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데우스 엑스 마키나 (4)
탁!
차정우는 쓰고 있던 일기장을 덮었다.
“…….”
그리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차연우. 나와는 쌍둥이 형제…… 칠흑왕. 인성 파탄자. 군인. 독식자. 영왕사왕신왕. 거마신룡…… 그래도 다행히 내 기억은 온전해.”
차정우는 그것이 자신이 그만큼 영지를 쌓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몇 번이고 위험할 뻔했었다.
칠흑왕의 존재는 기억나지만, 이름이 온통 먹물로 칠해져 있는 식이었다. 마치 탑에서 블라인드 처리된 이름이 ### 따위로 표기 되듯이. 연우의 이름도 언젠가 그렇게 인식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블라인드를 치우려고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던지. 차정우는 아직도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바로 그런 위기를 맞을 뻔했다.
마지막 페이지가 떨어진 순간, 그의 머리 한편에서도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나간 듯한 위화감이 들었으니까.
떨어져 나간 조각이 크지 않았더라면, 절대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차정우는 이럴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결여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체득해 둔 상태였고.
자신이 여태 쌓은 신화들을 모조리 헤집으면서 결여된 부분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앞뒤에 주어진 단서들을 문맥에 맞게 유추하여 보완하면서 기억을 온전히 복구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결여가 사라졌습니다!]
[칠흑왕에 대한 인지가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차정우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제 다시 그런 위기가 찾아올지 몰랐다.
연우를 상징하던 서고는 이제 텅텅 비었으니까.
아니, 서고 자체도 싹 사라지고 없었다.
창공 도서관에서 천마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칠흑왕에 대한 것도 이제 남아 있질 않게 된 것이다.
이제 그를 기억하고 있는 건 딱 한 사람. 자신뿐.
그러니 어떻게든 기억을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아래 세계까지 따지자면 에도라도 있었지만…… 필멸자인 그녀의 기억이 얼마나 더 이어질 수 있을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젠 정말 계속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나.”
차정우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어떻게든 삭이고 또 삭였다.
* * *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시간은 계속 흘렀다.
집행자니 대적자니 하는 운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데도 불구하고.
종말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껴나 있었다.
거기서 차정우는 연우가 완전히 칠흑왕을 독차지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일 자아가 된 거겠지. 참 대단해, 우리 형. 어떻게 그걸 잡아먹을 생각을 다 하냐? 배 안 터지나 몰라.”
아마도 완전한 칠흑왕이 되고 나서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탈피하기 위해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초월을 통해 칠흑왕이라는 한계마저도 벗어던지겠다던 게 애당초 연우가 가졌던 생각이었으니까.
문제는 차정우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초월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연우는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차정우는 형을 기억했다.
하지만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그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계속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차정우는 칠흑왕에 대한 연구에 몰입했다.
천마와 칠흑왕이 숱하게 일으켰다던 ‘꿈’과 ‘굴레’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우주 창생 이전부터 있었다던 수미산에 대한 기록들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다행히 자신이 있는 곳이 모든 기록들을 저장해 둔다는 아카식 레코드였기 때문에 조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량이 너무 방대한 나머지 그것을 분류하고 처리하는 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뿐.
하지만 차정우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고, 오랫동안 사서직을 맡아 오다 보니 이런 작업쯤은 이제 아주 당연하게 여겨졌다.
[지금은 잊힌 옛 사실들을 탐독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비밀을 풀었습니다. 56, 57…… 61%.]
[우주 창생의 신비를 풀었습니다. 72, 73…… 80%.]
……
[‘낮(에로스)’의 태양이 내뿜는 빛이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나 모든 우주를 비춥니다!]
[새로운 신격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알.”
차정우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알이었구나. 칠흑왕은.”
여태껏 칠흑왕을 천마와 같은 ‘존재’로 인식해 왔던 그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왜 여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칠흑왕은 사실 개념적인 존재이니만큼 단순히 ‘사물’로 분류해도 되는 것을.
칠흑왕이니 자아니 하는 단어들이. 타계의 신들이 아버지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 대던 것들이 그동안 인지에 오류를 일으켰던 것 같았다.
이래서 고정 관념이라는 것은 무서운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헤집으면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칠흑왕은 아직 부화하지 못한 새라고.
아주 거대하고 단단해서 아무도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지만, 우주 창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던 그것은 어떤 일을 계기로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지도 몰랐다.
다만, 껍데기가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알 속에 있는 새가 부수고 나오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 속에 있던 자아들은 모두 그런 새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고.’
세계를 종말로 이끌었던 집행자들이 왜 여태 마성으로 남아 있었던 걸까? 그들의 한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활발하게 작동하기를 바란 세계의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냥 단순한 억측일지 몰라도, 차정우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한다면, 밖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직접 그 껍데기를 밖에서 직접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정우가 그동안 아무리 많은 영지를 쌓고 격을 끌어올렸다고 해도, 같은 황이 되었어도, 천마와 칠흑왕이라는 자리는 너무나 높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껍데기를 쉽게 깰 수 있도록 두께를 약하게 만드는 건 가능할 거야.’
그렇다면 방법은 아주 간단해졌다.
세계가 형을 인지할 수 있도록, 많은 기록과 업적들을 남기자. 지워진다면 다시 쓰고, 비틀어진다면 더 크게 키워 버리자.
‘꿈’이나 ‘굴레’에 가까워질수록, 칠흑왕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도 점차 엷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다 보면 형도 알아서 껍데기에다 구멍을 낼 거고…… 그 구멍을 내가 빨리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차정우는 더 이상 창공 도서관에 있지 않고, 밖으로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잊힌 연우의 기록을 복원시킨다는 건, 절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닐 테니까.
문제는 그런다고 해서 당장 사서직을 포기할 수 있는 건 아니란 점이었으니.
다시 돌아왔을 때 일이 많아질 것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형도 같이 시키지, 뭐.”
차정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간만에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바깥 세계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사서가 외출을 시도합니다!]
[‘낮(에로스)’의 태양이 다시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합니다.]
[절지천통이 무시됩니다.
[인과율이 무시됩니다.]
……
[오류! 섭리에 치명적인 피해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오류! 진리에 노골적인 개입이 시도됩니다.]
……
[억제자인 천마가 모든 오류를 무시합니다.]
……
[세계의 섭리와 우주의 진리가 기계론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신격이 추가되었습니다.]
[신명: 데우스 엑스 마키나.]
* * *
“아직도 하늘 보고 있냐?”
“…….”
판트는 오늘도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서서 가만히 밤 하늘을 보고 있는 에도라를 보면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언제부턴가 계속 이어지던 여동생의 기행은 그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변덕이라고만 생각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친남매가 그러하듯, 그 역시 여동생의 속마음을 짐작하기란 너무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말수도 부쩍 줄어들고, 심안을 활짝 연 채로 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가 많아져 내심 걱정이 되었다.
어련히 자기 일을 알아서 잘 챙기겠냐마는…… 그래도 오빠로서 그런 동생의 변화에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에도라는 이쪽을 보면서 가만히 웃어 주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너무 슬퍼 보여서, 판트로서는 더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기에 뭐가 있다고 그래?”
물론, 판트는 에도라가 이번에도 아무 대답을 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태 아무리 채근해도 답해 주질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래도 대답다운 대답을 해주었다.
아주 짤막했지만.
“낭군.”
“엥? 너 남자친구 있었냐? 모솔이었잖……!”
퍽!
판트는 깐죽대다 말고 에도라가 날린 검집에 얼굴을 세게 후려맞아야만 했다.
탁탁!
에도라는 가볍게 손을 털면서 대답했다.
“상상 속.”
“…….”
판트는 무언가 억울해져서 하고 싶은 말이 들끓었지만, 에도라의 심기가 적잖게 불편한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속으로 꿍얼거리기만 할 뿐.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래도 계속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목 디스크 올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판트는 더 따지고 들어 봤자 자신의 머리만 아플 것 같다는 생각에 그저 에도라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음?’
그러다 문득 이 동작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 준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는 아닌데?’
돌아가신 선대 왕은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절대 이렇게 다독여 주었던 분은 아니었으니까.
이건 오히려 그보다 더 친밀하고 소중했던 사람이 해 준 기분이었다.
그럼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도 항상 일에 치인 나머지 부모로서 그렇게 살가운 분은 되지 못했었다.
그럼 대체 뭘까?
‘뭐, 별거 아니겠지.’
고민은 잠깐일 뿐이었다.
애당초 생각을 깊게 하는 걸 딱 질색하는 게 판트였으니. 정말 소중한 기억이라면 나중에 알아서 떠오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판트는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에도라는 물끄러미 판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서는. 저러니 매번 깜빡깜빡하지. 자기한테도 소중한 기억이었으면서.”
물론, 이렇게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나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최근 에도라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도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라고 왜 판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에게 큰 우산이 되어 주던 사람이 있었고, 무왕에게 셋째 제자가 있었노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하지만 판트는 그때마다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떠올리는 듯하다가도 금세 얼마 가지 않아 잊었다. 그라고 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세계가 그것이 당연하다며 그런 식으로 작동했을 뿐.
필멸(必滅).
언젠가 어머니 영매가 연우의 운명이자 사주라면서 내어 줬던 점괘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존재했던 흔적이 지워지고, 소중했던 사람들에게도 잊힌다면…… 그것이야말로 필멸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다만, 에도라는 세계는 잊었을지 몰라도 자신만큼은 어떻게든 그를 기억하고자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메시지: 곧 찾아가마. 미안하다.]
언젠가 연우가 보내 주었던 메시지는 아직도 망막 한쪽 구석에 소중히 놔두고 있었다.
십 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할까?
‘돌아오기만 해 봐요. 정말 그땐 실컷 바가지를 긁어 주려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밤하늘에 맺힌 별들이 계속 돌아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며, 가을이 왔다가, 겨울이 졌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계절이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에도라는 항상 밤만 되면 똑같이 언덕에 올라 똑같은 자리에서 매번 달라지는 밤하늘을 보고 또 봤다.
언제나 철없는 오빠일 줄로만 알았던 판트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았다. 언제나 총명하게 반짝이던 에도라의 눈동자는 이제 현명함이 담겨 깊게 착 가라앉고, 손등에는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묻어났다.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던 밤하늘도…… 이제 판트의 고손자가 가져다준 흔들의자에 앉아 지켜보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우시다. 판트와 똑같은 이름을 물려 받은 어린 고손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 할머니!”
“그래. 내 똥강아지. 뭐가 그리 궁금한 얼굴인지 모르겠구나.”
“똥강아지 아니라니까요!”
“그래. 똥강아지야. 뭐가 궁금하냐?”
“우씨!”
나도 벌써 열 살이나 되었는데! 어린 고손자는 불만 어린 투로 뺨을 크게 부풀렸지만, 곧 바람을 빼고 작은 고조할머니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근데 할머니는 뭘 그리 보시는 거예요? 하늘에는 별 말고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나는 별을 보는 게 아니란다.”
“그럼요?”
“옛 추억이지.”
“……?”
“이 할미가 젊은 시절에 겪었던 것들, 이야기 좀 해 줄까?”
“네! 궁금해요!”
에도라의 주름진 눈가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어린 고손자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