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흔적 (4)
탑이 세워진 이래, 선주 종족 중에서도 외뿔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대단했다.
비록 인원수는 엘프나 드워프 같은 다른 아인종에 비해 훨씬 적을지 몰라도, 수적 불리함 정도는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그들 개개인은 뛰어난 기량을 갖춘 플레이어라 할 수 있었으니.
그 때문에 아무리 거대한 세력을 일군 클랜이라고 해도 굳이 외뿔부족과 대립각을 세우는 곳은 없었고, 외뿔부족 역시 세력 균형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플레이어 세계와는 거리를 두곤 했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외뿔부족은 항상 평화로웠다.
“그러니 이번 안건은……!”
“아, 그냥 키우자는 쪽으로 하자니까! 다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하여간 핵꼰대들이랑은 이래서 말을 섞으면 안 된다니까!”
“뭐, 인마? 핵꼰대애애애? 다섯 살이 되도록 용변도 제대로 못 가리는 거, 기저귀 채워 준 게 나인데 그딴 소리를!”
“거 옛날 일은 꺼내지 마십시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영감이 이십 년 전에 우리 브루나 이모한테 고백했다가 차여서 질질 짠 거 다 불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이 새끼가!”
“내가 왜 당신 새끼야! 울 엄마, 아빠 새끼지!”
다시 말하지만, 평화로웠다.
성격들이 죄다 호전적이고 모가 나 있다 보니 자주 멱살을 잡고 드잡이질을 하긴 하지만, 마을은 시끄러울지언정 평화롭긴 아주 평화로웠다.
“너 이 새끼, 당장 밖으로 나와! 오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테니까.”
“흐흐. 그런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나야말로 영감님 뿔을 깎아다가 피리로 만들어 버리려니까 각오하쇼!”
“오오. 저들 두 사람 결국 한판 붙을 거 같은데?”
“뭐 해, 이것들아! 어서 안 일어나고! 너는 침 닦고! 얼른 대련장으로 가자!”
“싸움이다!”
“또 싸움판이 벌어졌다아아!”
“개판이다!”
분명히 마을의 주요 사안을 두고 의견을 나누던 부족 회의였건만.
어느새 자리는 의견 충돌이 가장 강하던 두 의원들의 명예 전투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여기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에도라는 우르르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저렇게 싸움이 붙게 된 이유? 사실 저것도 별것이 없었다.
별다른 이슈라고 할 게 없는 마을 회의는 보통 누구 집에서 키우는 개가 이번에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느니, 어디에서 키운 작물이 흉년이라서 거름을 좀 더 줘야겠다느니, 요즘 비가 드문드문 내리던데 마탑 새끼들을 족쳐서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등이 전부였다.
여느 시골 마을에서 흔히 나올 수 있을 법한 것들. 그만큼 놀이거리라고 할 만한 것도 크게 없어서 유희라고 해 봐야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게 전부였다.
할 게 없다 보니 무공이 발달한 게 틀림없다. 에도라는 분명히 그럴 거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내버려 둬도, 온통 주먹구구식인 경영이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질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지.’
에도라는 두 눈을 지그시 가늘게 뜨면서 회의실의 안쪽에 앉아 있는 아버지, 무왕 나유를 노려봤다.
드르렁, 피유우-
드르르렁.
무왕은 누가 보더라도 자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놓고 자고 있었다. 몸은 용케 쓰러지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다지만, 팔짱을 낀 채로 코까지 고는 모습이…… 저절로 눈살을 좁히게 만들었다. 심지어 코끝에서는 콧물이 방울이 되어 풍선처럼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대장로도 그런 무왕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그때.
“이봐요, 족장. 족장!”
“으, 으으응? 무슨 일이라도 있나……?”
다들 밖으로 나가던 중에 누군가가 그를 흔들어 깨운 뒤에야, 무왕은 헐레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두 눈을 끔뻑거리는 것이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싸움판 났는데, 족장은 안 가시려고?”
“응? 싸움판?”
“아, 그렇다니까. 파초랑 데슬리랑 지금 한판 붙는다는데?”
“호오? 오오오. 그런 재미난 게 있는데도 놓치면 이 나유가 아니지.”
그런 건 좀 놓쳐도 되지 않나요. 에도라는 목젖까지 올라온 딴죽을 억지로 삭여야만 했다. 부족의 행사보다 싸움박질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족장이라. 저러고도 외뿔부족의 중흥기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장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발끈하면서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 숨을 들이마시는 그때였다.
“……음?”
“어?”
무왕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실실거리면서 대련장으로 넘어가려다 말고, 갑자기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다른 방향으로 고래를 황급히 돌렸다. 마찬가지로 대장로도 뭔가를 느꼈는지 대번에 표정이 바뀌며 신중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
에도라만큼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파아앗!
팟-
무왕과 대장로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가.』
어머니, 영매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엄마? 그게 무슨……?”
『천기가 변하고 있어. 뭔가가 벌어진 게 틀림없는데…… 여기서는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구나.』
에도라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어머니가 ‘모르시는’ 게 있다고? 영매는 시조인 소호 금천의 축복을 받아 인과율에 접촉이 가능하고, 거기서 원하는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계에서는, 아니, 어쩌면 천계를 통틀어도 전지(全知)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모르겠다는 표현을 쓰다니. 에도라는 등골이 저절로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그리고…….』
또 뭔가가 있는 걸까?
『조금 전부터 카인이 감지되질 않더구나. 마치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
그것이면 충분했다.
‘대체.’
에도라는 무왕과 대장로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마음은 어느새 조바심으로 가득 찼다.
‘대체 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제 애간장을 태우려 하시는 건가요, 오라버니?’
* * *
“오. 오오오. 온다!”
판트, 정확하게는 ‘미래’에서 건너온 판트는 강대한 기운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자 잔뜩 들뜬 기색이 되었다.
한쪽 눈에 시퍼런 멍을 단 채로 환호를 지르는 모습이 보기에 우습 긴 했지만, 판트는 다른 어느 때보다 희열에 잠겨 있었고, 또한 진지했다.
다시는 뭘 일이 없을 거라고만 여겼던 아버지와의 재회!
그것은 그가 그토록 고대했던 순간이었으니.
탑이 무너진 이후. 판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던 외뿔부족의 왕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최종적으로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고, 외뿔부족은 다시 승승장구하며 옛 기상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는 동안 판트는 항상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무왕이 주는 그림자를 헤쳐 나와야만 했으니.
그 때문에 판트에게 있어 무왕은 언제부턴가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사적으로는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지만, 공적으로는 짊어지기 버거울 만큼 너무 큰 굴레를 던져 주고 훌쩍 떠나 버린 무책임한 왕이었으니까.
그리고 판트는 외뿔부족의 새로운 중흥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데도, 여전히 무왕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끝내 무왕보다 더 위대하다는 표현만큼은 손에 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판트는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아버지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자신이 걸어온 길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며, 더 높다는 것을 말이다!
파직, 파지지직!
쿠르르르……!
판트의 발끝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핏빛 뇌기가 삽시간에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혈뢰(血雷).
뇌정권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대장로가 직접 개조하여 창안하다시피 하였고, 판트에게로 넘어오면서 더욱더 발전된 외뿔부족 최강의 무공.
판트는 무왕과 충돌하기에 앞서 자신의 전열을 되짚고 있었다.
그리고.
“……흠?”
뒤늦게 연우와 판트가 있는 곳으로 도착한 무왕은 묘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건 뒤따라온 대장로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영감님의 무공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혈뢰가 맞다. 하지만, 흠! 그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군. 만뢰(萬雷)라…… 머릿속으로 구상하기만 했던 것인데, 실제로 완성된 것을 보게 될 줄이야.”
만뢰. 그것은 따지자면 혈뢰의 오의, 혹은 최종 비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핏빛 뇌기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힘.
오로지 파괴에만 몰두한 그 초식이 발현되는 순간, 세계에는 대재앙이 찾아오게끔 되어 있었다.
당장 판트를 둘러싼 혈뢰가 만뢰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트리거가 작동되고 있었다. 충돌하면 즉시 발동될 수 있도록.
대장로는 자신이 언제나 상상으로만 펼쳐 보고, 구결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던 영역을 직접 보게 되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발동하고 있는 자가 동족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분명히 부족 내에 저만한 실력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이 아닌 외부에서 탄생한 실력자인가 싶어도, 좀처럼 짐작이 가는 자가 없었다.
애당초 저만한 실력자라면 탑의 세계에서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그 얼굴이 ‘어린’ 판트가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사뭇 닮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왕과 혈연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을 듯했다.
게다가 정체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신의 독문절기인 혈뢰를 저토록 완벽하게 익히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저만한 자라면 어디선가 소문이 났을 텐데, 누군지 좀처럼 짐작이 가질 않는군. 옛날에 은퇴했던 선배인가? 하지만 그러기엔…….”
“영감. 나이 먹었다고 너무 시력이 안 좋아진 거 아냐?”
“뭐야?”
“아니. 보면 모르겠냐고. 저거…….”
무왕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쿠르르. 동시에 지반이 크게 요동쳤다. 기운을 끌어올리자, 중력의 법칙이 흐트러지면서 땅에 널브러져 있던 돌가루가 하나둘씩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판트잖아.”
“판트……?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저자는……!”
“강하지. 하지만 판트가 맞아. 지금 마을에 있을 코찔찔이가 나만큼 크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는 건 ‘굴레’를 돌렸다는 건가?”
“아마도?”
“허!”
대장로는 헛웃음을 흘렸다. ‘굴레’. 그로선 말로만 듣던 개념. 천계에서도 주신이나 창조신 급에 다다른 존재들이나 그나마 손을 댈 수 있다던 것을, 미래의 판트가 그걸 이용해서 찾아왔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장로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왕은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겠다는 듯, 판트가 내뿜는 핏빛 뇌기 너머에서 조용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존재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씩 웃었다.
연우.
그의 제자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다만, 저곳에 있는 연우는 자신이 알던 연우와 완전히 달랐다.
무왕으로서도 좀처럼 크기를, 격을, 존재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 컸다.
영매가 말하지 않았던가. 연우가 갑자기 ‘사라진’ 것 같다고. 그 말은 틀린 것이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인지를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커져 버린 것이었다.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공기는,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지하는 이가 없듯이, 연우도 그렇게 되어 버렸기에 인지하지 못한 것일 뿐이었다.
‘아니. 따지자면 그런 것보다도 훨씬 근본적인 것이지. 세계…… 그 자체.’
무왕의 입장으로서는 하루아침에 제자가 너무 커져 버린 채로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웃음이 더 터질 수밖에 없었다.
“너희 둘 모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만.”
고오오오-
무왕을 둘러싼 기세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불태울 것처럼 이글거리던 핏빛 뇌기가 떠 밀려 나는 것이 보였다.
대장로는 이곳이 곧 엉망이 되겠다는 생각에 가볍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멀찍이 물러섰고, 판트는 기억 속 아버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정하다는 사실에 강한 호승심을 느꼈다.
“고생이 아주 많았겠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왕이 툭 하고 던진 그 말이 끊어오르던 판트의 심장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저 말.
한없이 제멋대로인 것 같아 그를 골치 아프게 만들면서도, 때로는 가슴을 어루만져 주던 스승님의 따스한 저 말이 그리웠다.
“그리고 고맙다. 그러고 나서도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준 것에.”
“…….”
“…….”
연우도, 판트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왕의 미소가 커졌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부딪쳐 주마. 아들아. 제자야. 너희들이 바라던 것도 이것이었던 것 같으니까.”
환영 인사로 땅바닥을 두어 번 정도 구르는 것도 뜻깊지 않겠느냐? 무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판트도 기다렸다는 듯이 트리거를 당기면서 만뢰를 전개했다.
콰르르르릉!
쿠르르르, 콰콰콰-
삽시간에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던 중에.
“오라버니!”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연우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무왕과 마찬가지로 꼭 듣고 싶던 목소리가, 보고 싶었던 그리운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에도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