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92화 (792/862)

17화. 데우스 엑스 마키나 (3)

천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녀석을 잊어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래도 황이 되긴 됐나 보구나.”

황이란 ‘꿈’과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

그러니 연우를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차정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자신이 이룩한 경지는 얇아도 너무 얇았다. 스스로 개척한 것이 아니라, 고대신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의 연동이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다시 아래로 추락할 가능성이 컸다. 천마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 이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곳에 사서로 있으면서 영지(靈智)를 쌓아라.”

“영지…….”

“영지란 영혼에 주는 거름과도 같은 거지. 쌓고 또 쌓다 보면 어느새 영혼이 무럭무럭 자라나 있거든. 날 대신해 이곳을 지켜.”

차정우의 눈이 빛났다.

확실히 세계의 모든 기록이 집합되는 이곳에서라면, 천마의 말마따나 영지를 쌓기에 제격일지 모른다.

정말로 전지와 전능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니까.

‘형에 대한 기록들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차정우는 연우에 대한 기억이 잊히는 만큼, 그것을 새롭게 남기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떠올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언젠가 자신이 했던 일들과 아주 비슷했으니까.

그러다.

‘이미 사서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구나.’

차정우는 뒤늦게 당연히 이곳에 남아 있을 거라고 결정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천마에게 휘말린 것도 같았지만.

그것이 기분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

“떠날 생각이십니까?”

천마가 당연하지 않으냐는 투로 콧방귀를 뀌었다.

“야, 내가 대체 여기에 얼마나 짱박혀 있었다고 생각하냐?”

“글…… 쎄요?”

“매번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집안일은 전혀 돌보지도 않는다고 마누라 잔소리가 얼마나 심한지 아니? 으!”

몸서리치는 천마를 보면서 차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잘 아시면서 유부남인 저는 이곳에 박아 두려 하시네요?”

“나만 아니면 되니까.”

뻔뻔한 대답.

차정우는 순간 왜 연우가 그토록 천마를 만나면 낯짝을 한 대 갈기고 싶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고마움이나 감사함과는 전혀 다른 거였다.

“그리고 나도 이제 바깥일은 그만 돌보고, 가족들이랑 오붓한 시간 좀 보내고 싶다. 이 일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그러면서 천마의 시선이 저절로 녹턴에게로 향했다.

녹턴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고.

그 순간, 차정우는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녹턴은 21층에 남아 있던 올포원-비바스바트의 환영이다. 아니, 환영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 뿐.

실제로 녹턴이 환영이라는 증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녹턴이 환영이 아니라면?

‘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올포원이 환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먼 과거. 비바스바트란 이름을 가진 플레이어가 21층 관문에 도전했고, 거기서 1위 기록을 달성하던 중에 갑자기 어떤 ‘오류’가 생기면서 플레이어와 환영 간의 혼선이 생긴 것이라면?

그래서 두 개체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라면?

물론, 그럴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하지만.

차정우는 어쩐지 그런 일이 정말 벌어졌었다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도 이미 비바스바트는 천마의 아들로서 적잖은 신성을 품고 있었을 테고, 따라서 그를 모방한 데이터에도 다른 작용이 벌어져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전부 차정우가 갑자기 떠올린 추측일 뿐이었다.

증거도 없었고, 심증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고서야, 천마가 아무리 절지천통을 추구한다고 해도, 올포원-비바스바트가 희생되는 것을 슬퍼하면서도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납득이 가질 않았다.

지금 차정우가 보고 있는 천마는 자신의 신념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 같아도, 가족과 자신의 사람들에게만큼은 약해지는 인간적인 면모도 적잖게 있었으니까.

그러나 차정우는 굳이 거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녹턴도 어느 정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천마에게 그것을 묻지는 않았다.

그저 천마가 말없이 이쪽으로 내미는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같이 돌아가지 않겠니?”

“…….”

녹턴은 그 말 속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을 한참 동안 떠올리고 곱씹다가, 묵묵히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륵!

천마와 녹턴은 그렇게 도서관에서 사라졌다.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창공 도서관에서 천마와 녹턴이 퇴장하였습니다!]

[천마가 사서직을 사임하였습니다.]

[후임으로 ‘낮(에로스)’의 태양을 지정하였습니다.]

[사서직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자들이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며, 매일 같이 추가되는 수많은 서적들을 관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차정우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다가, 크로노스와 레아를 돌아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우를 기록한 책자는 꾸준히 해체되었다가 소멸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부모님의 눈가에는 안타까움이 잔뜩 맺혀 있었다.

“잘할 수 있겠니?”

“그럼요. 제가 또 맡은 일은 잘하잖아요?”

“내 아들…… 한 번만 안아 보자.”

레아는 막내아들에게로 다가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힘든 길만을 묵묵히 걷는 아들들이 안쓰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부모로서 응원을 해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몸조심하고. 밥 제때 먹고. 응? 연락도 자주 하고.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렴. 네가 좋아하는 것들 많이 준비해 두고 있을 테니까.”

“에이, 엄마도. 제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여요?”

“내게는 언제나 풀어 두면 다칠까 무서운 어린 아들일 뿐이란다.”

차정우는 레아의 따스한 온정을 느끼다가, 씁쓸하게 이쪽을 보고 있던 크로노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들들이 없는 동안, 엄마 아빠는 간만에 못다 한 신혼 생활이나 즐기련다.』

“조심하세요.”

『뭘?』

“저 막내 자리 뺏기기 싫어요.”

『……허, 참!』

크로노스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곧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다독였다.

『네 처와 세샤에게는 잘 말해 두마.』

“또 바가지 엄청 긁히겠네요.”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나처…… 험험! 하여간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크로노스는 장난을 치려다가 레아가 도끼눈으로 째려보자 재빨리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차정우를 바라보는 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서가 아닌 사람은 창공 도서관에 머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차정우는 차정우 나름대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겠다 싶어서 자리를 비켜 주려는 것이다.

[창공 도서관에서 ‘크로노스’와 ‘레아’가 퇴장했습니다.]

……

차정우는 떠나는 부모님을 가만히 배웅하다가, 곧 숨을 크게 고르면서 메시지를 손끝으로 두들겼다.

[사서직을 승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창공 도서관의 새로운 사서로 ‘낮(에로스)’의 주인이 임명되었습니다!]

[칭호, ‘창공 도서관의 사서’가 생성되었습니다.]

……

세상이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활한 관리를 위한 튜토리얼을 제공합니다.]

……

[관리를 위한 매뉴얼이 제공됩니다.]

……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은 건지.

단순히 책자가 온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만이 전부일 줄 알았는데, 절대 그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방대한 구역의 구조를 알아야 했고, 어느 위치 어느 부근에 어떤 기록들이 모여 있는지 분류 체계도 일일이 다 파악해 둬야만 했다.

새롭게 추가되는 서적이 있으면, 제멋대로 아무 데나 꽂혀 있는 경우가 많아 일일이 체크해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 줘야 했고.

너무 오래되어 낡은 책자들이 있으면 커버를 갈아 주고, 흐릿해져서 잘 안 보이는 글자가 있으면 따로 자료를 찾아서 추가를 하는 등……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숙달될 즈음에야, 차정우는 알 수 있었다.

천마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둘러대긴 했었지만, 결국 이런 중노동이 힘들어서 내뺐다는 것을.

“젠장! 또 속았어!”

* * *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육체는 창공 도서관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하면 기록을 찾아보았고, 심심하다 싶으면 메시지를 보내면서 잡담도 나누곤 했다.

여전히 도서관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숙달되고 나니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저것도 얼마 안 남았네.”

그러다 차정우는 연우를 상징하는 서고가 어느새 많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자신도 서서히 연우에 대한 기억들이 흐릿해지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완전한 칠흑왕이 되기 위한 연우의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있단 뜻일 테지만.

반대로 차정우는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여간 좀 천천히 하지. 성격만 급해서는.”

아직 충분히 영지를 다 쌓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서두르기만 해서야 자신이 보조를 맞추기가 너무 어렵지 않나.

하지만 연우에게 타인을 배려하는 측은지심(?) 따위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생은 자신이 다 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네.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는 수밖에.”

차정우는 결국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준비해 뒀던 것들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로 일지 작성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일기장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반적인 일지는 그날 있었던 업무 내용을 객관적인 문체로 기술해야 하는 반면에, 자신이 쓰는 일지는 업무 내용뿐만 아니라 그날 가졌던 생각들이나 연우에 대한 추억담 따위를 서술하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딸 세샤가 그날 했었던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기도 하고, 다시 신혼부부로 되돌아간 부모님의 생활을 살짝 훔쳐보면서 요약해 두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동생이 생길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 내용이 층층이 쌓여만 갔다.

세샤가 대학을 가겠다고 자기 엄마에게 말했다. 언제는 공부 따위는 자기와 안 맞는다고 계속 연예인으로 있을 거라고 아난타와 그렇게 싸워 대더니. 그런데 가겠다고 한 전공이 철학과였다. 문과라니…… 안 된다, 딸아. 이과를 가려무나. 거긴 취업이 안 돼요.

반란에 실패하고 올림포스에서 도망쳤던 제우스가 아버지에게 잡혔다고 한다. 다른 신들도 적잖게 동요했었다던데. 나는 얼굴조차 모르는 형제들…… 그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난감하긴 하다.

천마에 대한 기록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어디다 숨긴 건가? 흑역사 있으면 찾아다가 좀 놀리고 싶은데.

대신에 형의 흑역사는 몇 개 찾아냈다. 와…… 고2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자 사귀다가 보름 만에 차였었네? 그때 유독 성깔머리가 더럽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거 때문이었어? 하여간 나오기만 해 봐, 진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 차정우는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생체 시계로도 지구의 시간은 그렇게 와닿는 시간이 아니었다.

책자가 사라진다. 이제 남은 칸은 딱 한 칸.

대체 얼마나 이렇게 있으려고 저러는 거야? 하여간 사람 걱정 끼치는 데는 도가 됐어요. 방구석 폐인 새끼.

지구 시간으로 이제…… 백 년쯤 지났나?

200? 아니, 300이었나?

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처음에는 가벼운 어투로 가득했던 일지가, 점차 무거워졌다.

신과 악마들 중에도 형을 기억하는 자가 거의 없어졌다. 아가레스나 아테나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끝내는 그들도 전부 형을 잊어버릴 테지.

이제 남은 책자는 단 하나.

하나 있는 책자마저도 페이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달랑 두 페이지. 저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일지를 써 내려가는 차정우의 펜촉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이제 남은 페이지는 하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형을 완전히 잊으셨다.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신다.

아난타도 잊었다.

삼촌이 언제 돌아오냐며 징징대던 세샤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제 기억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아니, 둘인가?

에도라.

불쌍하고 가녀리기만 한 우리 형수님. 형이 돌아오면 그냥 발로 뻥 걷어차 버려요. 제가 응원할 테니까.

그러다, 차정우는 마지막 남은 책자의 맨 끝 페이지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페이지에는 단 한 단어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다다랐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추할 시간도 없었다. 금세 부서져 사라졌으니까.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다.

이제 곧.

나도 형을 잊어버리게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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