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에필로그, 마지막 장 (1)
“빨리 와요.”
“알았어. 금방 갈게.”
파아아!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과 노년의 슬픔을 겸비하고 있던 에도라는 연우의 손을 잡고 있던 그대로 조용히 빛무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한순간 자리에 남았던 연우는 떨리는 손길로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앞으로는 절대 떨어지지 말자며 웃던 에도라의 미소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 반대로 몸을 돌렸다.
차정우가 거기에 서 있었다.
“형이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고. 신기하네.”
“고맙다. 날 찾아줘서.”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기억해 줘서.”
연우가 입술을 벙긋거릴 때마다 육성 대신에 주변으로 활자가 튀어나와 뱅그르르 돌다가 사라졌다.
과거 심연으로 들어가 처음 마성들과 마주쳤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광경.
그들은 항상 정제되지 않은 사념을 풍기고 있어서, 그것을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활자라는 수단을 사용해야만 했다.
아직 연우가 칠흑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곳에 연우가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관측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조금씩 그 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이제 다 끝나 가니까.”
“네 도움만 많이 받는구나.”
“헛소리하네. 그동안 형이 나 도와준 건 생각도 안 하냐? 그거까지 따지면 내가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어쭈, 많이 컸다.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우리가 쌍둥이이긴 해도 키는 내가 더 크거든?”
“뭐라는 거야.”
연우는 팔짱을 낀 채로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특별할 것 없이 형제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었지만.
차정우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기만 했다.
“형수님 기다리시겠다. 빨리 가.”
“이따 보자.”
그 말에 차정우가 한순간 멈칫거렸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그래. 이따 봐.”
연우의 잔상도 똑같이 흩어져 사라지고.
차정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왕을 관측한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일부가 세계에 인지됩니다.]
[일부가 세계에 확정됩니다.]
……
[외뿔부족에 칠흑왕에 대한 이야기가 개시됩니다!]
차정우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에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았다.
* * *
[라스트 퀘스트(칠흑 관측)가 생성되었습니다!]
[라스트 퀘스트 / 칠흑 관측]
설명: 칠흑왕의 주 자아였던 ###(이름을 표기할 수 없습니다)는 이쪽에서 도저히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기나긴 세월을 지나 드디어 모든 다른 자아들을 흡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는 칠흑왕 그 자체가 되는 데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칠흑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월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보낸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꿈’과 ‘굴레’를 위협하던 종말은 정지되었다고 하나, 그 많은 시간까지 소모해 버린다면 결국 ‘꿈’과 ‘굴레’는 가지고 있던 내구도가 망가져 저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가 칠흑왕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은 ‘꿈’과 ‘굴레’를 구성하고 있는 법칙과 섭리를 지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니 충분히 방법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 존재를 일부나마 ‘꿈’과 ‘굴레’ 안쪽으로 끌어오십시오.
제한 조건: 칠흑왕의 관측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제한 시간: -
달성 조건:
1. 칠흑왕 존재 관측
2. 칠흑왕 존재 인식
3. 칠흑왕 존재 정의
4. 칠흑왕 존재 규정
……
보상 시: 칠흑왕의 현신(現身).
실패 시: 칠흑왕의 망각(忘却).
불확정성으로 가득한 미시의 세계에서 존재의 궤적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고,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관측하고 인지하기 전까지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있을 수 있기에 추측하는 것만이 전부일 뿐.
하지만 관찰자가 그것을 관측한 순간, 존재는 비로소 숨겨진 형태를 갖추면서 의의를 지니게 된다.
칠흑왕이라는 존재가 그러했다.
칠흑왕은 ‘꿈’과 ‘굴레’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다. 미시의 세계 곳곳에 숨어 있으면서도, 거시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기처럼 칠흑왕을 아주 쉽게 접하면서도 절대 그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한다.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하고, 아직까지 발견된 법칙 정도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연우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연우가 점차 칠흑왕에 동화될수록 사람들의 인지 영역에서도 저절로 벗어날 수밖에 없으니, 계속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천마는 자신을 빛이라고 했었지. 빛은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칠흑왕은 미지와 불확실의 영역이니…… 그것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결국 강제로 사람들이 관측하고 인지하게만 해야 한다.’
하지만 신들조차도 깊게 인식할 수 없는 칠흑왕을 어떻게 피조물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그래서 차정우는 편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연우를 관측하고 인지할 수 있는 도구로 신화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차정우는 ‘꿈’과 ‘굴레’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우주를 바쁘게 누비기 시작했다.
연우에 대한 기록들을 재발굴하고자 했고, 그와 관련된 신화들을 마구 퍼뜨렸다.
[칠흑왕에 대한 신화가 퍼져 나갑니다!]
[일부 신화가 삭제됩니다.]
[일부 신화가 전승됩니다.]
단순한 소문, 무용담, 구전 설화, 소설, 서사시 등등……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퍼져 나갔다.
이야기들은 저마다 변용을 일으키면서 연우와는 전혀 무관한 존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와 사뭇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빚어내기도 했다.
때로는 종말을 집행하는 마왕 같은 이미지이면서도, 또 때로는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을 하는 희생자로 그려지기도 했다.
[각색이 이뤄집니다.]
[편집이 이뤄집니다.]
[변용이 이뤄집니다.]
……
[주석이 달립니다.]
[판본이 생깁니다.]
[일부 신화가 칠흑왕과 전혀 무관한 신화로 변질되었습니다.]
[일부 신화가 칠흑왕에 대한 논지를 흩뜨려 놓습니다.]
[경고! 신화가 망가짐에 따라 칠흑왕이라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칠흑왕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경고! 신화는 존재를 규정하는 이야기입니다. 규정이 달라질 시, 칠흑왕이 갖고 있던 설정에 어떤 변화가 가해질지 알 수 없습니다.]
……
[현재 파생되는 칠흑왕의 신화가 진짜 칠흑왕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판단되어 삭제 작업이 중단됩니다.]
그리고 연우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곧장 삭제를 진행하던 세계도 언제부턴가 기능을 정지시켰다.
애당초 차정우가 퍼뜨리고자 했던 것은 연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정확하게는 칠흑왕과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그동안 몇몇만이 알고 있었을 뿐, 베일에 가려진 존재였던 칠흑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신화라는 매개체를 활용하여 친숙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런다면 수많은 피조물들이 칠흑왕에 대해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게 될 테고, 그들이 자라나면서 저절로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던 그를 어떻게든 규정하고자 노력할 테니까.
‘의미 부여’인 셈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관측자가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법이니!
[칠흑왕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칠흑왕의 새로운 정의(定義)가 활발히 논의되는 중입니다.]
[칠흑왕의 새로운 규정(規定)이 활발히 제정되는 중입니다.]
거기 어디에서도 누구보다 인간적이었고 감정적이었던 연우를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신적인 존재들보다도 훨씬 더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형이상학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차정우는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 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우를 가깝게 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철학이 생겨나고, 사조가 파생되며, 예술이 탄생했다.
이 모든 것은 차정우가 전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의 화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
[심연 속에 묻혀 있던 칠흑왕이 조금씩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칠흑왕과 ‘꿈’ 혹은 ‘굴레’의 동화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의념이 꿈틀거립니다.]
[의식이 작동합니다.]
[칠흑왕을 둘러싸고 있던 심연이 옅어집니다.]
[칠흑왕을 둘러싸고 있던 심연에 구멍이 조금씩 생겨납니다.]
[의념의 일부가 세계에 투영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차정우는 연우를 조금씩 감지할 수 있었다. 그동안 심연이라는 껍질에 갇혀 있던 그가 드디어 밖으로 의념을 내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우의 일방적인 움직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의념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똑같이 그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한계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에도라가 마지막으로 연우를 인지한 순간, 차정우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연우는 곧 돌아오리라는 것을.
[‘꿈’이 현실로 변화합니다!]
[‘굴레’에서 축이 제거됩니다!]
* * *
“아버님!”
“대체 어디로 여행을 가신다는 것입니까, 할아버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본 가를 노리는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위험하실지도 모릅니다!”
철사자가(鐵獅子家).
혹은 혈검가(血劍家)라고도 불리는 가문이 있다.
이제는 ‘검신’이라 불리는 혈검 칸이 일군 가문으로, 그가 아르티야에서 쟁쟁한 라이벌이었던 판트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일구었던 세력이 시초가 되었다.
또한, 탑에서 유명 랭커였던 선친 철사자가 완전히 눈을 감기 직전에 그와 극적으로 화해하면서 철사자의 잔존 세력들이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 무서운 속도로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니.
오늘날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 세력으로 변모하게 된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사자처럼 무겁게 앉아 있다던 그들이 돌연 소란스러워졌다.
그동안 은퇴하여 검신전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고 있던 태상가주 칸이 갑자기 외출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가문은 발칵 뒤집힐 수 밖에 없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도 해 주지 않았으니.
그래서 당대 가주를 비롯한 원로들이며 장로들, 간부들과 방계의 제자들까지 모두 몰려들어 그의 결정을 뜯어말리고자 했다. 몇몇은 안전을 핑계 대고자 했지만.
“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누가 있어서?”
“…….”
“…….”
“…….”
그가 콧방귀를 뀌면서 내뱉은 말에 가솔들은 일제히 입술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해도 도저히 말이 안 되는 핑계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대체 누가 있어 태상가주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보라.
분명히 300년도 넘는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20대에서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자의 눈처럼 흉폭함이 느껴지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를 그 나이대라고 생각할 수 없을 터였다.
더구나 실제로 그는 탈각을 넘어 초월을 이룬 지도 오래되었으니.
칭호만 검신인 게 아니라, 진짜 신격을 획득하여 이따금 재해를 일으키는 마수들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 넘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를 떠나보내기 싫은 것은 철사자가가 태상가주요, 태상가주가 곧 철사자가라고 여기는 신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주를 비롯한 가솔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칸이 이미 가문에서 마음이 반쯤 떠나 있다는 것을.
거기다 최근에는 아무 말 없이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것처럼. 혹은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그러던 끝에 이제는 아예 길을 떠나겠다고 선언해 버렸으니.
칸의 증손자이기도 한 가주는 그가 결정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대신에 어디로 가시려는 건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친구를 만나러 간다.”
“친구…… 말씀이십니까?”
가주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상가주께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있었던가? 무리를 이끌면서도 언제나 홀로 고고하게 서 있던 수사자 같았던 태상가주에게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인 외뿔부족의 판트는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을 들었던바. 아무래도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의형제인 도일을 말하는 건가 싶어도, 그를 가리켜 ‘친구’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주는 말꼬리를 늘이면서 의아해했지만.
칸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친구. 그동안 멍청하게 잊고 있었던 소중한 친구. 그에게 사과하러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