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흔적 (1)
차정우가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기계신(機械神)의 쉼터’에 새로운 손님이 입장했습니다!]
『인성황~ 인성황~ 신나는 노래~ ♪ 너도 한번 불러 본다~♬』
기계신…… 이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신명(神名)으로 세상에 더 유명한 차정우는 정원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다 말고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분하기만 한 이 생활에 간만에 찾은 손님이 반갑기도 했다.
게다가 손님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괴악한 노래를 부를 이는 이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 노래는 또 대체 뭐야?”
질문을 받은 존재, 샤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말고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대답했다.
『2절.』
“2절? 그 노래에 다음 가사가 있었어?”
『이참에 만들었지. 1절만 매번 재탕하면 재미없거든.』
“형이 알면 화내지 않을까?”
『쫄다구들은 귀찮다고 그냥 내버려 두고, 혼자 훌쩍 여행 가 버린 양반 눈치 보면 살기 팍팍하지.』
“세상에 형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 거다.”
차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것이 샤논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싶기도 했다. 저렇게 장난기가 많고 서글서글한 이가, 칠흑왕의 첫 번째 칼이며 정복을 신위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이만큼이나 흐른 데다, 앉은 위치가 훨씬 달라지 고도 한결같은 샤논이 참 고맙기만 했다.
물론, 같이 형을 놀릴 수 있는 동지가 있다는 점이 더 반가운 게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어느새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 것일 테지만.
『뭔 소리야? 나 말고도 많지.』
“어? 그랬나?”
『정확하게는 있‘었’던 거지만.』
“……과거형이잖아, 그거?”
『주인 양반이 뒤통수 갈겨서 비명횡사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지.』
역시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차정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이 웃으면 안 되겠다고. 아무리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해도, 연우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쪽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귀찮아 죽겠다니까. 뭘 하려고 할 때마다 형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라니, 원.’
차정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샤논이 성역 내부를 쓱 훑어보다가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흠……? 낯선 얼굴인데?』
“아! 그랬나?”
샤논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흩날리는 미남자가 있었다. 십 대의 어린 미청년인 것 같으면서도 퇴폐적인 눈매로 인해 장년인처럼 보이기도 해서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품이 넉넉한 도복을 입은 채로, 땅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지그시 노려 보는 모습은 너무 진중해서 쉽게 다가가기가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남자가 노려보는 검은 일찍이 샤논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달리 용살검(龍殺劍)이라고도 불리는 차정우의 신물(神物)이지 않은가.
한데, 저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저렇게 드래곤 슬레이어를 노려보고 있는 걸까?
“내 제자.”
『호오! 그럼 그때 말했던……?』
차정우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샤논은 한 번 더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차정우가 지나가듯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연우가 칠흑왕과 완전히 동화를 이루면서 그에 대한 세계의 기억이 망각으로 젖어 들 무렵. 연우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계선을 건너다니면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아이가 있었노라고.
‘짐승’의 파편을 만나 해치우던 중에 알게 되었다던가? 타고난 자질이나 성정이 무척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타고난 천형 때문에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안타까워서 제자로 삼았다는 말도 들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곳에 있을 줄이야.
샤논은 자기도 모르게 구미가 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분명히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내가 못 본 사이에 부쩍 컸더라고. 이번에 완전히 등선까지 끝마쳤다기에 진무각(眞武閣)을 맡겨 볼까 싶어.”
『그렇단 말이지?』
차정우는 수많은 세계선을 돌아다니면서 무수히 많은 신화를 쌓아 올렸다. 그 때문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신명 외에도 다른 다양한 신명을 갖고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진무대제였다.
진무각은 그러한 신명에서 이름을 따 만든 조직이었다. 차정우는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천마를 대신해 창공 도서관의 사서를 맡게 된바. 책자 관리만 해도 워낙에 할 일이 많아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그를 대신해 손발이 되어 줄 곳이 바로 진무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무각은 절대선에도 절대악에도 속하지 않는다. 균형을 이루는 중심추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무력적인 부분이 강해야만 했다.
차정우는 그러한 진무각의 수장 자리를 정현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단순히 그의 제자라서 발탁한 게 아니라, 정말 그만한 실력을 지녔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웬만한 하급 신 따위는 발아래로 여길 만큼 강할 테지. 게다가 앞으로 천계 내에서 권력의 중심이 될 게 분명하니, 여러 청탁을 거절할 수 있는 강단 있는 성격도 겸비해야만 한다.
‘재미있겠는데.’
샤논은 이제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호기심의 수준을 넘어 호승심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겨뤄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가뜩이나 연우에게서 완전히 ‘독립’한 이후로, 칠흑왕의 첫 번째 칼이라는 이유만으로 곳곳에서 그를 피하려는 기색이 많이 느껴져서 심심하기만 하던 차였는데.
간만에 몸을 풀 수 있는 대상이 생겼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정…… 현(呈玄).』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윽!
여태 드래곤 슬레이어를 노려보고 있던 백발 사내, 정현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갔다. 심통이 단단히 붙은 얼굴이 ‘네깟 놈은 뭔데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아. 책 보기는 글렀네.”
탁!
차정우는 샤논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별 미련 없이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샤논을 뜯어말린다고 해서 말릴 수 있는 게 아닌 데다가, 그의 제자 역시 걸어온 싸움을 피할 성격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까딱까딱.
샤논이 정현을 가리켜 덤비라며 검지를 까닥이자, 정현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파앗!
정현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움푹 꺼지며 흐려진다 싶더니, 땅바닥에 꽂혀 있던 드래곤 슬레이어가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날카로운 칼바람이 샤논의 목을 갈라 오고 있었다.
『일단 기세는 좋고!』
차아아앙!
샤논은 소드 브레이커로 드래곤 슬 레이어를 밀어내면서 쾌재를 외쳤다. 잘게 떨리는 검신만 봐도 아주 재미난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채채챙! 채채채!
쿠릉, 쿠르르릉-
차정우가 휴양을 위해 만들었던 성역은 삽시간에 폭발로 뒤집히고 말았다.
* * *
『허억…… 허억……!』
“후우…… 후우……!”
샤논과 정현은 어느새 지친 얼굴로 덩그러니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 제법인데……?』
“그쪽……도……!”
신위나 권능까지 전개했다간 애당초 싸움이 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샤논은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으로 정현과 겨루었다.
그러고 나서 느낀 점은 차정우가 아주 자랑할 만하다는 거였다.
하계의 시간을 기준으로는 수백 년도 훨씬 넘게 오로지 검술만 닦아 왔던 샤논이 쉽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결과는 무승부.
연우가 봤다면 아주 놀랐을 만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현은 그러고도 승부를 제대로 내지 못했단 사실이 별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피식!
샤논은 그런 반응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다음에 더 겨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끝났나?”
때마침 성역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갖춘 나무에 걸터앉아 있던 차정우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아직 승패도 안 났는데 어딜 끝나. 안 그래?』
“당연하지.”
샤논의 질문에 정현이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하자, 차정우는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질려 하는 투가 역력했다.
“남의 집에서 깽판 치는 건 이쯤에서 멈추라고. 그보다 진짜 온 이유가 뭐야? 뭐 물으려고 온 거 아녔어?”
『……음? 아! 그랬었지.』
샤논은 그제야 뒤늦게 방문 목적을 떠올리고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정현과 겨루기를 하느라고 여태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뭐가 있는 거구나?”
샤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혹시 우리 인성황에 대해 아는 소식이 있나 싶어서.』
“우리 형? 형은 갑자기 왜?”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거든. 정확하게는 채널링이 몇 달째 완전히 먹통이야.』
“그거 ‘굴레’를 되감아서 그런 거 아냐?”
샤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리 다른 시간대와 세계선에 있다고 해도, 주인과 우리 권속들은 항상 채널링으로 연결되어 있어. 필요한 용무가 있으면 그걸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고.』
차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이 맞긴 맞았으니까.
평행 차원이나 다중 우주에서는 같은 신명과 신위를 가진 신이라고 해도, 저마다 각기 다른 성격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만 동일할 뿐, 각기 걸어온 생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마나 칠흑왕, 그리고 차정우와 같은 ‘황(皇)’은 그와 전혀 달랐다.
‘황’은 온 우주와 세계를 통틀어, 오로지 하나의 정체성과 하나의 육체만을 가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
연우 역시 그렇기 때문에 ‘굴레’를 되감아 다른 세계선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자아만 그쪽으로 넘어갈 뿐이지 육체는 모든 세계선과 시간대에 걸쳐서 똑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권속들과의 연결 고리는 절대 끊어질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연우와의 연결이 사라졌다?
뭔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그러니 혹시 너는 주인과 따로 연락을 하고 있나 싶어서.』
“아니. 그렇지는 않아.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싶어서. 일일이 서로 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도 이상하고.”
아무리 각별한 형제 사이라고 해도,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공유하지는 않는 법이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상대의 사적인 부분을 지켜 주려고 하는 편이었다.
차정우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에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빛의 입자로 이뤄진 멍울이 커지면서 책이 한 권 만들어졌다.
[1급 사서의 자격으로 도서관 내부의 정보들을 검색하기 시작합니다!]
[키워드: 칠흑, 차연우, 위치]
파라라락!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창공 도서관의 사서만이 가지고 있는 검색 기능이었다. 다만, 정보량이 정보량이다 보니 검색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편이었다.
정현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두 사람 사이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차정우가 책장이 거의 절반쯤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한령이나 레베카 쪽은? 그쪽도 그렇대?”
『한령은 최근에 아들 녀석이랑 여행을 다니느라 연락이 안 된 지 오래고…… 레베카도 케르눈노스에게 돌아가서 수양을 쌓기 시작한 지 꽤 된 상태라 지금은 이쪽에서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어.』
샤논은 차정우라면 당연히 연우의 행방에 대해서 알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별 대수롭지 않게 찾아왔다가, 아무래도 그렇게 단순히 여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부는?”
『주인의 소재에 대해서 물었던 게 그 녀석이었어.』
“뭐?”
차정우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때마침 책자의 마지막 장이 뒤로 넘어가면서 커버가 닫혔다.
[칠흑왕은 현재 르’뤼에와 함께 지구에 깊숙이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정보는 찾을 수 없습니다.]
차정우는 재빨리 키워드를 추가했다.
[키워드에 ‘주인격’, ‘행방’, ‘소재’를 추가하여 재검색을 시작합니다.]
……
[찾을 수 없습니다.]
[키워드에 ‘굴레’, ‘되감기’, ‘판트’, ‘에도라’를 추가하여 재검색을 시작합니다.]
……
[찾을 수 없습니다.]
……
[찾을 수 없습니다.]
……
[아무런 정보가 검색되지 않습니다.]
[이 이상의 정보를 검색하려면, 더 높은 등급과 권한을 필요로 합니다.]
탁!
차정우는 빛의 책자를 덮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쩌면 연우에 대한 기억이 세계에서 잊혀져, 그를 찾으러 다녔을 때만큼이나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단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천마 아저씨한테로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