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813화 (813/862)

13화. 흔적 (3)

올포원을 마주한 순간, 연우의 머릿속에는 온갖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를 보는 감정은 사실 복잡미묘했다.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원흉이었고, 몇 번씩이나 자신을 가로막았던 숙적. 그러니 여전히 그를 증오하는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그가 안타깝기도 했다.

연우는 하데스의 식령검을 통해 올포원을 흡수하면서 그의 지난 기억들을 모두 훔쳐본 상태. 그 때문에 그가 어떤 생을 살았고, 한평생 어떤 이상과 목표를 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도 있었으니 오죽할까.

‘이상에 잡아먹힌 괴물.’

그래서 연우는 올포원을 괴물이라고 지칭했다. 자기 자신에게 잡아먹힌 괴물. 그래서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 버린 자. 문제는 올포원, 그 스스로도 본인이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올포원은 연우와 여러 면에서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은 반면, 또 어떤 면에서는 정반대되는 대칭점(對稱點)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연우와 올포원, 둘 모두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은 똑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절망 어린 세월 속에서도 꿋꿋이 한평생 가족을 위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고.

올포원은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항상 주변의 행복에 대한 결핍을 느껴 결국 세계를 위한다는 자신만의 정의하에 스스로를 희생시켰다.

연우는 가지지 못한 채로 시작했고, 올포원은 모든 것을 가진 채로 시작했다.

연우는 어둠 속을 걸으며 잊히길 바랐고, 올포원은 화려한 빛이 되었다가 그 속에 사멸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걸 간절히 바랐고, 그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어느 삶이 더 숭고하고 가치가 있는지는 재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서로가 원하는 바는 달랐으나, 연우는 결국 쟁취하는 데 성공했지만 올포원은 손끝에서 놓치고 말았다는 것.

그래서 연우는 이 순간 여러 생각을 해야만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가녀린 존재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자신의 개인적인 삶 따윈 살지 않았던 이 슬프디슬픈 수도자(修道者)는, 이제 그가 손끝만 갖다 대도 힘 없이 사멸하고 말 것이다.

『분명히 느껴지는 기운은 차연우…… 그인데, 칠흑왕의 향이 강하게 풍기다니. 그렇군…… 그대는, 그래. 그대는 결국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나 보군.』

그러던 그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떨리던 올포원의 목소리가 낮게 착 깔렸다.

뭔가를 깊게 깨우친 듯한 목소리.

‘낮’이니 ‘밤’이니 하는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이니. 영겁의 시간 동안 이어지던 천마와 칠흑왕 간의 다툼도 알고 있었을 터.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칠흑을 완전히 손에 넣고도 이 ‘꿈’이 깨지 않았다는 건…… 그대가 칠흑, 그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플레이어 차연우가 사라져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었건만.』

이 당시 올포원은 천리안으로 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타나토스에서 탈출했을 당시에도 그랬고, 창공 도서관에서 탈각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에도 그랬다. 그때부터 연우는 올포원에게 줄곧 요주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연우가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니,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 그것도 외양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드높은 격을 지니고서.

탑 내에서는 최강자라 할 수 있을 올포원조차도 좀처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하는 격이라니.

천마에 버금가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올포원은 연우가 이미 ‘황’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나는 실패하고 만 것인가?』

올포원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그리고 씁쓸함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결국 마지막까지 나를 봐주지 않으셨나 보군. 아버지라면 아버지다운 모습이야.』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 사람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그리고 그 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무리 자신의 신념에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꺾이지 않을까?

신념이 꺾인 올포원이라니. 연우는 어쩐지 그 말이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여태껏 그가 알던 올포원은 절대 그런 걸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토록 단단했기에 오히려 더 부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척!

“……음?”

하지만 연우의 그런 우려와 달리, 올포원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조용히 자신의 가슴 앞으로 양손을 끌어모아 합장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한 글자, 한 글자.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는 그 목소리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졌다. 분명히 회한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힘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이대로 손에서 놓을 것 같으면 애당초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올포원을 둘러싼 배광이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그것은 탑 내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신앙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자신의 신념에서 비롯되는 힘. 그 신념이 자신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하여 빛나고 있었다.

“……그렇군.”

연우는 그런 올포원을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올포원은 올포원이었다. 비바스바트. 태양신의 이름처럼 그는 좌절과 절망의 미래 앞에서도 스스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자신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연우의 입가에는 냉소가 맺혔다.

“넌 지금 내 상대가 아니야.”

올포원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원한까지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연우가 지금 이 시간대로 온 것은 어디까지나 외유에 불과한 것일 뿐. 저렇게 골치 아픈 일에 엮이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최고 관리자의 권한에 따라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명령어를 제시해 주십시오.]

철커덩-

세계의 이면 속에 가려진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표적 ‘비바스바트’.”

『이건 무슨……!』

올포원은 한순간 드는 불안감에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곳곳에서 공허가 열리더니, 쇠사슬이 잇달아 튀어나오면서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촤르륵-

차차차창!

대수인이 거듭 작렬했다. 하나하나가 스테이지 하나쯤은 손쉽게 격파할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쇠사슬은 별 어려움 없이 날아오는 대수인을 격파하면서 올포원에게 달라붙었다.

연우의 의지가 잔뜩 들어간 데다가, 시스템이 직접 운영하다 보니 쇠사슬 하나하나가 전부 강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인과율, 그 자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팟! 파파팟!

올포원은 어떻게든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천리안〉

〈축지〉

〈대수인〉

탑의 세계를 관조하는 눈을 전부 쇠사슬에 집중해 이동 경로를 추측하고, 쇠사슬이 닿지 않을 곳으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미처 놓친 부분이 있어 맞닿으려 하면 빛을 터뜨려 각도를 억지로 틀었다.

하지만 올포원의 그런 화려한 기교에도 불구하고, 쇠사슬은 착실하게 그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고.

촤르르륵!

그러다 결국 오른쪽 발목을 크게 감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봉(封).”

새로운 명령어가 떨어지자, 다른 쇠사슬이 잇달아 튀어나오면서 사지를 꽁꽁 묶어 버렸으니. 그 때문에 올포원은 더 이상 권능 발동을 위한 수인도 맺지 못했다.

봉신의 힘이 작동한 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빛무리도 모두 바람에 놓인 촛불처럼 픽 하고 꺼졌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천마와 닮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다만 천마가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하고 장난기가 많은 인상이라면, 올포원의 모습은 무뚝뚝하고 굳건한 눈매를 자랑했다.

“놓……!”

올포원은 신경질적으로 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보다 쇠사슬이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촤르르륵-

올포원은 힘없이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리저리 발버둥 치는 게 느껴졌지만, 인과율의 사슬은 그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순간, 연우는 생포한 올포원에 대한 처분을 두고 고민했다. 그냥 이대로 봉인해 버릴까, 아니면 이전처럼 죽여야 할까. 결국 올포원과 자신 간에는 절대 메울 수 없는 해자가 놓여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우는 올포원에게 지난 원한을 갚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드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곧 화를 삭이고, 조용히 공허의 문을 닫았다. 그냥 나중에 천마에게 가져다주자. 그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속 편할 것 같았다.

물론, 정작 천마는 당황할 수 있겠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볼 만하겠는데.’

연우는 올포원을 만나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가볍게 웃었다.

‘물론, 저 치들을 나대게 할 수는 없겠지만.’

[98층의 신들이 갑작스럽게 펼쳐진 사건에 크게 놀라 비명을 지릅니다!]

[98층의 악마들이 지금이 아래층으로 내려갈 유일한 기회라고 여깁니다!]

올포원이 77층에서 가로막고 있던 신과 악마들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올포원이 너무 쉽게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도, 경계심보다는 저렇게 소란을 떠는 것이 참 천계답다면 천계다운 태도였다.

“폐(閉).”

[명령에 따라 98층과 다른 층계 간의 이동을 폐쇄합니다!]

철커덩!

다시 한 번 더 탑이 요란하게 떨렸다.

[98층의 신들이 이젠 스테이지 밖으로 아예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강한 충격을 받습니다!]

[98층의 악마들이 두려움에 젖은 채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천계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명령어만으로 탑을 제어하는 연우의 모습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였다.

어쩌면 천마보다도 더한 작자가 출현한 것일 수 있었으니까.

이미 연우는 이쪽으로 쏟아지는 98층의 모든 시선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향해.

싱긋!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도록 저들의 복장이 뒤집힐 수 있게끔.

* * *

“흐흐흐. 간만에 이렇게 몸 푸니까, 괜찮은 것 같으우.”

판트는 가볍게 팔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상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빨리 다녀왔군.”

“뭐, 크게 어려울 건 없어서.”

판트는 손에 쥐고 있던 자그마한 칼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가 잡았다. 칼. 바로 궁그닐이었다. 페이스리스를 처치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식후 운동거리에 불과하다는 투였다. 페이스리스의 정체가 무왕의 첫 번째 제자인 검무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강해지긴 많이 강해진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판트지만 말이지.’

연우는 저 여유만만한 판트의 얼굴이 곧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뭐유, 그 얼굴은? 뭔가 찝찝하게 만드는 표정인데.”

“그래서 팔 한 짝은?”

“으응……?”

순간, 판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페이스리스를 잡으러 가기 전에 연우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팔 한 짝은 남겨 놔. 너만 해 처먹으려고?

연우는 판트의 얼굴에 어린 당혹스러운 기색을 놓치지 않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얼굴에 어린 흥이 싹 가라앉았다.

“설마 안 챙겨 놓은 거냐?”

“……그거 농담 아녔수?”

“그렇군.”

휘휘휘휘!

연우를 둘러싼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움찔!

판트가 크게 떨면서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만에 만난 이 형의 말이 말처럼 들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아, 제기랄! 설마 그게 진심인 줄 어떻게 알……!”

“제기랄?”

“……!”

“이젠 형한테 욕도 하는 줄 아는군.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그동안 서열 정리 안 한 지 오래되었어. 그렇지?”

“아니……! 그게 아니잖수!”

판트는 억울함을 표하면서도 마력을 단박에 위로 끌어 올렸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연우의 실력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한 마음에 호승심이 고개를 불쑥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르면.”

팟!

판트가 어떻게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연우는 어느새 눈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맞아야지.”

“자, 잠……!”

판트가 절실한 마음으로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연우의 주먹은 그보다 한 박자 빨리 판트의 한쪽 눈덩이로 정확하게 틀어박히고 있었다.

빠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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