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All for One (2)
탑.
그건 분명히 비바스바트도 지나가듯이 들어 본 이름이긴 했다.
여러 우주의 문명들에 사는 ‘영웅’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시련의 장소.
각 층계에는 저마다 다양한 주제의 시련과 난관들이 있으며, 99개의 층계를 모두 통과한다면 진정한 ‘신’이 될 수 있다던가?
신을 증오하는 비바스바트로서는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들렸었기에 의도적으로 무시해 오곤 했다.
그런데 그곳으로의 초대장이 그에게도 오게 된 것이다.
물론, 비바스바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거절하였습니다.]
‘누가 저지른 농간인 건지는 몰라도, 나중에 찾아내면 한번 손봐 줘야겠어.’
필멸자들에게 괜한 헛바람만 일으키는 이런 짓거리가 계속된다면 나중에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아악!
비바스바트는 천마를 찾아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 *
[‘악몽으로 가득 찬 행성’에 입장했습니다!]
‘……악취가 진동하는군.’
비바스바트는 포탈을 건너자마자 두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코끝을 찌르는 악취가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럴 때는 예민한 감각이 미워지곤 했다.
발아래 넓게 펼쳐진 행성은 온통 새카맣게 그을린 나무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곳에 정말 고대신(古代神)이 있다고?’
비바스바트가 행선지로 이곳을 꼽은 이유는 천마가 우주 창생을 이룰 때, 이를 옆에서 도왔다던 존재의 흔적이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도와서 세계의 법칙과 생명을 창조했기 때문에 필멸자들에게 그만큼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들었건만……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비바스바트가 여러 세계를 전전하고 그곳에 있는 신들을 차례로 죽이면서 느낀 것은 신에게 있어 과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과거에 잘났다고 떠들어 댄다고 한들, 결국 그들은 지난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것일 뿐.
미래에 대한 생각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들이 과거에 품었던 숭고한 이상도, 찬란한 소망도 현실이 주는 권력에 묻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그러했다.
창조신(創造神)이나 다름없는 존재라 해서 그래도 기품 있는 무언가를 기대했건만, 이곳은 차라리 지옥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엉망이었다.
행성 표면 전체를 따라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라도 되는 것처럼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이 삐죽삐죽 솟아올라 있었고, 거기엔 사람이 넝쿨에 잔뜩 감긴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살갖을 따라 넝쿨의 뾰족한 가시가 깊게 파고들어서 체액을 빨아들이는 통에 고통스러워할 법도 하건만.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같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가시가 불어넣은 마약성 호르몬이 고통을 잊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거기에 절여지다시피 해 이제는 이성이나 사고도 날아가 버린 듯했으니.
저러고 생명이 다해 버린다면 그냥 내던지고 다른 먹잇감을 끌어와 똑같이 체액을 빨아들일 게 분명했다.
망자목(亡者木).
비바스바트도 몇 번씩 본 적이 있던 나무였다.
필멸자를 붙잡아서 강제로 행복을 느끼게 만들고, 거기서 발산된 신앙을 채취하는 것이다.
보통 ‘타락’을 겪기 시작한 신들이 편리를 위해 이런 식으로 행성 하나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사유화해서 채굴장으로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지고하다는 고대신이 이런 개수작을 부릴 줄이야.
‘아니. 오히려 이런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니 이렇게 불합리하기만 한 우주를 만들었겠지.’
비바스바트의 두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빨리 해치우고 가야겠어.’
비바스바트는 마력을 끌어올려 그것을 장심(掌心, 손바닥 한가운데)으로 모았다.
[‘대수인’이 작렬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들러 본 적이 있는 외뿔부족의 세계에서 터득했던 무공(武功)을 전개하면서 손바닥을 앞으로 튕겼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발산된 마력장(魔力場)이 단번에 수백 수천 배로 확장되면서 행성 표면의 한가운데에 틀어박혔다.
망자목이 가장 무성하게 우거진 숲 한가운데였다.
콰아아앙!
콰릉, 콰르릉, 콰르르-
지금의 비바스바트가 자랑하는 스킬들은 하나같이 필멸자의 수준을 뛰어넘은바. 이번에도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대수인이 작렬한 자리에는 직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운석이 처박힌 것처럼 엄청난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다. 그로인해 수많은 토사가 수십 킬로미터도 넘게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포물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다시 쏟아졌는데, 그것이 행성 위에서도 확실하게 목격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범위를 자랑했다.
더군다나 갑작스러운 지각 운동으로 인해 지저에 흐르고 있던 맨틀이 일제히 반작용을 일으키면서 행성 전체에 영향을 미쳤으니…….
균열이 퍼지고, 시뻘건 용암이 마구잡이로 치솟기 시작했다. 검은 매연이 삽시간에 행성 표면 전체를 뒤덮고, 거기서 생겨난 엄청난 태풍이 그나마 멀쩡하게 남아 있던 것들까지 깡그리 밀어 버렸다.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엄청난 대재앙이었다.
[‘악몽으로 가득 찬 행성’이 종말(終末)을 맞이하였습니다!]
[겁풍이 행성을 뒤덮습니다.]
[겁화가 행성을 휩씁니다.]
……
[종말의 집행자: 비바스바트]
[악의 수치가 대거 상승했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에도 비바스바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살상을 저지른 셈이니 영혼에 쌓이는 업도 그만큼 악념에 물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것이야말로 빌어먹을 신에게 붙잡히고 만 가녀린 이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이것이 아니라면 붙잡힌 인간들은 죽고 난 뒤에도 영혼이 저들에게 귀속되어 영원토록 고통의 굴레 속을 굴러야만 했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고통의 굴레에서 저희를 빼 주셔서…….」
「저곳에 제 아가가…….」
「제 부모님이 이제야 편히 눈감으실 것 같…….」
보라.
지금도 수많은 목소리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지 않는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앙이 모이고 있습니다!]
[영격이 반응합니다.]
[악업이 씻겨 나갑니다.]
……
[정지되었던 탈각과 초월이 재개됩니다.]
[배광(背光)이 새어 나옵니다!]
……
[자의로 탈각과 초월이 강제 중단됩니다.]
비바스바트는 이를 악문 채로 몸을 타고 감도는 배광을 억눌렀다. 이것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그토록 싫어하는 신격을 획득하고 말 테니까.
다만, 이것도 슬슬 거의 한계에 다 다라 있었다.
‘얼마나 더 억누를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신살(神殺)만 하더라도 엄청난 업적일 수밖에 없는 판국에, 그들에게 억류되었던 존재들을 구원함으로써 얻은 신앙도 엄청났으니.
이 순간에도 그의 격은 계속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한계’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새로운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종말을 맞이했던 행성의 표면 한 가운데에서부터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고대의 존재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내핵에 꼭꼭 숨겨져 있던 새카만 악념이 꿈틀대다가, 위쪽으로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그것은 동면에서 갓 깨어난 뱀처럼 차가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어. 느. 놈. 이. 내. 잠. 을. 방.
녀석은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지, 발산하는 사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횡설수설하기 바빴다.
평범한 필멸자라면 단순히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사고가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정보량이었지만, 비바스바트는 녀석이 대강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화를 더 돋우게 만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죗값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화만 내다니…… 저런 것이 구원을 내려 줄 것이라 믿고 의지했던 신도들의 바람은 대체 무엇이 된단 말인가.
“찢어 죽여 주마.”
[배광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비바스바트는 어느 태양보다도 더 화려한 빛을 내뿜으면서 고대신에게로 몸을 날렸다.
콰르르릉!
* * *
『천마가…… 천마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꿈꾸는 자. 녀석은 자신의 신명(神名)을 그렇게 밝혔다. 비바스바트에게는 전부 헛소리로만 들릴 뿐이었지만.
‘이런 놈이 정말 고대신이라고? 말도 안 돼.’
비바스바트가 여태 들었던 바에 따르면 고대신은 하나같이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현재의 우주가 창생되기도 전부터 존재했으며, 전지전능한 권능을 바탕으로 천마와 함께 군림했던 존재들.
다만, 억겁의 시간이 흐르면서 차례로 세계의 법칙으로 녹아들거나, 어디론가 존재를 감추면서 신화가 많이 사라지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위대하다’고 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거기에 상당한 허풍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고대신과의 싸움은 아주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건만.
정작 부딪치고 보니 싸움은 너무 쉽다 못해 허망할 정도였다.
녀석이 품고 있는 힘은 분명히 크긴 컸으나, 그것은 과거의 흔적일 뿐. 지금은 너무 왜소해져 신성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망가뜨린 행성에 빨대를 꽂아 겨우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껍데기만 남은 건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닳고 닳아서’ 이제는 쭉정이만 남은 것 같은…….
『수없이 구르고 구른 ‘굴레’ 속에서도, 나를 이루던 그토록 많은 권능을 잃어버림에도, 어떻게든 그대를 따랐건만……! 천마여! 그대는 결국 나를 사냥개로만 여기고 여기서 내칠 생각인가! 그대가 하는 짓이 우리의 우둔한 아버지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이더냐!』
‘굴레’? 권능을 잃어버려? 사냥개는 무엇이고, 우둔한 아버지는 또 뭐란 말인가?
비바스바트는 하늘을 보며 울부짖는 녀석의 말들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우주 창생을 둘러싼 ‘비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찾아오긴 잘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를 아버지가 보낸 사자(使者) 정도로 보는 것 같으니 적당히 후려쳐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바스바트를 구성하는 권능의 상당수는 천마와 닮은 것이 아주 많았다.
“그렇게 한탄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위대한 빛의 의지를 피해 도망친 작자여. 남기고 싶은 말은 그것이 전부인가?”
뱀 대가리가 홱 고개를 돌리면서 비바스바트를 잔뜩 노려보았다.
『내가…… 내가 천마의 뜻을 어겼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럼 그렇지 않았다는 건가? 그분께서 이곳에 처박혀 죄 없는 필멸자들을 착취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을 텐데?”
『억울하도다, 난! 내가 비록 천마의 권유를 따르지 않고 도망치다시 피했다지만, 그래도 되도록 ‘굴레’에는 개입하지 않고자 하였고 쥐 죽은 듯이 살았다! 그런데도……!』
‘권유?’
뭔가 잡힐 것 같았다.
“위대한 빛의 의지가 말하고자 하던 것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그렇게…… 그렇게 마지막까지 나를, 우리를 부려 먹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이더냐! 그 좁디좁은 우리에 가둬서 끝까지 이용해 먹을 생각이란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냔 말이다!』
좁은 우리.
뭔가를 잡았다.
“그게 잘못되었나?”
『그걸 말이라고……!』
뱀 대가리는 뭐라고 소리를 지르다 말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말을 뚝 멈추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너……!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천마의 얼굴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그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넌 대체 뭐지?』
‘쳇. 들켰나.’
비바스바트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원하던 정보를 거의 다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말한 좁은 우리가 뭔지만 알 수 있다면 천마의 행방도 거의 다 잡은 셈이 될 테니.
‘그 빌어먹을 우주 창생의 비밀인지 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화아악!
[격을 발산합니다.]
[배광이 흘러나옵니다!]
비바스바트는 갈무리했던 격을 한껏 해방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한 압박감으로 뱀 대가리를 찍어 눌렀다.
쿵……!
『크으윽……!』
“내가 누군지는 그쪽이 알 필요는 없고. 조금 전에 말한 천마의 지시가 뭔지 말해 줬으면 하는데.”
『난, 난……!』
“잔대가리 굴리는 것 같은데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지금이라도 당장 너를 찢어 죽일 수 있으니까.”
비바스바트의 배광이 어느새 전신을 뒤덮으면서 더 이상 그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점차 감정을 잃은 듯 무뚝뚝하게 변했다.
“물론,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신인 이상 신앙만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부활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약속하지. 그때가 되면 가장 먼저 널 찾 아가서 또 죽일 거야. 그리고 신화도 신앙도 어떻게든 지워 버릴 거고. 그걸 몇 번 반복하면 너란 존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제…… 길!』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반항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녀석은 대가리를 치켜들면서 그가 궁금해하는 비밀을 이야기하려 들었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이다.
비바스바트도 드디어 지긋지긋한 추격전이 끝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감은 얼마 가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별안간 아무것도 없던 우주 한가운데에서부터 검은 먹구름이 잔뜩 뭉치더니, 황금색 벼락이 이쪽으로 떨어진 까닭이었다.
쿠르르릉!
비바스바트가 어떻게 손을 쓸 겨를도 없이, 황금색 벼락은 뱀 대가리를 무참하게 으스러뜨리면서 지면에 작렬했다. 파스스스. 모래성처럼 부서진 뱀 대가리의 조각들이 돌개바람을 그리면서 벼락이 떨어진 자리로 뭉쳤다.
[‘언제나 꿈꾸는 자’가 봉신(封神)됩니다!]
신살이 아닌 봉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비바스바트로서는 격앙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을 죽이는 것’이 아닌 ‘신을 봉한다’는 것은 현재 이 우주에서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바. 그만큼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신진철이라는 독특한 재료도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비바스바트도 불가능한 일.
그리고 현재 우주에서 이것이 가능한 존재는 딱 한 부류밖에 없었다.
천마의 얼굴들.
위대한 빛이자 창조자인 천마의 의지를 타고나 저마다 다른 시간대와 우주에서 나타난다는 천마의 화신이자 분신들.
[손오공이 강림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라 손꼽힌다는 투전승불 제천대성이 바로 이곳에 나타났다.
“고놈 참, 생긴 게 누구를 닮았는지 뒤통수 열심히 때려 주고 싶게 생겼네.”
휘리릭, 탁!
손오공은 여의봉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가볍게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외로 꼬았다.
“네가 그 말로만 듣던 지호 놈 아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