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89화 (789/862)

14화. 려의 횃불 (5)

칠흑왕이라.

연우는 어쩐지 얼떨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연히 따지자면 ‘완전한’ 칠흑왕이 아닌, 주 자아가 된 것일 테지만.

그래도 이 자리가 보통 칠흑왕의 의지라고 보여지는 모든 행동들이 결정되는 자리이니만큼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크게 보이질 않았으니까.

이전에도 이미 전지와 전능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칠흑왕의 자아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 자율성은 있어서 단독 행동이 가능했건만.

주 자아가 되어 버린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이 손발을 묶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무거워졌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가라앉고 있다.’

그 순간. 연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잠이…… 서서히 찾아온다는 것을.

[칠흑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심연이 주 자아를 기다립니다.]

[잠시 깨어났던 칠흑왕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깁니다.]

칠흑왕이 항상 잠에 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나 비대한 몸집과 거대한 사고를 지니고 있어,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단일한 자아가 아닌,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숫자의 마성을 가진 군체(群體)를 유지하려면 에너지 소비가 더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어찌어찌 계속 잠을 버티는 것도 문제이기도 했다.

주 자아의 외부 활동이 계속되어서야 칠흑왕도 완전히 깨어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래서야 종말이 불러오는 격이니 결국 연우는 이대로 다시 심연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이블케처럼 다른 마성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주도권을 쥐지 않고서야…… 불가능하겠지. 내가 그만한 성과를 이룰 때 즈음에는 ‘꿈’이 얼마나 진척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연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직 인사도 못 했는데.’

연우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혹시 외부로 의식을 내비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다.

이대로 다시 잠에 든다면 또 한참 동안 가족들을 만나지 못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 자신은 다시 되돌아올 거라고 한마디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느라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에도라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심상 세계 사이로 심연이 물밀 듯이 들어와 어느새 발목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똑!

똑!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질적인 존재가 심연의 문을 두들깁니다.]

‘뭐지?’

연우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심연은 이제 무릎까지 차오르는 중이었다.

똑, 똑!

[이질적인 존재가 주인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그건 노크 소리였다.

심연을 찾아온 다른 이질적인 존재?

연우는 어쩐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고.

[이질적인 존재가 주인의 허락을 받고 심연에 접속합니다.]

[천마가 강림합니다!]

심연이 쭉 찢어지면서 칠흑색과 전혀 상반된 황금색 빛무리가 연우 앞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추면서 연우에게도 낯이 익은 얼굴이 되었다.

창공 도서관에서 봤을 때처럼. 천마는 예나 지금이나 익살맞은 얼굴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하이. 오랜만이……!”

천마는 반갑게 연우에게 손을 흔들다 말고, 갑자기 목젖을 파고드는 검뢰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내빼야만 했다.

쐐애액-

콰르르르!

천마가 있던 자리로 칠흑색 뇌기가 몇 번이나 튀어 올랐다. 이블케를 흡수하면서 검뢰의 위력은 이미 다시 몇 배로 증폭한 상태였다.

‘통한다.’

연우는 창공 도서관에서 힘없이 두들겨 맞기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적으로 달려들었다.

콰쾅! 콰콰쾅!

쿠르르르-

콰콰콰콰!

연우는 천마에게 바짝 붙으면서 검뢰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이미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수많은 권능들을 잇달아 펼치면서 그의 발목을 묶어 나갔다.

천마는 재빨리 황금빛 물결을 곳곳에다 뿌리고, 진각을 밟아 공세를 흩뜨리는 등 바쁘게 움직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얌마! 왜 이러는 건데!”

“한 대만.”

“뭐?”

“면상 딱 한 대만 후려치겠습니다.”

“그딴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냐?”

천마가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댔지만, 연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던가.

탑에서의 만남 이후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천마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 그동안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그의 아들이었던 올포원-비바스바트마저도 눈을 감지 않았던가.

비록 연우로서는 올포원이 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내쳐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천마의 그러한 안일한 태도는 연우에게 화를 남길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추구하는 이상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자신의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뤄 내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연우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도,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고관이었다.

퍼퍼퍼펑!

그렇기에 연우는 딱 한 대라도 좋으니 저 얄미운 천마를 때려 보고 싶었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그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었다.

대체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가 보았던 것은 무엇인지를.

그리고.

쿠쿠쿠쿠!

‘된다.’

연우는 과거와 달리 자신의 힘이 천마에게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장 천마는 반격하지도 않고,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대고만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손맛이 달랐다.

호각.

지금이라면 그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직은 내가 좀 더 불리한가?’

칠흑왕이 보유한 힘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확실히 천마와 비등할 것이다.

둘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상반된 존재이니까.

하지만 칠흑왕이 그동안 번번이 천마의 제지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잠에 들고 말았던 건, 그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하나로 합치질 못해서였다. 쉽게 말해 능률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으니.

이는 수많은 자아들이 있어 행동이 둔중하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하지만 이 차이도 머지않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연우는 그렇게 판단했다.

퍼어어엉!

그렇게 연우와 천마의 주먹이 맞부딪치면서 두 사람은 서로 멀찍이 떨어졌다. 세계를 채우던 심연은 이제 골반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좀 속이 풀리냐?”

천마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노려봤고.

연우는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풀리겠습니까? 고작 그걸로?”

“그럼 뭐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데?”

“낯짝 한 대.”

“아오! 저걸 진짜 옛날처럼 패 버릴 수도 없고.”

천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연우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천마가 먼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야. 아무리 내가 얄미워도, 지금은 그래도 내가 도와주러 온 입장이거든? 그러다가 내가 질려서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러냐?”

천마가 호랑이 굴이라고도 할 수 있을 칠흑에 직접 들어오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의 목소리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

칠흑왕이 되어 버린 연우는 지금부터 깊은 잠에 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잠은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연우는 차정우와 가족들에게 초월을 이루고, 어떻게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말처럼 쉽게 이뤄질 내용은 절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아주 오랫동안 주 자아로 군림했던 현인-이블케가 칠흑왕을 완전히 독차지했거나, 천마가 다른 수를 써서 ‘굴레’를 멈추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기에 ‘꿈’과 ‘굴레’를 둘러싼 싸움은 여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말았고, 이블케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여 피안이라는 도피처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결국 연우의 그러한 도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천마는 연우의 가족들에게 있어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목소리를 직접 가져다주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하고자 했다.

정작 본인이 곳곳에 뿌려 놓은 씨앗 때문에 연우가 그에게 화가 잔뜩 나 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천마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 문에 어떻게든 연우의 저 시건방진(?) 태도를 바로잡고자 했다.

앞으로 칠흑왕으로서 얼마나 자주 연우와 부딪칠지 모르는데, 지금 기회가 왔을 때 미리 기선제압이라도 해 둘 생각이었지만.

“치십시오.”

팔짱을 끼면서 대답하는 연우의 태도는 어쩐지 더 불량해져 있었다.

“……뭐?”

“도망치실 수 있으면 도망치시란 말입니다. 대신에 저도 같이 이 자리 버리고 도망칠 겁니다.”

“……!”

천마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연우의 강짜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동안 이렇게 계속 관망하셨던 게, 대화 잘 통하는 칠흑왕의 자아가 탄생하기를 기다리셨던 것 같은데…… 번지수 잘못 짚으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딴 자리 별로 가지고 싶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내던지고 도망쳐 버리고 싶을 뿐이지.”

연우의 입술 끝이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천마는 그게 아니실 테죠? 이제야 겨우 칠흑왕을 가라앉힐 수 있는데, 제가 빠져 버리면 다시 난장판이 될 거고. 그럼 머리만 더 아파지실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천마는 깊은 침묵 뒤에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너 원래 이런 새끼였냐?”

“어느 도서관에 사는 손모 씨한테서 배운 겁니다.”

“하여간 저 주댕이.”

천마는 이를 박박 갈았지만, 그래도 연우의 저 말에서 절대 여기서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을 받을 수 있었다.

심연은 이제 명치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데?”

“언제부터 저를 선택했던 겁니까?”

“아, 그거?”

분명히 창공 도서관에서 만날 때까지만 해도, 천마는 연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탑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게 전부 다 연기일지도 몰랐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천마로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처음부터 연우를 점찍은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난 딱히 너를 선택한 적이 없는데.”

“무슨……?”

“내가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칠흑왕을 잠에 들게 하고, 그저 멈춘 ‘굴레’를 굴린다. 그게 전부야.”

“……!”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지. 때때로 ‘굴레’가 굴러가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으면 이따금 옆으로 치워 두기도 하는데, 그래도 내 주관은 달라지지 않아.”

연우는 순간, 올포원이 항상 천계를 향해 울부짖던 말을 떠올렸다.

절지천통.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른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은 분리시키고,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네들의 자유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내가 칠흑왕을 잠에 들게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그러한 절대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피조물이고 신격이고 간에 모두 공포와 절망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래서야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

“시커먼 어둠처럼 갑갑한 상황 속에서도 가슴에 어떻게든 희망을 품고, 빛의 인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이고, 바라는 세상이다.”

천마가 언제고 자신의 속내를 이렇게 속 시원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을까?

연우는 없었다고 기억했다.

모두 하나같이 그에 대해 짐작하고 유추했던 것들뿐.

하지만 이렇게 직접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너의 성과는 오로지 너만의 것이고, 언젠가 맺히길 기다리던 나의 수확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뒤는 너의 자유다. 이블케 놈처럼 계속 나와 대적할지, 아니면 마음 먹은 대로 칠흑왕의 구속도 탈피해서 모든 걸 원하는 대로 되돌릴지는.”

연우는 머리 한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천마와 칠흑왕이 만들어 놓은 장기판 위에서 이리저리 부려지기만 했던 까닭에, 혹시 자신이 이렇게 된 것도 천마가 깔아 둔 판에서 이룬 성과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야 악착같이 버티고자 했던 자신의 운명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굴레’가 수도 없이 굴러가면서 여러 집행자와 대적자가 출현하면서도, 천마는 계속 기다리기만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집행자든, 아니면 대적자든. 인간들이 알아서 자신들이 가진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오기만을.

“자,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천마는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칠흑은 이제 턱밑까지 다다라 있었다.

“나, 더는 여기서 못 버텨. 하고 싶은 말. 간단하게.”

연우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천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말해! 벌써 코까지 찼잖아!”

“……다고 해 주십시오.”

“뭐?”

“제가, 많이 사랑한다고 해 주십시오.”

연우는 그 말을 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홱 하고 돌렸다.

천마는 그의 귓바퀴가 살짝 빨개져 있는 것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알겠다.”

피식!

천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홀연히 사라지고.

심연은 연우의 정수리까지 차오르면서 세상을 완전히 반전시켰다.

쿵!

어디선가 그렇게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연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수많은 마성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기한 ‘나’로군.

그 자리. 나에게 줘.

아니. 나에게……!

연우는 시끄럽게 떠드는 마성들에게로 몸을 날렸다.

100층의 시련은 진짜 정체성을 찾아 려의 횃불을 만드는 것.

[하늘 날개]

여기서 연우는 모든 마성들을 잡아먹고, 단순히 주 자아가 아니라 완전한 자아로 거듭날 생각이었다.

그래야 초월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싸움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리라.

가족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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