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01화 (외전) (801/862)

1화. All for One (1)

[창공도서관에 입장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와라.”

녹턴은 천마의 뒤를 따라다니는 내내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정말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혹은 그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녹턴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천마가 해 주었던 말들은 온통 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것들뿐이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혹시 아들을 잃어버린 아픔을 단순한 기만으로 덮으려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다.

특히 녹턴이 ‘잃어버렸던’ 과거의 기억 속에 나타난 천마는 온통 불신(不信)으로만 가득해서 더욱더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마도 그런 녹턴의 생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포털 입구 부분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 이쪽으로 발걸음을 떼지 않는 그를 보면서 천마는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수많은 신과 악마들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천마가 아니던가. 심지어 칠흑왕과의 계속된 ‘굴레’ 굴리기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찌르르…….

그러다 녹턴은 자신의 가슴 한편이 잘게 울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성은 몰라도, 본능만큼은 여전히 혈육을 쫓고 싶은 걸까?

“내가…… 아직 미운 거냐?”

“…….”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애당초 너의 기억 속에서 나는 나쁜 아버지에 불과할 테니까.”

천마는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로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낮’이니 ‘밤’이니 하는 놈들이 저런 식이라면 강제로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할 테지만, 녹턴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보다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러다 녹턴이 천천히 입을 뗐다. 천마는 얼마든지 말해 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셨던 말씀, 사실입니까?”

“어떤 거?”

“제가 ‘진짜’라는 말씀 말입니다.”

천마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녹턴의 가슴을 다시 무겁게 만들었다.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렇다면…… 올포원은 무엇입니까?”

“그 아이는…….”

천마는 말을 하려다 말고 도중에 숨을 삼켰다가,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도 내 아들이다.”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우회적인 말이었으니까.

“그동안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십시오.”

천마가 기억을 해금(解禁)시켜 준 덕분에 이제 녹턴의 머릿속에도 이런저런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녹턴과 올포원이라는 존재에게 그동안 어떤 일이 닥쳤는지,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녹턴에게는 그 모든 기억들이 전혀 다른 사람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제3의 관전자 입장이 되어 TV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아직까지 ‘손재원’이나 ‘비바스바트’로서의 정체성보다 ‘녹턴’이라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녹턴’이라는 정체성으로 지낸 시간은 앞선 두 정체성에 비해서 아주 짧다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여전히 ‘녹턴’으로서의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녹턴은 천마에게서 지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가 ‘직접’ 해 주는 이야기라면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니까.

천마도 그런 녹턴의 생각을 읽었는지, 쓴웃음을 지은 그대로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천마는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길게 흐렸다. 정말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손재원’과 ‘비바스바트’에 관련된 이야기도, 자신과 관련된 사건도 있었다. 그러니 정리를 잘해 줘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처음 ‘아들’이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쫓아 탑에 들어오게 되었을 무렵. 그때쯤부터 풀어놓는다면 얼추 설명이 될 것 같았다.

다만, 천마는 아주 잠깐 동안 숨을 크게 골라야만 했다. 오랫동안 외면 해 왔던 과거사를 다시 하나둘씩 끄집어내는 건 그로서도 괴로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되짚어야만 했고, 아들과 허심탄회하게 풀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건 그에게도, ‘아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아니, ‘아들’에게 상처만 줄 뿐일 터였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천마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어 아공간에서부터 호리병을 하나 꺼냈다.

후아주(候兒酒). 원숭이가 잘 익은 과일들만 따다 바위틈에 숨겨 놨다가, 그것이 저절로 발효되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술.

천마가 소싯적에 자신의 다른 얼굴이자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던 손오공과 자주 즐기곤 했던 명주이기도 했다.

지금은 몇 개 남지 않았지만, ‘아들’과 함께 나누는 정도로는 괜찮겠다 싶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마실까 싶은 마음이었다.

“한잔할래?”

녹턴은 고풍스러운 도서관에서 이런 걸 마셔도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투와 다르게 ‘아버지’의 눈빛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그런 걸 신경 쓸 양반도 아니고.’

아마 ‘아버지’도 술의 기운을 빌려서 말하고 싶으신 것일 테지. 물론, 천마나 되는 사람이 진짜 술에 취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감정을 조금 풀어 주는 정도는 될 것이다.

천마는 말없이 술잔을 녹턴에게 내주었고, 녹턴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또르르 -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달콤한 과일 향이 퍼졌다.

그리고.

“……그때 말이다.”

천마가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이제는 언제였는지 또렷하게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오래전의 일이었다.

* * *

비바스바트(Vivasvat).

손재원은 언제부턴가 그런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지나가듯이 장난처럼 말씀해 주셨던 이름. 만약 ‘전생(前生)’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때의 아버지가 바로 ‘비바스바트’였다고 하셨다.

워낙에 짓궂은 장난을 많은 치는 어머니라, 당시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그것이 농담이 아닌 진담이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만큼이나 신비로운 존재가 바로 어머니였으니까.

‘명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인간이자, 염라대왕의 원조 격인 존재. 저승의 왕. 야마(Yama).’

현재의 우주를 창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버지와 명계의 왕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손재원은 평범하게 살아왔던 자신이 실은 평범하지 못한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타고난 피가 다르기에, 자신이 정진(精進)하는 정도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아마도 세상 모든 존재들이 우러러본다는 존재, 신(神)의 자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것도 고위(高位)에 해당하는 대신격(大神格).

그러나.

‘신은 아냐.’

손재원, 아니, 비바스바트는 자신의 성장에 있어 명확한 하나의 ‘선’을 긋고자 했다.

신이 되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여태 비바스바트가 봤던 신이란 존재들은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족속들밖에 없었으니까.

필멸자들이 자신보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축처럼 대하며, 때로는 힘의 근원이 되는 신앙을 끌어 모으기 위해 편히 부려먹을 수 있는 노예로만 여기는 작자들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지 않은 신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열 중 여덟아홉은 그런 식이었다. 설사 선신(善神)으로 분류된다고 해도, 진심으로 필멸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연구 목적이라면 모를까 개미의 심리를 진지하게 이해하고자 하지는 않을 테니까. 신이란 작자들도 그러했다.

그렇기에 비바스바트는 이미 웬만한 신들은 쉽게 처치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월(超越)은 물론 탈각(脫殼)도 시도하지 않았다.

신화(神化)를 이룬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있는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

즉, 현재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나’가 아닌 다른 ‘나’가 만들어진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것을 두고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비바스바트는 아니라고 확언했다.

그것은 그저 단순히 비바스바트라는 이름과 기억을 가진 존재이기만 할 뿐, 전혀 다른 사고와 생각을 하는 이질적인 존재일 게 분명했다.

물론, 신화(神化)를 이루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그만의 업적은 겹겹이 쌓여 새로운 신화(神話)가 만들어지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끄집어낼 수 있는 새로운 권능은 아주 유용할 테니까.’

비바스바트에게 있어 결국 그가 이룬 모든 것들은 신과 악마들을 죽이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죽이고 처치하다 보면.

언젠가 이 드넓은 우주에서 신과 악마란 존재들도 완전히 사라지고 없겠지.

그런다면 더 이상 필멸자들을 우롱하고 불행으로 내모는 헛짓거리들은 보지 않아도 되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리하여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랴.

언젠가 만났던 고승이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면서.

비바스바트는 다시 걷고 또 걸었다.

묵묵히.

* * *

비바스바트는 여러 세계와 우주를 전전하며 신들을 처치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한 사람의 행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천마.

이 빌어먹을 우주를 창세했다는 아버지에게서 듣고 싶은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불합리함이 가득 찬 세계를 만들었는지,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천마가 남긴 흔적을 쫓아 이리저리 세상을 떠돌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증거는 찾아내지 못한 상 태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아버지의 신화가 조금씩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천마의 신화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세계든지 간에 천마를 추종하는 집단들은 꼭 한두 개쯤 있었으니까.

다만, 각 창조 신화에서 천마가 가진 비율이 자꾸 줄어든다는 특징이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 격하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악신으로 분류되어 죽었다는 식의 표현도 많았다.

그러한 신화는 보통 일반적인 신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기에 보통 ‘수정’을 하려 드는 경우가 많았건만.

천마는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흘러가도 별반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에 가까웠다.

꼼꼼한 것 같으면서도 자잘한 건 딱히 손대기 귀찮아하는 게 평상시 그가 알던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래서 쓴웃음이 절로 삐져나오는 한편, 정말 이렇게 둬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천마’라는 신위가 영락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절대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천마의 행적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냥 사라진 것이다.

마치 어디론가 숨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 시비 다툼을 벌이다가 된통 잘못 걸려서 짱박히기라도 한 건가?’

비바스바트가 알던 천마라면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인성질(?)을 부리다가 상대를 잘못 만나 참교육(?)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양반이었으니, 꼭 그릇된 추측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천마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면서 새로운 문명을 찾아 포털을 열던 어느 날.

[‘탑으로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탑?’

비바스바트 앞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향후 그의 운명을 바꾸게 될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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