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04화 (804/862)

4화. All for One (4)

“오효효효. 천마 아들의 방문이라. 손오공이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잘도 저질러 버렸군요.”

어둠이 깔린 곳.

허공에 떠오른 수많은 스크린을 보면서 외눈 안경을 고쳐 쓰는 정장 차림의 고블린이 있었다.

이블케.

최초의 관리인이자, 탑이 생성되었을 때부터 줄곧 함께해 왔다는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존재.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만큼 비밀로 가득하다는 그가 최근에 가장 관심을기울이는 대상은 바로 비바스바트, ‘손재원’이라는 본명을 가진 플레이어였다.

탑에 입장하는 플레이어의 모든 데이터는 클라우드 시스템에 따로 저장되는바. 엄중한 보안 체계로 관리된다지만, 최고 관리자인 이블케만큼은 예외였다.

그렇기에 이블케는 비바스바트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던 천마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튜토리얼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클라우드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확인한 건 어디까지나 확신을 위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비바스바트는 괜히 천마의 아들이 아니라는 듯, 여태 어느 누구도 보이지 못했던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블케는 비바스바트가 오히려 철저하게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외부에 발설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비바스바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이렇게 재미난 광경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의 빌어먹을 본체께서 대체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게 아니더라도, 비바스바트가 수많은 초월자들로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탑에다 어떤 소란을 일으킬 게 분명했으니,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자고로 부모에게 불만을 가진 사춘기 자식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까.

“오효효, 오효효효!”

그렇게 이블케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최고 관리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 * *

슈퍼 루키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비바스바트에게 쏟아지는 러브콜은 아주 많았다.

“우리 올림포스로 와라. 그런다면 최고의 자리를 약속하지.”

신왕 크로노스를 끌어내린 뒤, 그 자리에 앉은 세 주신 아래에 새로운 편제를 꾸리는 중이라는 올림포스를 시작으로.

“그대에게서는 수도자의 냄새가 많이 나는군. 이름 또한 우리와 가까운 것 같고.”

비바스바트라는 이름의 주인인 외조부님이 한때 있었다던 데바도.

“죽음의 미학을 보고 싶지 않은가? 우리에게로 오라.”

멤피스도.

“흐흐흐! 악마라고 해서 나쁠 건 없는데 말이야. 원하는 욕망이 있는 가? 그것을 이루게 해 주지.”

르 인페르날도.

니플헤임도.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신과 악마의 사회들이 모두 접선을 시도해 왔다.

그리고.

“싸우고 싶은가? 그런 눈빛인데 말이야.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가장 잘 맞지 않을까 싶은데.”

비바스바트가 선택한 곳은 모두가 놀랄 만한 곳이었다.

아스가르드.

무한한 투쟁을 지고의 가치로 삼으며, 언젠가 다가온다는 대예언 ‘신들의 황혼(Ragnargk)’을 대비하여 항시 전쟁을 준비한다는 곳.

‘이곳이라면 내 기량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

비바스바트가 탑에 입장하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절대 이곳에서는 바깥 세계에서처럼 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한 신격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이런 곳에서 잘못 까불었다간 아버지를 만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적절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정도로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도 똑같구나. 바깥 세계와 다를 것 없이.’

초월자를 만난 필멸자들의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봤던 광경들이 눈앞으로 스치는 것 같아 마음이 적잖게 무거워졌다.

특히 아스가르드는 다른 사회들에 비해 유독 필멸자들에 대한 대우가 야박했다. 뛰어난 전력을 지닌 전사라면 대접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노예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실력만 확실하다면 신분 상승도 빨라질 수 있으니…… 중심부로 접근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진다.’

비바스바트는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아스가르드의 환심을 사서 ‘발할라(Valholl)’에 입성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에인헤리(Einheri)가 된다면 오딘의 상태도 대해서도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테니까.’

‘홀로 싸우는 자’, 혹은 ‘죽지 못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에인헤리는 아스가르드에 소속된 전사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직이었다.

오로지 아스가르드의 주신인 오딘의 말만을 따른다는 이들. 그들은 다른 신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권한과 직위를 갖고 있었다.

발할라는 그런 에인헨리를 모아 둔 전당(殿堂)으로써, 비바스바트는 그곳에 들어가 아주 오랫동안 바깥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오딘의 상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세간의 소문이 진실이라면 절대 무시할 게 못 되니까.’

듣기로 오딘은 천마증(天魔症)이라는 병에 빠져 깊은 잠에 들어 있다던가? 그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주신 격들이 자신들을 이곳에 가둔 천마에게 덤볐다가 힘을 크게 소진한 나머지 깊은 동면에 들어가야 했다는 소문은 이미 아래 층계의 필멸자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물론, 여러 사회들은 그와 관련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대다수는 이를 헛소문 정도로만 치부했다.

하지만 비바스바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충분히 일리가 있어. 아버지 성격이라면, 귀찮은 놈들을 죄다 강제로 때려눕혀서 다시는 떠들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천마의 성격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내릴 수 있는 결론.

그렇기에 비바스바트는 기량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분 상승이 간편한 아스가르드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히 여기 있으면 누군가가 날 데리러 올 거라고 했는데. 대체 언제 오는 거지?’

비바스바트는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타나질 않아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혹시 도중에 뭔가가 잘못 꼬여서 입교가 거절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계획을 다시 짜야 하기 때문에 생각이 깊어질 무렵.

“으허! 오오오. 정말로 있다, 있어. 정말로. 그쪽이, 딸꾹! 윗선에서 말한 비바스바트라는 친구인가 봐? 딸꾹!”

갑자기 불콰한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비바스바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대낮부터 대체 얼마나 술을 마신 건지, 술 냄새가 코끝을 찔러 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한쪽 손에는 커다란 호리병도 들려 있었다.

‘이게 뭔……!’

비바스바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흐흐!’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끝으로 비바스바트의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 대기 바빴다.

“왜소한 것처럼 보여도 근육은 제법 단단하고. 오오, 손에 굳은살도 있어. 소싯적에 칼 밥 좀 먹어 봤나 봐? 얼굴도 반반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히죽히죽 웃어 대는 모습이 영 볼썽사납기만 하다. 비바스바트는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물었다.

“그쪽은 누굽니까?”

“나? 음……? 혹시 아무 소식도 못 들었나? 바로 부대 배치받을 테니까, 사람 하나 갈 거라고.”

“그럼 당신이……?”

“흐흐. 맞아, 맞아. 내 이름은 가름. 네 상관이 될 사람이니 앞으로 잘 부탁해.”

가름이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 때문에 비바스바트는 한참 동안 그것을 노려봐야만 했다.

이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전공을 쌓아 위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이 사람이 자신의 상관이자 부대장이 될 것 같은데…… 과연 신용해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낮부터 취기에 잔뜩 찌든 채로 수하가 될지 모르는 사람을 희롱하기까지 하는 자…… 그다지 믿음은 안 가는데.’

만약 평상시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아무리 아스가르드에 자신이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해도, 천마증에 빠진 주신이 있는 사회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신분 상승에 시간은 걸릴지라도, 그게 어디든지 언젠가 고위층까지 갈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

‘눈빛이 달라.’

호선을 그리는 가름의 눈웃음 속. 눈은 분명히 뻘겋게 달아올라 있지만, 그 깊이가 깊어도 너무 깊었던 것이다.

절대 만만치 않은 내력을 지녔다는 뜻.

그 사실이 비바스바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

“…….”

그렇게 비바스바트는 한참의 고민에 잠겨야만 했고.

“……싫어? 그럼 어쩔 수 없고.”

가름이 계면쩍은 얼굴로 손을 빼려는 것을, 비바스바트가 재빨리 낚아챘다.

“아닙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히죽!

가름이 다시 크게 웃었다. 술 냄새가 잔뜩 흘러나와 비바스바트는 지금이라도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나 인상을 굳혔다.

* * *

[이곳은 11층, 꿈 속 세계의 관입니다.]

“그러니까 올림포스 놈들이 10층 아래의 초심자 구간이나 맡게 된 게 전부 내 활약상 덕분에……!”

‘이 말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대체 쿠람이라는 도시는 어디에 있는 거지?’

가름은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왕년에’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과연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에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 간에 아주 큰 충돌이 있었고, 여기서 아스가르드가 큰 승리를 거둬들임으로써 올림포스는 별 재미도 없는 10층 이하의 초심자 구역을, 아스가르드는 11층에서 30층이 넘는 방대한 구역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내용.

그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짓게 된 계기가 바로 가름과 그녀가 수장으로 있는 부대 ‘비프로스트’의 활약상 덕분이라는데…….

비바스바트는 그 말을 대충 귓등으로만 흘려들을 뿐이었다. 일일이 맞장구를 쳤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냥 무시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수십 번씩 들었던 말을 듣고 또 듣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모든 레퍼토리가 외워지는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그보다.’

비바스바트는 또다시 1절로 되돌아가려는 가름의 설명을 이제 아예 무시하면서 자신이 지나고 있는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여긴 엉망이어도 너무 엉망인데.’

아스가르드가 여러 사회들 중에서도 유독 필멸자들에 대한 경시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상황을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울화가 저절로 치밀어 올랐다.

11층은 수많은 환수들이 살아가는 스테이지답게 아주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만큼 뛰어난 자원도 아주 많은 것인지, 곳곳에서 ‘노예’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넓은 들판을 따라 조성된 경작지에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농부들이 힘들게 밭을 갈고 있었고.

광산에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쉴 새 없이 사람들이 투입되고 있었으며.

어느 마을에서는 강제로 병사를 징집하겠다면서 어린아이를 끌고 가려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학대의 현장에는 아스가르드의 소속으로 보이는 하급 신이나 하수인들이 꼭 끼어 있었다.

자신이 마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인하게 웃고 시시덕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배알이 꼴리는지…….

만약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자중하겠다는 굳은 다짐이 없었다면 나섰어도 진즉에 나섰을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핍박과 착취. 압제와 폭력. 탑의 세계는 오로지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살아 숨 쉬는 야만의 세상이었다.

악취가 풀풀 날리는 구더기 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계속 내버려 뒀다간 정말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언젠가 저것을 모두 뒤집어 버리고, 탑을 부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만든 겁니까? 당신의 생각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 탑이 존재하는 의의가 무엇인 걸까. 단순히 초월자라는 빌어먹을 것들을 한데 가둬 둘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라면 그들만 밀어 넣었어도 되었을 것을, 왜 ‘초대’라는 이상한 명목으로 필멸자들까지 끌어들인 걸까.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그래서 그때 내가 딱 하고 나섰단 말…… 응? 야, 내 말 듣고 있냐?”

가름은 신나게 떠들다 말고 갑자기 비바스바트가 걸음을 멈추자, 똑같이 멈춰 서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비바스바트의 시선이 저 먼 곳에 위치한 밭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라니라는 자가 있었다. 약자를 괴롭히고 포로를 고문하기를 좋아하는 잔혹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가름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작자. 그래도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닌 데다가, 배경도 무척 대단해서 주변에서는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 녀석이 바닥에 쓰러진 어느 소녀에게 채찍질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옷이 얼룩지고 얼굴에 화가 단단히 난 것으로 보아, 소녀가 어떤 실수를 해서 벌이라도 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작자가 있는 힘껏 채찍을 휘두른다면 일개 인간으로선 살아남을 수 있을 리 만무한 일.

‘이놈, 설마?’

그런 소녀를 구하려는 건지, 비바스바트가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이 얼마나 차갑던지, 숙취가 단박에 달아나는 것 같았다.

탁!

가름은 반사적으로 비바스바트의 손목을 잡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저절로 이쪽으로 향했다.

“이 손, 놓으십시오.”

존대를 하고 있지만, 분명히 그 말은 경고였다. 당장 그라니를 때려죽이겠다는 살의가 물씬 풍겼다.

그렇기에 가름은 더더욱 비바스바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못 놓겠다면, 어떻게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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