면 나이를 많이 먹다 보니 치매라도 왔든가.”
오히려 냉소가 더 커질 뿐이었다.
“내가 처음에 심연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거?”
순간, 남아 있던 오른쪽 날개가 크게 펼쳐졌다.
[하늘 날개(오른쪽) - 투쟁]
다른 것은 다 벗어던지더라도, 이 신위만 지키고 있다면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을지니.
투쟁.
그것이야말로 연우가 살아온 길이었고.
앞으로도 살아갈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아앗!
연우는 검결지를 짚으면서 놈들에게로 달려들었다.
파직, 파지지직!
콰르르릉-
검결지에서부터 피어난 검붉은 뇌기가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터졌다.
이미 ‘죽음’에 반쯤 잡아먹힌 놈들이 대부분이어서 검뢰가 터지는 족족 죽어 나갔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연우를 노리려 들었다.
그를 잡아먹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몸을 복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연우도 절대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실험체666이 그의 왼팔을 물었다. 연우는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 두었다.
[신화, ‘군인’이 강제로 분리되었습니다!]
팔이 뜯기면서 연우의 신화도 덩달아 같이 떨어져 나갔다. 한순간, 연우는 심적인 공허함을 느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투쟁. 그 신위만을 꽁꽁 붙들어 놓은 채, 약점이 훤히 드러난 녀석의 목덜미를 재빠르게 잘라 버렸다.
[주 자아의 신화, ‘실험체666’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데스의 식령검’이 발동됩니다!]
……
[주 자아의 일부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소실되었던 신화, ‘군인’이 복원되었습니다.]
이블케가 자신을 먹어 치우려 들면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신화가 뜯겨도, 신성이 먹혀도, 신앙을 뺏겨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에 투쟁의 신위만은 단단히 붙들어 놓은 채, 놈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런 뒤에 이쪽에서 잡아먹는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였으니까.
어떻게 저 많은 신화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겠냐 싶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싸움은 연우가 더 바라는 상황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후예에서 시작해 대체 자아가 될 때까지, 수도 없이 많은 시간 동안 무한투를 벌이면서도 절대 단 한 순간도 이성을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주 자아의 신화, ‘실험체666’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 자아의 신화, ‘천마의 망가진 얼굴’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하데스의 식령검’이 발동됩니다!]
……
[주 자아의 일부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 자아의 일부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면에 이블케는 체급만 방대할 뿐, 오히려 그렇기에 효율성이 없고 둔했으니.
한평생 강자만을 상대해 오고, 그들을 이겨 왔던 연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냥감에 불 과했다.
콰지지직!
퍼버버벙-
[주 자아의 일부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칠흑왕의 주 자아’가 너무 많은 양의 칠흑을 소실하였습니다!]
[주 자아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상실하여 기존의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현인-이블케’가 ‘대체 자아’로 강등되었습니다.]
아, 안 돼!
아직……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는데……!
[대체 자아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상실하여 기존의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현인-이블케’가 ‘일반 자아’로 강등되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끝이 보였는데……!
[일반 자아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상실하여 기존의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현인-이블케’가 ‘무의식의 일부’로 강등되었습니다.]
이블케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빠른 속도로 망가졌다. 심상 세계가 무너지고, 신화들이 줄줄이 죽으면서 연우에게로 흡수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한 번 시작된 몰락은 급속도로 이어져 더 이상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모든 신화들이 전부 죽어 현인-이블케만이 남았을 때. 녀석도 더 이상 존재를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색이 많이 바래져 있는 상태였다.
너는, 너는……!
현인-이블케는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연우를 보고 악다구니를 질렀지만.
스걱!
연우는 더 이상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녀석의 머리를 단숨에 자르고 똑같이 흡수해 버렸다.
[‘현인-이블케’까지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상당한 양의 칠흑을 흡수하였습니다.]
[현재 칠흑의 보유량: 91%]
[주 자아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하여 기존의 자격이 상승합니다. ‘칠흑왕의 주 자아’가 되었습니다.]
[집행자로서의 운명이 규율자(規律者)로 변경되었습니다.]
……
[죽음이 복원됩니다.]
[투쟁이 강화됩니다.]
……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굴레’를 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황(皇)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칠흑왕’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