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96화 (796/862)

21화. 에필로그, 마지막 장 (2)

한적한 시골.

나무가 잔뜩 우거져 사람도 잘 찾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 칸이 발을 내디뎠다.

“여기도 오랜만이군.”

칸은 자신 앞에 있는 수도원을 보면서 감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처음 의제가 이곳을 지어 달라는 말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한적하게 지내기에는 딱 알맞은 장소였다.

사계절 내내 날씨도 선선하고, 강우량도 적절하다. 세월아 네월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따분한 뒷방에만 있을 게 아니라 자신도 여기에 와 있을 것을.

칸은 그런 후회를 하면서 활짝 열린 수도원의 정문을 통과했다.

때마침 빨랫감을 들고 이동하던 수녀와 눈이 마주쳤다. 수녀는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칸에게로 다가와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군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손님이라. 칸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수도원을 만든 게 자신의 사재(私財)라는 것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는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이들이 모시는 신의 품으로 귀의한 지 오래였고, 자신 역시 젊은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원주에게 가서 전해라.”

그래서 칸은 오랜만에 근엄한 모습이 아닌, 장난기 많았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형이 놀러 왔으니 머리 박을 준비하라고.”

* * *

이름 없는 신의 수도원.

이곳은 신을 모시지만, 딱히 모시는 신이 없는 독특한 특징을 자랑했다. 신념 역시 무신론(無神論)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유신론(有神論)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이곳에 몸을 담은 신관들은 항상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을 이야기했다.

모든 만물에 신이 내재되어 있지만, 공기처럼 늘 옆에 항상 함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관측할 수도 없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는 교리를 내세웠다.

그래서 신관들은 만물과 섭리에 항상 감사함을 느낄 뿐, 따로 신에게 치성을 드리거나 기도를 올리지는 않았다.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따로 신명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래서야 존재를 규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텐데, 오히려 교리에 어긋나는 일일 뿐이었다.

당연히 많은 신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수도원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편이었다.

저들의 교리가 널리 퍼져서야 신도들이 흩어질 테고, 신앙은 더 이상 수확할 수 없게 되어 버릴 테니까.

실제로 몇몇은 아예 제거를 하고자 하기도 했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곳의 수도원장이 웬만한 신격들도 좀처럼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도일.

한때, 탑을 무너뜨렸던 최대 세력의 수장.

그가 있는 영역을 감히 누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그가 일찍이 이름 없는 신에게 귀의한답시고 현역에서 은퇴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르티야가 아직까지 존속해서 수많은 천계의 사회를 위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이를 그만큼이나 먹고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도일은 자신이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만큼은 버럭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의형이라는 인간이 조용히 와도 모자랄망정, 수도원을 아예 발칵 뒤집어 놨으니

덜그럭!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에는 짜증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그럴수록 칸의 웃음은 더 커질 뿐이었지만.

“형이 동생도 못 만나러 오나?”

“이딴 식으로 굴 거면 그냥 가지?”

“너무하는군.”

“아님 그냥 쫓겨날래?”

칸은 미소가 더 익살맞게 변했다.

“내가 만든 수도원에서 내가 쫓겨나게 생겼군.”

“기증하면 끝이지, 무슨. 하여간 왜 온 거야?”

“간만에 동생 보러?”

도일은 더 이상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내려놨던 찻잔 세트를 다시 들어 올렸다.

“아, 아, 알았어! 장난 그만 칠 테니까 앉아 봐, 좀.”

도일은 그런 칸을 영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들에겐 철혈검신(鐵血劍神)이니, 사자왕(獅子王)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신명으로 불릴 정도로 위엄 있게 군다던데. 왜 이 망할 형은 자신 앞에서만 이딴 식으로 구는 걸까.

“차연우.”

“뭐가?”

“네가 모시는 신 이름.”

“……!”

도일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칸의 눈빛은 집요했다.

“맞지?”

“……하아!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언제까지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냐?”

도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바보라서 끝까지 모를 줄 알았지.”

“뒈질래?”

“언제부터 알았는데?”

“얼마 안 됐다. 녀석에 대한 신화가 요즘 많이 퍼지고 있는 거 아냐? 그거 들었을 때, 딱 떠오르더라. 갑자기.”

도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신화?”

“몰랐냐?”

“바깥 일은 그다지 신경 안 쓰니까.”

“칠흑왕에 대한 이름이 좀 많이 퍼지고 있어. 행성이나 문명마다 전승되는 형태는 다 다르지만.”

“신의 이름은 함부로 정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는데. 하여간.”

도일은 자신들의 교리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변화에 툴툴대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안도에 찬 모습이었다.

거기에서 칸은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형처럼 나도 얼마 안 됐어. 계시를 받은 것처럼 갑자기 떠올랐으니까.”

아르티야가 해체된 이후. 도일은 자신에게서 커다란 무언가가 떠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분명히 신관이자, 사도였다. 그런데 자신이 모시는 그 신이 말없이 훌쩍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름도, 신화도, 목소리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면, 신과 자신을 이어 주던 채널링뿐. 하지만 그마저도 부재중이라 항상 노이즈만 잡힐 뿐이었다.

그래서 도일은 허망함을 안고, 칸에게 부탁해서 조용히 은거를 시도했다.

자신이 잃어버린 신을 어떻게든 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의 신은 부재중인 게 아니라, 만물에 모두 녹아 있다고. 그렇게 그의 신이 세계와 융화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교리를 뜯어고쳤다. ‘이름 없는 신’을 좇는 범신론의 교리는 그래서 탄생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따로 신을 계속 쫓고 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섭리와 법칙을 연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낱낱이 해체했다. 그러다 보니 보였다. 가려졌던 이름 세 글자가.

“그래서? 그 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하지만 도일은 굳이 자신이 알아낸 것에 대해서 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나름대로 연우를 어떻게 해야 지각(知覺)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범신론. 공기처럼 항상 익숙하게 있는 존재를 깨닫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럴 리가. 그놈, 같이 찾으러 가자고 온 거지.”

“……방법이 있어?”

사도인 나도 모르는 방법을 찾았다고?

그에 칸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모르지. 가장 가까운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아냐?”

“장난……!”

“하지만 해 볼 만한 일은 있지.”

“뭔…… 데?”

“그놈이 가장 신경 쓸 만한 곳부터 거슬러서 올라가는 거야.”

순간, 도일은 그의 말뜻을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지구로 갈 거다.”

* * *

“……죽겠군.”

레온하르트는 쓰고 있던 안경을 조용히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눈두덩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면서 슬쩍 둘러본 탁상에는 여전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서류의 탑이 잔뜩 놓여 있었다.

이것을 전부 체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레온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기력이 날이 갈수록 쇠락해 간다는 건 그 스스로가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

이전에 잠시 탈각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을 이룰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격이 조금 모자라긴 한다지만, 그것이야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보충할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렇게까지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흐르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늙음이란 고귀한 것이며 죽음이란 고고한 것이다. 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더더욱 아름답고 값진 것이지 않은가. 그것이 평상시 그가 지니고 있는 지론이었고, 그것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젊은 시절에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마지막 남은 미련이 있다면, 그동안 자신이 멍청하게 잊고 있었던 친구이자 은인을 찾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많은 정보들을 검토해 봐도, 도무지 쉽게 결론이 나오질 않았다.

인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를 지각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그를 이곳으로 강제로 끌어오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하나. 당장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레온하르트는 결국 자신이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평생 똑똑한 머리로 세상을 좌지우지했다고 여겼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일이 더 잘 안 풀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될 때까지 한다.

따랑.

탁상 위에 놓인 종을 가볍게 흔들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당대에 최초로 4개의 은하와 142개의 문명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우주 제국, ‘라이온 하트(Lion Heart)’의 초대 황제. 그 앞에서 시종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 준비를 하라.”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지구.”

친구의 고향을 입에 담담히 올리는 동안.

레온하르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이 그의 생에서 마지막 나들이가 될 것 같다는 것을.

* * *

“아, 진짜!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 또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지구!”

“그러니까 거기는 또 왜 가냔 말입니다!”

르 인페르날의 재상, 단탈리온은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들은 손꼽히는 초월자 사회의 이인자로 있고, 개인적으로는 무려 36개나 되는 군단을 이끄는 마왕인 그가 무슨 불만이 있겠냐고 따질지도 모르겠지만.

단탈리온은 그런 그들 앞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자신만큼 불우한 마왕도 없을 거라고.

우선 그는 무늬만 그럴듯한 이인자로 있을 뿐이지, 위계상 위로 70명이나 되는 마왕을 두고 있었다.

하나같이 말이라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툭하면 그를 무시해 대기 바쁜 작자들. 사실 단탈리온이 재상직을 맡게 된 것도, 저들이 전부 귀찮다며 그에게 떠맡기면서 생긴 결과였다.

덕분에 단탈리온은 영지로 가지도 못하고, 300년째 서류 더미에만 파묻힌 채로 살아야 했다.

이래서는 정말 조만간 서류에 압사당해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 거다. 단탈리온은 그런 생각이 계속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드는 건, 수장으로 있는 이 빌어먹을 작자였으니!

“놓아라. 놓지 않는다면 네놈을 씹어먹을 것이다!”

아가레스. 한 사회의 수장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허구한 날 사고를 치기 바쁜 이 양아치가 있는 한 절대 쉬는 날은 없을 터였다.

“씹어 먹으십쇼! 저도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사니까!”

“지금 항명을 하는 것이냐?”

“아, 몰라요! 배 째! 수장이라는 사람이 매번 일 내팽개치고 싸돌아다니면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십쇼!”

평소 마왕답지 않게 소심한 단탈리온이었다면, 아가레스가 눈꼬리를 추켜올리기만 해도 알아서 꼬리를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0년 동안 70명도 넘는 상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여 살며 쌓인 화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으니.

이제는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쉬고 싶다. 그런 갈망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수장이면서도 이렇게 무책임하게 구는 게 문제라는 거군.”

아가레스도 결국 단탈리온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소동을 멈췄다. 광기가 가득하던 두 눈이 갑자기 평온한 바다처럼 잔잔하고 깊어졌다.

순간, 단탈리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제멋대로이기 일쑤인 폭군이 드디어 자신의 말을 들어 주려 하고 있었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걸까. 감격에 찬 나머지 눈가에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히려는데, 아가레스가 엄숙하고 근엄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네가 해라.”

“예? 무슨……?”

“여기 수장.”

[아가레스가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에서 탈퇴했습니다!]

[후임으로 단탈리온을 임명하였습니다!]

“……!”

단탈리온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고.

아가레스는 바로 그 틈을 타 후다닥 궁정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가자, 댕댕아!

멍!

멀리서 그런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아아아악!”

결국 단탈리온은 제정신을 차렸을 때,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면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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