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91화 (791/862)

16화. 데우스 엑스 마키나 (2)

소란스럽던 스테이지가 갑자기 조용해진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쩌걱!

아주 자그마한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던 차정우와 우마왕은 물론, 레아와 손오공, 통천교주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녹턴도 상념을 멈추고 위쪽을 올려다보고 말았다.

[칠흑왕의 주도권 경쟁이 모두 끝났습니다!]

“……!”

“……!”

“……!”

『……이렇게나 빨리?』

모두의 두 눈이 커지고 말았다.

아무리 짧아도 족히 며칠 혹은 몇 달은 걸릴 줄 알았던 격전이 너무 수월하게 끝난 셈이었으니까.

몇몇은 아예 무기력함이나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외부에서 감지된 시간은 극히 짧을지 몰라도, 제 구체 안에서 벌어진 싸움은 얼마나 길었을지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시간이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저 그들은 이 싸움이 자신들의 편에 유리하게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특히 차정우를 비롯한 가족들의 시선은 애타는 갈증에 가까웠다.

그러다.

화아악!

구체가 완전한 칠흑색으로 변했다가, 붉은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그 색만 보고도, 차정우 등은 누가 싸움에서 이겼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현인-이블케’의 인격이 소멸하였습니다!]

[칠흑왕의 통합이 시작됩니다.]

[통합률: 91.1, 91.2%…….]

[대상의 규모가 커서 정보 처리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려의 횃불이 조금씩 밝혀집니다.]

[100층의 스테이지 미션이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그 내용은 여태껏 흔들림이 없던 우마왕의 눈가에 씁쓸함이 배어 나오게 만들었으니.

결. 국. 이. 런. 식. 이.

되. 어. 버. 렸. 군.

[‘우마왕’이 현신을 중단합니다!]

츠츠츠-

우마왕은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안타깝다는 듯 지팡이로 지면을 툭 찍었다. 마치 그 소리가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들렸다.

『뭘 하자는 거지, 우마왕?』

통천교주는 집요하게 달라붙던 손오공을 밀쳐 내고 우마왕에게 달려와 따지고 들었다.

“보고도 모르겠나? 이번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네. 그러니 다음 기회로 미루려는 게지.”

『누구 맘대로!』

“당연히 이 늙은이 마음대로지. 이 늙은이는 굳이 가능성 없는 일에 쓸데없는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 따윈 없다네. 그리고.”

우마왕의 쓴웃음이 손오공을 잠깐 스쳤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막내 아이가 저렇게 기를 쓰고 반대를 했을 때부터 조금 찝찝하기도 했고.”

어쩐지 이제는 한결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더 싸움을 이어 나가고 싶거든 자네 혼자서 하게. 이 늙은이는 너무 오랜만에 활기차게 움직여서 그런가, 허리가 찌뿌둥하구만. 으으.”

우마왕은 주먹으로 등을 두들기면서 손오공에게 따끔하게 호통을 쳤다.

“뭘 하는 게냐? 큰형이 뼈마디가 쑤신다는데 멀뚱히 서 있기만 하고!”

“조금 전까지 스테이지를 때려 부수던 양반이, 엄살은…….”

“허허! 너도 같이 맞아 볼 테냐?”

“알겠수다.”

손오공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투덜거리면서 축지를 밟아 우마왕의 옆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에고고. 힘들구만.”

“그러니 나이 좀 생각하지 그랬소?”

“대체 내가 왜 무리해서 이런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게냐?”

“아, 예이예이. 저 때문이겠죠. 다 제가 죄인입니다요.”

손오공과 우마왕은 정말 조금 전까지 서로 죽일 듯이 맞붙었던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마치 친형제처럼 티격태격하면서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진가 보다. 내 형은 내가 챙길 테니, 네 형은 네가 알아서 잘 챙겨라.』

차정우에게 메시지를 하나 남기면서.

[‘손오공’과 ‘우마왕’이 스테이지에서 퇴장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졸지에 홀로 남게 된 통천교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아야만 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 리는 만무한 일.

그러던 그녀 앞으로, 갑자기 하늘에 맺힌 구체에서부터 유리 파편 같은 것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칠흑왕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이물질’이라고 생각되어 밖으로 배출된, 이블케의 신화 조각이었다.

그런데.

-오효효효! 오케아노스, 비마질다라를 잘 살펴보도록 하세요. 그라면 길을 내기가 편할 테니.

-교주,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비마질다라가 그렇게 죽어 버린 데에는……

-모든 것이 이런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니. 피안을 만들어 모두를 그곳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모든 번뇌와 불안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 속에는 이블케가 어떻게 오케아노스를 부려서 비마질다라를 위험으로 빠뜨렸는지.

그리고 비마질다라의 죽음을 연우가 이끌었다며 통천교주에게 접근했던 것까지, 그간에 있었던 일련의 내용을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었다.

애당초 이번 전투에 참전하게 된 실질적인 계기가 비마질다라의 희생에 대한 복수였던 그녀로서는…… 허무하기만 한 내용이었다.

『……그렇군. 내가 멍청하게 속고 있었던 거였나.』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는 오랜 옛날,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통천교주가 절교의 통치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양부나 마찬가지였던 비마질다라 덕분이었으며.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던 비마질다라가 절교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것도 전부 그녀 때문이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본 녀는 멍청하게 이용만 당하는구나.』

수많은 ‘꿈’을 전전하면서 비마질다라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장소를 찾던 그녀로서는 쓸쓸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휘리릭!

결국 통천교주도 어깨가 축 늘어진 상태로 스테이지를 빠져나가고.

[‘통천교주’가 스테이지에서 퇴장했습니다!]

장소에 남아 있게 된 건, 차정우 일행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으로 새로운 내용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천마’가 당신들을 창공 도서관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참고로 현재 려의 횃불이 완성되기까지 예상되는 대기 시간은 ???:???:???_??? 입니다.]

“…….”

차정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빨리 레아 등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천마가 부른다는 내용만으로도 메시지가 주는 무게가 엄청났다. 여태껏 방관하기만 하던 그가 나선다는 건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녹턴의 얼굴도 바짝 굳은 것이 보였다.

하지만 레아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차정우도 곧 갈등을 멈추고 메시지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화아악!

빛무리가 일행을 감쌌다.

* * *

[창공 도서관에 입장했습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차정우 등을 맞은 것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도서관이었다.

『……아카식 레코드에 이렇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크로노스는 어느새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라면, 모든 우주의 기록들이 담겨 있다는 곳이 아닙니까? 그런 곳이 정말 있었어요?”

차정우도 어렴풋하게나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홉 왕들 사이에서도 존재 유무에 대한 논쟁이 수도 없이 오고 가던 환상의 세계.

닿는 것만으로도 격이 상승하며, 입장할 수 있다면 천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누구나 침이 튀도록 말하며 갈구하던 지식의 보고가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그런데 그곳이 뜬금없이 왜 여기서 열린 거지?

“그야 내가 사서로 있으니까 그렇지.”

차정우는 크로노스의 대답을 들으려다 말고,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익살맞은 인상을 가진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낯선 인상이었지만, 차정우는 그 눈빛만큼은 아주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

신과 악마들조차도 그 높이를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는 위대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이오.』

그와는 구면인 크로노스가 먼저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천마가 반갑다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애송이, 아들과 아내 앞이라고 이제는 어른 같은 말투도 쓰고. 많이 컸네? 세월이 무상하다, 야. 나 닮아 보겠다고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장으로서의 위신은 좀 세워 주시구려.』

“구려?”

『……주십시오.』

“흐흐.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한다니까.”

크로노스는 천마의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차정우에게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가족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신 분이라지만, 그래도 신왕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어 자신의 위신은 엄청 챙기시는 분인데. 천마 앞에서는 대들 생각도 못 하고 계시니.

“레아도 오랜만이고.”

천마의 시선은 눈인사를 하는 레아에서 차정우에게로 향했다.

“우리가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

“저희를 이리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여간.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성격 급해서는.”

천마는 가볍게 혀를 차다가, 한순간 진중한 얼굴이 되었다.

“하나는 차연우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가족들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우가 전해 달란다. 가족들 모두 사랑한다고.”

『…….』

“…….”

크로노스와 레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차정우는 목 언저리까지 치고 올라온 감정을 억지로 삭이면서 겨우 입을 뗐다.

“하실 경고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라고.”

“……?”

“연우 녀석이 품고 있는 려의 횃불이 더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기존에 칠흑왕이 품고 있던 칠흑도 점차 옅어진다. 그만큼 연우가 완전히 칠흑왕을 장악하고, 초월에도 가까워지는 거지.”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그 밝기가 더 환해질수록 세계에서는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는 거다.”

“……!”

“……!”

『그게 무슨 소리요! 자세히 말해 보시오!』

크로노스가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천마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말한 그대로야. 존재가 완전해질수록 세계에서는 멀어지고, 인지의 대상에서도 점차 벗어나게 된다. 세계…… ‘꿈’과 ‘굴레’의 완전한 바깥에 위치하게 되는 거니까.”

『쉽게 말씀해 주시오. 그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신왕이나 되었던 크로노스가 정말 천마의 말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마는 그런 크로노스의 미련에다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꿈’과 ‘굴레’에 갇혀 있는 너희들의 인지에서도 멀어지게 된다는 뜻이지. 애당초 피조물들이 쉽게 인지할 수 있어서야 ‘지고하다’는 표현은 쓸 수 없을 테니까.”

천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연우는 점차 너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될 거다. ‘칠흑왕’이라는 어렴풋한 형태로만 남게 되어서 나중엔 결국 차연우라는 존재는 아무도 기억 못 하겠지. 세계에서도 녀석이 남긴 흔적이나 업적 따위는 전부 서서히 사라질 거고.”

『말도 안 되오! 아들을 잊는 아버지라니! 부모라니! 가족이라니!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잖……!』

“아까 전에 차연우가 너희들에게 남겨 달라고 했다던 말, 뭐였지?”

『그거야……!』

크로노스는 어떻게 그걸 잊겠냐면서 언성을 높이다가,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말았다.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무슨 말을 했다는 기억이 있었고, 그 내용까지 머릿속에 아른거리건만.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두근, 두근!

크로노스는 불안감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턱밑을 세게 옥죄는 것만 같았다.

“그런 식이다. 아주 가까운 기억부터 서서히 잊히게 될 거다. 세계도 점차 차연우에 대한 기록들을 지워 나갈 거고. 이곳 창공 도서관에서도 사라지고 있어. 봐라.”

크로노스 등은 천마가 가리킨 책장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서고에서 책이 하나둘씩 뽑혀 나오며 커버가 벗겨지고, 종이가 낱장으로 뽑히고, 글자가 사라지며, 끝내 책이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 칸이 누구를 기록하던 책장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우는 애당초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처음에 너희들에게 굳이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서서히 칠흑왕 속으로 침몰해서 잠을 자겠다고 말했던 거고.”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잊히는 건 말이 안 되오! 천마,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는 당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화를 하지 못해야 할……!』

“너, 내 본명 아냐?”

『……!』

“내 다른 별칭은?”

『…….』

“내가 어떤 격을 지니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나?”

크로노스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말했잖아. 천마니 칠흑왕이니 하는 개념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는 절대 못 볼걸? 아냐?”

『…….』

“그리고 네 막내아들은 이걸 전부 다 알고 있는 눈친데?”

크로노스의 시선이 다급히 차정우에게로 향했다.

차정우는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차정우는 연우가 마지막 스테이지에 입장하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뒤에 이어졌던 말까지도.

-날 기억해 줘.

차정우는 단단해진 눈으로 천마와 크로노스에게 말했다.

“사랑한다. 그게 형이 남겼던 말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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