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799화 (799/862)

24화. 에필로그, 마지막 장 (5)

톱니바퀴?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위로 들었다. 위아래의 구분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버릇이었다.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정지했던 칠흑이 당시 강제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멈췄던 변이가 재시작됩니다.]

연우는 기함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의 인격이라는 걸림돌이 있는데 다시 변이가 시작된다고?

그것도 단순히 밖에서 돌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어찌어찌 가능하긴 한 모양이었다. 덩치 차이가 있어서 너무 느릿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칠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했다.

대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뭐기에……?

‘정우!’

연우는 뒤늦게 의념을 바깥으로 투사했다가, 그것이 동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꾹 다물고 말았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던 말을 잊지 않고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와 준 모양이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웠다.

[변이에 다시 속도가 붙습니다. 51.1%.]

* * *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맞물리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칠흑을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의념을 집중합니다.]

[의념을 집중합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연결된 우회로가 형성되었습니다.]

[의념을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연우의 의식은 기나긴 잠 때문에 칠흑왕이라는 존재 안에 아직 단단히 갇혀 있어, 조금이라도 바깥에다 자신의 의사를 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로가 필요했다.

다행히 칠흑과 맞물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그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서. 연우는 자신이 칠흑이 있는 동안 바깥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꿈’이 계속 분화하고 있구나.’

연우도 어느 정도 방식만 생각해 뒀을 뿐,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기현상(奇現象)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계의 분화(分化).

천마와 칠흑왕이니 ‘꿈’이니 ‘굴레’니 하는 개념은 이제 완전히

끝나 있었다.

대신에 그런 ‘꿈’과 ‘굴레’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서로 닮은 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 다른 모습을 한 세계들.

칠흑왕이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에 따라 세계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칠흑왕이 구원의 영웅으로 받아들여진 세계에서는 강한 힘이 숭상을 받아 약육강식의 세계가 열려 있었다.

칠흑왕을 단순한 개념으로 받아들인 세계는 마법이 발달해서 용종이 다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었고.

칠흑왕이 잊힌 세계에서는 그냥 평범하고 조촐한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다.

동일한 시작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각 다른 역사적 사건들이 전개되어 개변(改變)이 이뤄진 세계들. 그런 선택이 누적되면서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게 된 세계들이었다.

어떤 세계와 어떤 세계는 모습이 거의 비슷한 평행우주라 할 만했고, 또 어떤 세계와 어떤 세계는 정말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서 다중우주에 가까웠다.

그런 우주와 세계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연우로서도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그냥 ‘굴레’만 신경 쓰면 됐을 텐데……. 저것들 일일이 다 관리하려면 천마도 꽤나 머리 아프겠군.’

그리고 연우는 그것이 차정우의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무수히 많은 우주와 세계를 확보해 놓는다면, 그중 어디 하나에는 칠흑왕이 ‘평범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져 ‘차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세계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0.000001%도 안 되는 확률이라 할지라도…… 무한대로 존재하는 세계에서 입맛에 맞는 곳은 하나쯤 있을 테니.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이었고,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인 듯했지만.

공간을 다루는 것이야 녀석이 잘하는 짓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동생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이딴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동생은 줄곧 잘도 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연우는 동생이 너무 고마웠기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다짐했다.

아무리 자신의 존재가 칠흑의 초월에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고.

* * *

[변이가 다시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입니다. 52%.]

연우는 문득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을 포용하는 이토록 많은 세계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그 안에선 또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각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기억과 정체성을 갖고서 살고 있을 동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각 세계에 어떻게 간섭하지는 못하더라도, 칠흑왕에 대한 신화가 조금이라도 퍼진 세계라면 의념의 일부를 투영해서 구경하는 것쯤은 가능했다.

신화가 곧 연우가 있을 수 있는 기반이자, 매개체가 되었으니까.

…….

…….

그리고 연우는 한참 동안 헤어나오질 못했다.

“판트 녀석. 결국, 시작하는구나.”

어떤 세계에서, 판트는 외뿔부족이 어느 정도 새로운 정착지에 잘 적응한다 싶자, 곧장 부족장의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길을 떠났다.

겉으로는 배움에 끝이 없다느니, 더 많은 무(武)를 익히고 돌아오겠다느니 하는 명분을 내세웠다지만.

사실은 아버지인 무왕이 남긴 그림자를 넘을 수 있는 자신만의 업적을 쌓기 위해서였다.

한평생 판트의 목표는 부족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따금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

“세샤는 잘 지내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하시고.”

조카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어여쁨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워낙 어린 시절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던 아이였으니, 이제는 그런 일을 더 이상 겪지 않길 바랐는데. 더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크로노스와 레아는 그들 나름대로 알콩달콩하게 지냈다. 그 덕분에 많은 자식들과 손자들이 우려하는데도 불구하고, 또 자식을 낳고 말았지만.

“파하하! 이 나이에 나이 차 엄청 나는 동생이라니. 거기다 세샤보다도 어리잖아요.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연우는 세샤가 즐겁게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녀가 조심스레 막내 고모를 안는 모습까지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못 듣고 못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함께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나이 차가 한참 나는 막둥이는 귀여워도 참 너무 귀여웠다.

저 앙증맞은 손발하며 옹알대는 입술까지.

저렇게 조막만 한 아이가 어떻게 나중에 어른이 된다는 건지, 이미 황이 된 그조차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꺄아!

그러다 늦둥이 동생이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따금 이쪽을 보면서 방실방실 웃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끊임없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노고가 모두 싹 풀리는 것 같은 느낌.

아무래도 세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늦둥이 동생에게도 자신은 한평생 팔불출로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걸을 길에 언제나 행복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언젠가 천마가 자신에게 했던 기도를 똑같이 그 아이에게도 남겼다.

꺄아아!

그걸 알기라도 하는 건지.

마침 동생이 기분 좋게 이쪽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그런 늦둥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너무나.

마침 옆에 있던 크로노스는 자신에게 웃는다고 생각했던지 장난감을 실컷 흔들어 주었지만, 정작 늦둥이의 시선이 그가 아닌 옆쪽을 향해 있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데……. 왠지 가슴도 저절로 먹먹해졌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늦둥이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장난감을 흔들어 주었다.

“오구구. 우리 예으니 맘마 먹고 싶어져쩌요? 그럼 엄마한테 같이 가 볼까? 오우, 예쁘다.”

“…….”

연우는 혀가 짧아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차마 더 지켜보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팔불출 역할은 아버지한테 맡겨야 할 모양이었다.

* * *

[변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53%]

연우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따지자면 그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의 밑바닥에는 칠흑이 흘렀고, 윤환전생을 거친 모든 영혼이 칠흑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애당초 세계가 칠흑왕의 ‘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만물에 곧 그가 내재 되어 있고, 그가 곧 만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가족들과 동료들의 삶을 돌아가며 구경하면서도.

항시 의념의 일부는 한 사람의 곁에다 두었다.

에도라.

그가 지독하게도 사랑하는 연인이며, 못난 자신을 하염없이 기다려 주는 고맙고 미안한 사람.

다른 사람들은 그를 잊었어도, 심지어 크로노스와 레아까지 잊었을 때도, 에도라만큼은 항상 자신을 기억해 주었다.

그녀가 항상 밤만 되면 밤하늘을 가만히 관찰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게 자신이 언제 돌아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옆에서 소리쳐 보기도, 이제 자신을 그만 기다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 좋다고 말해 보기도 했지만, 에도라는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세월이 속절없이 계속 흐르고.

에도라의 얼굴에도 점차 그만한 세월이 묻어났을 때.

연우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 채로 발만 동동 구르면서 그녀의 고개가 무겁게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녀와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고통스럽게 다가왔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기적이 찾아왔다.

“빨리 와요.”

“알았어. 금방 갈게.”

에도라가 처음으로 자신을 봐 주었던 것이다.

너무나 감사했다.

고마웠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연우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가 칠흑왕을 완전히 관측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관측된 형상: 차연우.]

[‘차연우’의 존재가 해당 세계에 각인되기 시작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톱니바퀴가 탄력을 받아 더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칠흑의 변이가 더 원활하게 이뤄집니다. 55%]

연우는 사람들이 점차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동안 그를 잊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기억을 되찾았다.

크로노스와 레아가 잊어버렸던 아들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부둥켜안고 울었다. 칸이 잃어버린 친구를 찾고자 길을 나섰고, 도일이 흩어진 신앙을 다시 모으고자 일어섰다. 레온하르트가 은인을 찾고자 지구를 찾았으며, 아가레스와 펜리르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다 아테나가 이쪽을 완전히 봤을 때.

“기억해 줬구나. 고맙다.”

연우는 더 이상 단순한 칠흑왕이 빚어낸 형상이 아닌, 차연우 그 자체로 있을 수 있었다.

쩌거걱- 쩌걱!

와장창창!

와르르, 쿠르르-

연우를 온통 둘러싸고 있던 칠흑 세계의 한쪽 벽면이 유리창처럼 무너져 내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드디어 목적지, 심연의 중심부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곳에 차정우가 우뚝 서 있었다.

헉.

헉.

먼 길을 한참 동안 다급하게 달려오기라도 했던 건지 입술에서는 단내가 풀풀 날렸다.

하지만 그는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었다.

마치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꼭꼭 숨어 있던 아이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칠흑왕을 응시합니다!]

치직, 치지직!

치이이익-

순간, 메시지 위로 노이즈가 잔뜩 끼더니, 다른 내용의 메시지로 바뀌었다.

[차정우가 차연우를 응시합니다!]

차정우가 연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오래전에 회중시계 속에 갇혀 있던 그를 형이 구해 주었던 것처럼.

-다시는 아무 말 없이 집 나가지 마라. 그때는 정말 내가 널 죽여 버릴 테니까.

-응. 나 돌아왔어, 형.

이번에는 그가 형을 구해 줄 차례였다.

“데리러 왔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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