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98화 (798/862)

23화. 에필로그, 마지막 장 (4)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거지?’

연우는 자신의 그런 의문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깥세상과 이쪽 세상의 시간 흐름은 너무나 달랐으니까. 아니,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으니까.

‘천마는 이런 걸 계속 겪고 있었단 건가? 정말이지, 못할 짓이군.’

연우는 내심 천마에 대해서 다르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루함을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었던 건지.

칠흑왕의 자아가 왜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못하고 항상 분열되고, 다른 마성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지를 알 것 같았다.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으니까.

그리고 ‘꿈’에서 계속 깨어나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바로 그런 꿈을 꾸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계속 잠들고 또 들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잠이라면.

아무리 거대한 존재라 할지라도 미쳐 버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결국 여기까지 다다랐구나. 키키킥! 정말이지, 그 애송이가 이렇게까지 클 줄이야. 대단해.

언제였더라.

연우가 한창 마성들을 지우고 다녔을 때, 한 녀석이 죽어 가면서 그런 말을 던졌었다.

연우의 눈에는 그놈이 다 그놈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그 말을 던진 녀석만큼은 누군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칠흑의 늪에서 발견되어 아버지 크로노스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그들 부자(父子)를 수도 없이 괴롭혀 댔던 그놈.

크로노스가 깨어나면서 베어 버리긴 했다지만, 심연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서 사라졌겠거니 하고 여기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를 피해 수많은 마성이 군집해 있는 곳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강해진 연우가 보복할 것이 두려웠겠지. 당시 연우는 녀석에게 단단히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연우가 현인-이블케를 제거한 것을 시작으로 마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고.

그렇게 마성들이 하나하나씩 소거되다 보니, 놈은 결국 연우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저항하려던 녀석을 아주 쉽게 제압했다. 이미 녀석과 자신 사이에 비교를 하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격차가 있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네놈처럼. 모든 걸 다 이뤄 낼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하던 때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나에게도 부모가 있었고, 아내가 있었고, 자식이 있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했지.

왜냐고?

이 빌어먹을 저주의 굴레는 도저히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결국 녀석도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지, 죽어 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분명히 눈은 없었지만, 어쩐지 두 눈이 붉게 충혈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결국 나도 마모되어 다른 나처럼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나도 마찬가지!!

그런데 ‘너’는 이제 다른 나들도 전부 해치우고, ‘너’ 혼자가 되려 하는구나.

너.

연우는 심연 속에서 그 단어가 참 낯설게 느껴졌다.

영원과 억겁을 살아가는 마성들은 심연 속에서 절대 자타(自他)를 구분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범주에는 ‘언젠가’ 칠흑으로 귀속될 예정인 미래의 집행자도 같이 포함되었다.

현인-이블케조차도 언젠가 연우가 마성들과 뒤섞일 것을 알고, 레아와 싸움을 치르면서 연우를 가리켜 ‘나’라고 칭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녀석은 연우를 ‘나’라고 표현하지 않고, ‘너’라고 말했다.

그만큼 스스로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연우를 구분 짓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만.

한편으로는 칠흑이라는 제약에 결국 종속되고 말았던 자신들과 다르게, 아무리 마모되어도 끝까지 저항하고자 발버둥 치는 연우의 모습이 전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주에서, 속박에서, 굴레에서…… 이제 너는 혼자 남게 될 것이다.

시간도 흐르지 않고, 몸을 누일 공간도 없으며, 이야기를 나눌 대상도 없는 이런 더럽게 넓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너 혼자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죽을 수조차도 없지. 네가 죽음, 그 자체니까. 미칠 수도 없다. 그것도 한낱 미몽으로 끝나 원래대로 되돌아와 버릴 테니까.

천마는 뻗어 나가는 빛이기에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다 강제로 새기고, 자신의 껍질이나마 저 밑에다 심어 겨우 외로움이라도 달랠 수 있었다지만.

너는 그러지도 못하는 한낱 어둠이 아니냐? 가라앉고, 또 가라앉지. 너의 가족들은 빛을 볼 수 있을지언정, 어둠은 보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칠흑이기에 결국 세계 밖에서 손가락만 빨고 너의 가족들을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그토록 많은 타계의 신들이 어째서 세계와 우주의 외곽을 떠돌아다니기만 해야 했던가.

왜 창조의 은혜에서 벗어나 그네들끼리만 뭉치고, 존재는 계속 마모되기만 했던가.

전부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너 역시 ‘밖’에 놓이게 될 테니. 아니, 그보다 더 먼 ‘밖’에 놓여 아무도 너를 보지도, 듣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 외롭고 또 외롭겠구나.

마성은 계속 죽어 가면서도, 활자를 쉴 새 없이 쏟아부으며 그렇게 마지막까지 연우를 저주했다.

너는 외로울 것이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녀석은 사라졌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저주를 듣고도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거기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은 모를 것이다. 그 자신은 별생각 없이 뱉었던 ‘너’와 ‘나’의 구분이, 연우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나’가 아니지. 완전히 달라질 거니까.”

시간의 구애라는 것이 없는 녀석이 내뱉은 구분법은 애당초 연우가 그들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될 거란 의미였으니.

그때부터 연우는 더더욱 마성들을 흡수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드디어 마지막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모든 마성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완전한 칠흑왕이 되었습니다.]

[현재 상태: 칠흑왕]

연우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칠흑과 심연의 공간이 자신에게로 완전히 귀속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흔히 프네우마와 퀴리날레로 구분되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까지도.

비록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차연우의 형상을 아바타(Avatar)로 유지하고 있지만, 실상 이런 형체의 구분 따위는 이제 그에게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연우는 의식이 이곳에 완전히 갇혔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단단한 껍데기에 가로막힌 것처럼.

예전에는 우회로를 확보해서 밖으로 의념을 내보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칠흑왕,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편법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완전히 의식을 깬다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무리한다면 심연에서 벗어나 의식을 외부로 팽창시킬 수 있겠지.

그리고 실제로 마성들은 이 지루함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매번 일어나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완전히 깨 버리겠지. ‘꿈’에서.’

잠에서 일어난다는 건, 결국 ‘꿈’을 버린다는 뜻이니. 그때는 세계와 우주도 같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천마가 밖에서 당신을 살피고 있습니다.]

아마도 천마와 다시 한바탕 붙겠지.

연우는 이전의 칠흑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 호락호락하게 잠들지는 않을 거란 생각은 갖고 있었다.

비효율적이던 옛 칠흑왕과 달리, 자신은 힘을 쓰는 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 무엇할까?

그곳에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이 없을 텐데.

[태초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해낼 수 없었던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칠흑왕으로서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칠흑왕이 하던 대로 ‘꿈’을 계속 꿀 수도 있고, 반대로 ‘꿈’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단, 이때 후자를 선택한다면 천마가 당신을 다시 잠재우려 들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를 선택할 경우, 당신의 존재는 점차 세계의 인식에서 벗어나 논외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혹은 제3의 길을 개척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연우는 이 메시지들이 전부 천마가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선택을 하라는 뜻일 테지.

여기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그리고 빌어먹게도, 천마는 연우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애당초 연우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고.

[제3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당신은 다시 한번 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길은 험난할 것이며, 고난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 길에 축복이 함께 하기를.]

천마답지 않게 참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연우는 크게 숨을 고른 뒤,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초월(超越)을!

[‘하데스의 식령검’이 칠흑과 심연을 모두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존재를 삼킵니다. 1, 2%…… 5%…….]

[소화가 시작됩니다.]

[융화가 이뤄집니다.]

[변이가 개시됩니다.]

……

[초월이 시작됩니다!]

찰칵-

찰칵-

연우는 이제 더 이상 마성이 아닌 칠흑왕이라는 존재를 전부 잡아먹고자 했다.

탈각은 존재의 틀을 깨는 것이고, 초월은 그것을 한 번 더 뛰어넘는 것이니.

연우는 칠흑왕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던 요소들을 낱낱이 해체하고, 그것을 완전히 체화(體化)하고 조립하여, 완전히 자신이 원하는 입맛대로 바꿔 놓을 생각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한 세월 동안, 세계의 밑바닥에 고정되어 가만히 정지되어만 있던 칠흑이 처음으로 변화하려는 순간이었다.

[칠흑이 움직입니다.]

[칠흑이 움직입니다.]

……

다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칠흑왕을 이루는 크기가 워낙에 방대하기 때문에 초월…… 즉, 변이를 이루는 속도가 너무나 치명적일 정도로 느리다는 것.

어쩌면 마성들을 상대하고 흡수하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싸울 때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싸움에 지칠지언정 지루할 틈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철저하게 그 혼자였다. 홀로 마음을 다잡아 가면서 꿋꿋이 이 작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여기서 의지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쉬지 않고, 계속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천마도 과거에 이런 순간들을 겪어 왔기에 연우를 응원했던 것 이겠지.

‘그래도…… 한다.’

가족들에게 되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콰득, 콰득!

하데스의 식령검이 칠흑을 뜯어먹는 소리만이 구슬프게 울렸다.

* * *

[변이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22, 23, 24%…….]

진행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빨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더뎌져만 갔다.

그래도 연우는 참고 또 참았다.

기다림 따윈, 원래 자신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 * *

[변이의 속도가 더 느려집니다. 35, 36, 37%…….]

더뎌지고.

[변이의 속도가 더욱더 느려집니다. 47, 48, 49%…….]

더 더뎌졌다.

* * *

[변이의 속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51%.]

절반이 조금 넘었을 때, 변이는 더 이상 속도가 나지 않았다. 느릿하게나마 진행은 되고 있었지만, 거의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연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태껏 속도가 계속 느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변이는 꾸준히 이뤄지고 있어서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이뤄지질 않았으니.

그래서 연우는 어떻게든 원인을 찾고자 했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야 수정하거나 보완해서 다시 진행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이 거대한 칠흑에서 그 사소한 결함을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는 외로울 것이다. 마지막까지.

언뜻 마성이 했던 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이를 악물고 버터 냈다.

* * *

원인을 찾았다.

그런데 그 원인이라는 게…… 너무 허망할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51%의 변이를 이뤘던 것만큼이나 긴 시간을 소요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을 만큼 아주 사소한 것이었으니까.

차연우라는 존재의 인격.

그것이 칠흑왕의 변이를 막는 유일한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를 죽여서야 본말전도가 되는 셈이 아닌가.

연우가 변이를 시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살고 싶어서였지, 그렇게 덧없이 사라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이대로 칠흑 속에 깔려 눈을 영영 감았을 것이다.

그러던 그때였다.

철커덩!

기기긱-

분명히 아무것도 닿지 않아야 할 칠흑의 바깥에서. 다른 거대한 무언가와 강제로 끼워지는 듯한 소리가 난 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톱니바퀴가 칠흑에 맞물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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