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97화 (797/862)

22화. 에필로그, 마지막 장 (3)

올림포스의 궁정.

“이봐, 누이.”

“왜 그래? 또 아레스랑 헤라클레스가 무슨 사고라도 쳤어?”

헤르메스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다 말고, 신경질적인 얼굴로 고개를 드는 아테나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여간 자신의 누이는 까칠함의 대명사란 말이지. 저러니 헤라는 물론, 포세이돈과도 툭하면 싸워 댔던 것이겠지만.

‘저러고 막내 숙부들한테는 어떻게 그렇게 평온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맞아 죽을 게 분명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막내 숙부들이라. 익숙하면서도 어색하군.’

자신이 말을 걸었던 것도 전부 이것과 관련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비슷해.”

“비슷하다니?”

“두 놈, 방금 지구로 넘어갔거든.”

“뭐? 거긴 왜?”

아테나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지구는 올림포스에 있어 여러모로 애증의 대상이었다. 크로노스와 레아가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주의 법칙을 관장한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지구 출신이기도 했고.

“두 놈만 그런 게 아니야. 요즘 아르티야의 녀석들이 전부 그곳으로 몰리고 있어. 얼마 전에는 아가레스와 펜리르도 넘어갔고.”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건가?”

아르티야의 옛 멤버들을 생각해 본다면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다.

헤르메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확인을 하러 가고 싶은 거겠지.”

확인.

그 단어가 아테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사실 그녀도 조만간에 지구로 넘어갈 생각이긴 했었으니까.

아테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님께서 상당히 화가 많이 나시겠는데.”

크로노스가 지구에 정착한 뒤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다는 소문이 올림포스 내에 무성하다지만, 그래도 한때 우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성정이 어디로 가는 건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요즘 그들 가족이 겪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무슨 사달이 벌어져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 풀어 드려야지.”

아테나는 결국 쥐고 있던 펜의 뚜껑을 닫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역시……. 화, 단단히 나신 거 맞네.’

아테나가 지구로 건너온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평상시라면 손녀와 손자가 왔다고 기뻐하면서 아테나와 헤르메스를 맞아 줬을 크로노스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겨를이 없어 보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억지로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것이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치이익!

“야! 고기 타잖아!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뒤집냐?”

“무슨 소리야! 원래 이거 네가 하던 거잖아!”

“나 지금 고기 손질하는 거 안 보여?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구만! 좀 제대로 해!”

“이거 네메르산, 육질 좋은 고기. 얻다 두면 돼?”

“여기, 여기!”

시끌벅적.

웅성웅성.

크로노스가 레아와의 새로운 신혼 생활을 위해서 만든 3층짜리 양옥의 마당은…… 온통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면서 도저히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조달한 건지, 번개탄이며 숯까지 가져와서 불을 피워 대고, 고기 굽고, 뒷마당에 있는 텃밭에서 허락 없이 상추와 깻잎을 뽑아 대고.

그동안 고생고생해서 가꿨던 정원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개판이 되고 말았다.

물론, 단순히 문제가 손님들이 쳐들어와서 집안을 아작 내는 정도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거야 그냥 칼 몇 번 휘둘러서(?) 내쫓아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말을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패 버리면 그만이었고.

하지만 문제는.

응애! 응애!

한 시간 넘게 씨름해서 겨우 잠재웠던 막내가 잠에서 깨 버렸다는 점이었다.

“이 새끼들아, 놀 거면 좀 딴 데 가서 처놀아! 우리 애기 깨잖아!”

이제 신위가 거의 다 회복되면서 진언(眞言)이 아닌 육성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크로노스는 이 반갑지 않은 손님들에게 제발 꺼져 달라고 소리쳤다.

순간, 고기를 굽고 있던 칸과 도일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가고, 레온하르트는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아가레스와 펜리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만 멀뚱히 서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릴 뿐.

그러나 결국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누구도 크로노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눈치 보고 뭉그적대면서 여기에 눌러앉으려는 낌새가 너무 잘 보였다.

응애애애!

“아, 좀!”

아테나는 그런 크로노스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식을 많이 낳고 키웠어도, 막상 다시 육아를 시작하면 사람이 저렇게 피폐해지는구나 싶었으니까.

사실 그녀도 처음 ‘고모’라고 불러야 하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까무러쳤는지 모른다.

크로노스와 레아가 열심히 깨를 볶아 대는 거야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지만, 그래도 참 대단하시다 싶었으니까.

‘능력도 참 좋으시지…….’

가뜩이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만 하더라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올림포스 내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데, 여기에 새로운 상관(?)이 하나 더 추가되었단 소식에 모두가 하나같이 비명을 질렀었다.

아직 크로노스와 완전히 화해는 하지 못했던 포세이돈 등은 너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냇동생이 생겼단 소식에 묘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고.

하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크로노스와 레아는 ‘부활’을 이룬 뒤에도 딱히 올림포스에 관여를 한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올림포스에서도 자신들에게 개입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선을 지켜 왔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래도 사적으로 크로노스 부부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아테나로서는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은 막내 고모가 참 신기하게만 여겨질 따름이었으니.

크로노스가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미 몇 번씩이나 봤기 때문에 아주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함과는 별개로 볼 때마다 내심 놀라웠다.

명성보다 악명이 더 높은 신왕이 정말 맞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내 말은 콧구멍으로도 안 듣는다, 이거지? 오냐. 들을 때까지 한번 칼부림해 보자.”

크로노스는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신력을 잔뜩 끌어 올렸다. 쿠쿠쿠, 미약하게나마 다시 땅이 흔들렸다.

마당에 있던 아르티야의 멤버들도 하나같이 크로노스가 진심으로 살의를 드러내려 한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하는데.

응애애!

다시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애들처럼 굴지 말고 어서 안 들어와? 기저귀 가져와! 얼른!”

“……넵!”

뒤이어 레아의 잔소리까지 날아오자, 크로노스는 재빨리 신력을 거두면서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다.

영락없이 육아에 쫓기는 아빠의 뒷모습이었다.

아르티야의 멤버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어?’

아테나도 똑같이 웃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아르티야 멤버들 사이로…… 흐릿하게나마 다른 사람이 섞여 있었으니까.

그 사람은 검은 동공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똑같은 생김새였지만, 그와 달리 검은 코트를 입고 있어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숙…… 부님?”

아테나가 그를 가만히 불렀고.

다른 사람들 틈에서 웃고 있던 그도 살짝 놀라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피식!

그는 아테나를 보면서 가볍게 한 번 웃어 주고는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환영이라고 여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지만.

아테나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어야만 했다.

그가 사라지기 전에 입술을 달싹이며 했던 말이 아직도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으니까.

기억해 줬구나.

고맙다.

그 순간, 아테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둘씩 기억하기 시작한 그가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래서 한동안은 여기서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멤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들이 오랜만에 모여 이렇게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는 건, 전부 그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이곳을 찾으리라고 여기기 때문이었으니까.

* * *

[인지가 시작됩니다!]

[의미가 부여됩니다.]

[규정이 확립됩니다.]

……

[‘꿈’이 현실과 동화되기 시작합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옅어집니다.]

[‘굴레’에서 축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

[여러 관측에 따라 미시 세계가 각 관측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합니다.]

[여러 정의에 따라 거시 세계가 각 정의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됩니다.]

[시간 좌표가 분화합니다.]

[공간 좌표가 굴절됩니다.]

[세계점(世界點)이 증가합니다!]

……

[일직선상에 놓인 세계점이 하나의 궤적으로 연결됩니다.]

[세계선(世界線)이 생성되었습니다.]

……

[인지와 규정의 정도에 따라 세계선에 변화가 벌어집니다.]

[일부 세계선이 분화합니다.]

[일부 세계선이 역전합니다.]

[일부 세계선이 삭제됩니다.]

[일부 세계선이 합쳐집니다.]

……

[곳곳에서 칠흑왕이 관찰되기 시작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세계선을 자신의 법칙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칠흑의 ‘꿈’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법칙이 맞물립니다!]

찰칵-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심연에 접속했습니다.]

차정우는 눈을 떴다.

‘이런 곳에 계속 있었나, 형은?’

발아래에는 푸른 빛깔을 내는 거대한 강이 마치 은하수처럼 칠흑을 가르면서 굽이치고 있었다.

차정우는 저것이 바로 ‘영혼의 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환전생의 시스템을 관장한다는 세계수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환생하고자 하는 영혼이 있으면 여기서 빨아들여 열매로 맺히게 하고, 열매가 수명이 다하게 되면 저절로 강에 떨어져 다시 다른 영혼들처럼 강을 이루게 된다.

지성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다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

또한 이제는 ‘꿈’이니 ‘굴레’니 하는 개념이 사라져 버린 현 우주의 뿌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차정우는 하늘 날개를 활짝 펼쳐 그 강을 따라 이동했다.

도도한 강줄기는 여느 강이 그러하듯이 도중에 수없이 많이 갈라지고, 또 어디선가 흘러온 다른 강줄기와 합쳐지는 등, 거미줄처럼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강줄기 사이사이에는 호수 같은 웅덩이가 곳곳에 맺혀 있었으니. 강줄기가 도중에 방향을 바꾸면서 만들어진 호수.

차정우는 이것을 ‘세계점’이라고 불렀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새롭게 가능성을 품고, 독자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우주이기도 했다.

“이 새끼들아, 놀 거면 좀 딴 데 가서 처놀아! 우리 애기 깨잖아!”

“우리 아버지, 나이를 계속 드셔도 참 걸걸하시단 말이지.”

차정우는 그 세계점에서 보이는 사건을 힐끗 엿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나이에 동생이라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콩달콩하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했던 우려가 진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세샤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제는 하나둘씩 연우를 기억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그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우주를 건너고, 세계를 뛰어넘으면서 차정우는 그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칠흑왕에 대해 ‘인식’하기를 바랐다.

그가 퍼뜨린 신화가 세월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갖추고, 정의하며, 규정하는 동안 칠흑왕의 모양도 다양하게 변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사람들이 칠흑왕에 대해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세계는 분화하기 시작했다.

그 규정에 따라 칠흑왕이 수많은 형상을 갖추게 되니, 그 형상에 맞춰서 세계도 저마다 다양한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점의 탄생이었다.

어떤 세계점에선 칠흑왕이 옛 영웅이었다. 어떤 세계점에서 칠흑왕은 철학적 개념이었고, 또 어떤 세계점에서 칠흑왕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 허상이었다.

그런 세계점들은 저마다 비슷한 특징을 지닌 것들끼리 ‘평행우주’라는 개념으로 묶여서 동일한 선상에 놓이고, 하나의 궤적으로 연결되어 세계선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세계선이 다시 분리되고, 삭제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무한대로 퍼져 나갔으니……!

차정우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세계선을, 그리고 그 세계선을 구성하는 세계점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그 모든 곳에 칠흑왕이 있었으니. 거기서 칠흑왕이 어떤 형상을 띠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의 거류 여부도 결정되었다.

거기서 차정우가 찾고자 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차연우라는 형상을 갖추고 있는 칠흑왕이 있는 세계.

너무나 천문학적인 확률이었고, 과연 존재할 수나 있을까 싶은 세계였지만.

차정우는 이 많은 세계선 중에 그런 ‘우연’에 ‘우연’이 수도 없이 겹쳐진 세계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목적지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차정우는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강들을 따라 더더욱 날갯짓에 속도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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