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흔적 (2)
“흠.”
천마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연우가 실종되었다고?
대체 어떻게?
까마득한 세월 동안 ‘굴레’를 두고 칠흑왕과 다투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칠흑왕의 주인격이 이블케였을 때에나 벌어졌던 일.
연우가 주인격의 자리를 꿰차고, 남은 인격들까지 모두 흡수하면서 완전한 칠흑왕으로 거듭난 지금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칠흑왕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존재, 혹은 사건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칠흑왕은 우주,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바. 사건이라는 것이 우주를 누비는 인과율의 실이 서로 엉키면서 발생한다는 걸 감안해 본다면, 인과율의 근본이나 마찬가지인 칠흑왕을 능가할 수 있는 무언가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그 밖에 있는 무언가인가?’
칠흑왕을 따르던 타계의 신들이 있지 않던가.
대부분 연우를 아버지로 인정했다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존재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경계의 거주자가 있었다.
물론, 경계의 거주자가 칠흑왕에게 얼마나 충실한지를 고려해 본다면, 이번 일과는 절대 연결 지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게 아니면…….’
천마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전히 ‘굴레’ 밖으로 떠돌아다니는 짐승이라든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짐승도 결국 ‘굴레’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는 건 똑같기 때문이었다. 황(皇)이 되지 못한 존재. 유일해지려다가 결국 밖으로 튕겨 난 그들이 어떻게 칠흑왕에게 손을 댈 수 있을까?
결국 천마가 던진 여러 생각 중에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도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아무것도 안 떠오르더라고요.”
차정우는 천마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우는 그가 창공 도서관의 사서이자, 현세의 균형추로 점찍은 자.
확실히 자신이 생각할 만한 것을 안 떠올렸을 리가 없었다.
“일단 찾아보지.”
천마가 위쪽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다.
[특급 사서가 지닌 접근 권한 및 명령에 따라, 창공 도서관이 반응합니다.]
이미 이 도서관은 천마의 일부라고 봐도 되는바. 모든 지식은 결국 천마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키워드, ‘차연우’. 키워드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 내 앞에 가져 와.”
[검색 결과를 도출합니다.]
차차차착!
곳곳에서 빛무리가 터지면서 수많은 책자들이 천장 쪽으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뱅글뱅글 돌면서 천마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런 책자가 척 보기에도 수천 권에 달했다.
연우가 태어났을 때부터 칠흑왕이 되기까지, 인세와는 전혀 무관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바.
거기다 원래 칠흑왕이 가지고 있을 데이터의 양까지 고려해 본다면, 저것만 해도 아주 사소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천마가 몇 가지 조건을 걸어 상당수를 제하니, 약 수백 권의 책자가 남았다.
“기술된 시간 순서대로.”
뒤죽박죽 책자가 서로 뒤엉키다가, 천마 앞으로 뚝 떨어지면서 일렬로 가지런히 섰다.
차정우와 녹턴은 그것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영지(靈智)가 높은 만큼, 창공 도서관의 기록들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게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샤논만 다르게 생각할 뿐이었지만.
『주인이 천마, 당신을 두고 했던 말이 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군.』
천마는 첫 번째 책자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 말고 흥미가 생긴다는 듯한 얼굴로 샤논을 바라봤다.
연우를 찾는 건 찾는 거고, 이건 이것대로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녹턴과 차정우의 시선도 의문을 잔뜩 안고 저절로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 절대자가 내린 다른 절대자에 대한 평가라?
“뭐라고 그랬는데?”
『폼 잡는 걸 참 좋아하는 양반이라고 그랬소.』
“……뭐?”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
“…….”
녹턴과 차정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천마의 미간이 조용히 좁혀졌다.
『그리고 관심 받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고도 그랬지. 그런데 지금 보니 확실히 그렇긴 그런 것 같군.』
샤논은 팔짱을 낀 채로 혼자서 이해했다는 듯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책자를 마구 뽑아서는 일렬로 세우는 모습이 별반 필요 없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흐, 흐흐흐.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쿡쿡쿡. 천마는 마치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 삼류 악당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게 웃어 대더니, 눈에 힘을 바짝 주었다.
“관심 종자가 관심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일 처리를 하는지 제대로 보여 주지!”
파라라락!
천마가 거칠게 책자의 커버를 넘기자, 책장이 힘차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천마의 두 눈은 당장 불이라도 뿜을 것만 같았다.
차정우는 얼떨한 얼굴로 천마의 옆 모습을 슬쩍 보면서 샤논에게 전음을 날렸다.
『……형이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그럴 리가. 그냥 이렇게 자극하고 나면 더 열심히 찾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거지.』
『하, 하하하. 그, 그렇지?』
차정우는 내심 샤논이 참 대단하게 보였다. 아무리 연우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이렇게 천마의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라면 간담이 서늘해서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은데, 참 배짱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 샤논이 살짝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닌데?』
『……정확하게 뭐라고 했었는데?』
『관심 받는 걸 좋아하는 만큼 아무도 관심을 안 가져주면 인성질을 부리는 성격 파탄자.』
『…….』
『굳이 이것까지는 말하지 않았어.』
『……잘했어.』
샤논의 태연한 대꾸에 차정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혼자서만 알고 가슴속에 묻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책장은 계속 뒤로 넘어가다가 도중에 한 장이 빳빳하게 수직으로 섰다.
“이건……?”
차정우는 그게 뭔가 싶어서 다급하게 그쪽으로 달려가며 물었고.
“아무 정보도 찾을 수 없다며? 그래서 너희 형이 ‘굴레’를 되감으려던 시점부터 시간 흐름을 순차적으로 되짚어 보려 한다. 이 장은 당시를 기록한 것이고.”
차정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천마와 칠흑왕을 둘러싼 정보는 우주 창생의 비밀과도 관련되어 있어 1급 사서인 그도 개방할 수 없는 고급 정보였다.
그것을 엿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면서도, 왠지 형이 꼭꼭 숨겨 뒀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스릴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차락.
천마가 손을 뻗어 페이지를 옆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 * *
[‘큰 굴레’가 되감기됩니다.]
촤르르륵.
어린 시절 보았던 비디오 영상에다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온전하게 있는 건 오로지 연우와 판트뿐.
“흐흐. 이거 참 몸이 계속 근질근질해져서. 어떻게 참을 수가 없겠는데…….”
판트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기적이 눈앞에 펼쳐지는 데도 불구하고, 별반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그저 곧 만나게 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몸을 푸는 데 여념이 없을 뿐.
피식.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상당한 시간이 흘러, 제법 많은 것이 변했어도 어떤 면에서는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한 녀석이 고맙기만 했다.
[칠흑의 변이가 이뤄지는 중입니다. 58%…….]
‘일단 초월에 영향이 직접적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고. 아니.’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오히려 더 빨라졌나?’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57%였으니, 되감기가 이뤄지는 동안 1%나 오르게 된 셈이었다.
최근에 변이 속도가 아주 더뎠던 것을 감안한다면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세계의 작동과 가까울수록, 전지와 전능에 가까워질수록 변이에도 그만큼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렇게 보면 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촤촤촤촤-
지구가 어느새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이면 세계(裏面世界) 위로 분명히 무너져 내렸던 탑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차곡차곡 조립되었다.
무너지는 탑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들이 다시 그 속으로 돌아갔고, 지구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던 르’뤼에가 다시 천천히 맨틀 안쪽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렇게 보니 내 스스로 여의봉을 세워서 내 배를 짓누르는 셈이로군.’
자학도 이런 자학이 없을 듯했다.
그때, 판트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되돌아가려는 시기는 언제유?”
“스승님이 온전한 모습으로 있어야 할 테니…… 그 사달이 벌어지기 몇 달 전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흐! 마을에 찾아가기 전에 그 빌어먹을 놈의 면상 깨부수고 와도 되우?”
무왕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원흉인 페이스리스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녀석만 먼저 제거해서 궁그닐을 빼앗을 수 있다면, 아스가르드의 개입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녹턴도 문제긴 문제였지만, 그쪽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페이스리스가 그를 만나 설득을 하기 이전의 시간대면 되니까.
“안 돼.”
“아, 왜!”
“팔 한 짝은 남겨 놔. 너만 해 처먹으려고?”
“흐흐흐. 그도 그렇군. 내가 생각이 짧았수.”
판트의 웃음소리가 커진 순간.
[되감기가 완료되었습니다!]
쾅!
판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곳이 몇 층인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였다.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아무래도 세월이 바꾸지 못한 판트의 면모가 또 하나 더 있는 것 같았다.
[확인되지 않은 플레이어의 방문을 확인했습니다!]
[신분을 조회합니다.]
[플레이어 ‘판트’와의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저장된 데이터와 큰 차이를 보여 판정을 보류합니다.]
……
[플레이어 ‘판트’가 현재 탑 외 지역에 거주 중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로 판명되었습니다.]
[해당 플레이어를 무단 침입자로 간주하여 축출을 시도합니다.]
시스템도 판트를 발견하고 방화벽을 발동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이 세계선에도 ‘판트’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판트와 저 판트는 명실상부하게 다른 존재. 애당초 갖고 있는 눈빛이나 실력부터가 달랐다.
‘저 천치가 스승님 이후로 외뿔부족의 중흥기를 계속 이끌어나간 부족장으로 평가받는다는 게 참…….’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과연 외뿔부족이 무사할까 하는 노파심이 가장 먼저 들었다고 하면 화내겠지?
하여간 연우는 쓸데없이 판트가 튕겨 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허공을 가볍게 건드렸다.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
[최고 관리자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새로운 플레이어를 등록하시겠습니까?]
연우는 자신이 데려온 판트를 새로운 플레이어로 등록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100층을 제외한 모든 층계에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권한을 삽입함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충돌에 대비했다.
[관리국이 시스템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원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98층의 신들이 당신의 존재를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98층의 악마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바짝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알아챘나 보군. 천계의 존재들에게 지금 자신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비칠까? 그런 생각과 함께 페이스리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보려던 그때.
‘역시.’
연우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왔군.’
[올포원이 강림합니다!]
콰르르릉!
연우 앞으로 새하얀 벼락이 떨어지면서 올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둘러싼 빛무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일렁이는 중이었다.
충격. 불신 경계심…… 다양한 감정이 그의 부동심을 마구잡이로 뒤흔들고 있었다.
『이만한 칠흑의 향이라니. 대체…… 그대는.』
올포원이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삭이면서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