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외뿔 (2)
‘……미치겠군.’
차라리 적과 싸우는 게 훨씬 낫겠다. 아니면 심연 속에서 현인-이블케와 한창 대립하고 있을 때가 나을 지도 모르겠다.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는 탓이었다.
연애 한 번 못해 본 모태 솔로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창피인 건지…… 누가 본다면 숙맥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에도라와 깊은 관계를 맺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당시의 상황이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어렵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그만큼 이 순간이 간절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거였다.
손을 가져다 대면 톡 하고 부러질까 봐.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릴까 봐.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서 허망하게 사라질까 봐. 그게 두려웠다.
언제나 바라고 또 바라던, 평범한 행복. 그것이 연우에게는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조…… 금 어수선하죠? 급하게 치운다고 치웠는데…… 참 어렵네요. 하, 하하…….”
에도라 역시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자신의 방으로 연우를 초대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차라리 연우가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면 똑같이 분위기에 편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우의 얼굴이 붉으니 자신 역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에도라는 침대 밑으로 까꿍 하고 머리를 빼꼼 내민 양말을 뒤늦게 발견하고, 황급히 발로 걷어찼다.
이런 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어떤 꼴로 사는지 연인에게 적나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여자나, 남자나 모두 똑같았다.
“음, 어, 음……!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네.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요?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과일 좀 씻어 놓은 게 있는데 그것도 같이 가져올게요.”
에도라는 여기에 더 있다간 정말 몸에서 나는 열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른 채로 이리저리 횡설수설하다가, 뭔가를 가지러 나가려고 했다. 먹을 거라도 가져와야 왠지 이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라버니?”
에도라는 연우의 옆을 지나치려다 말고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연우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탓이었다.
에도라는 왜 그러나 싶어 연우를 돌아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고 말았다.
연우가 그녀를 잡아당기면서 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와락. 가슴팍에 얼굴이 부딪쳤다. 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했지만, 에도라는 어쩐지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우가 어느새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에도라는 연우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어깨와 팔은 자신을 가볍게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숨결이, 간지러웠다.
숨결이, 따뜻했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숨결보다 더 간지러웠고 따뜻해서 가슴 아래까지 파고들어 심장에 닿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별다른 미사여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말. 단 두 마디에 연우의 진심이 짙게 묻어났다. 에도라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달려왔고, 그녀의 옆에 있고 싶어서 나란히 걸었으며, 그녀를 이렇게 안기 위해서 싸우고 싸웠던 일상의 반복.
“……저도요.”
그리고 그건 에도라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품에서 잠시 얼굴을 떼서 연우를 올려다봤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손끝이 눈을, 코를, 입술을, 볼을, 턱을, 귀를 쓰다듬을 때마다 연우는 심장이 울렁이는 기분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오라버니를 원망도 많이 했어요. 말없이 훌쩍 가 버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떻게 사람을 기다리게만 할 수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요즘 같은 세상에 망부석도 아니고, 왜 저는 오라버니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했었어요.”
“…….”
“그냥 때려치울까? 내가 지금 하는 건 그냥 미련한 짓이 아닐까. 줄곧 계속 이러고만 있던 게 습관이 되어서 그냥 무의미한 짓만 반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지만.”
에도라의 눈가가 살짝 곡선을 그렸다.
“그러기가 싫었어요.”
“…….”
“이따금 오라버니를 생각할 때면 짜증도 나고, 분풀이도 하고 싶었는데…… 그 뒤에는 그냥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더라고요.”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그 소망은 까마득한 세월 동안, 에도라를 계속 버티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정말 화났던 게 싹 풀리는 거 있죠? 하여간 이래서 연애에서는 누가 더 많이 좋아하면 안 된다니까. 사람이, 어, 밀당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럼 내가 너무 애간장이 탈 것 같은데.”
“오라버니는 그런 정도로만 끝나는 거잖아요? 저는 속이 썩어 문드러졌었다니까요? 말 나온 김에 진짜 해 볼까…….”
“그, 그건……!”
연우는 선뜻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에도라가 정말 그럴까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지 말라고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지만, 문제는 말릴 만한 이렇다 할 명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에도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밖에서는 칠흑왕이니, 뒤통수니, 인성질이니, 뒤끝이라느니, 하면서 온갖 소리를 다 듣고 다녀도, 자신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니 귀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귀여우니 이번 딱 한 번만 봐주자. 에도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싱긋 웃었다.
“이제는 어디 안 가실 거죠?”
“당연하지. 어차피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왜 없어요?”
가벼운 말장난으로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둘 사이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연우는 순간 에도라의 눈빛에서 여태 잘 보지 못했던 짓궂은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재미난 장난을 치려는 작은 악마 같은 모습을.
에도라는 연우의 목깃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고, 연우의 얼굴에 당혹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럴수록 에도라는 더 기세등등해졌다.
“여기 있는데.”
에도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연우를 힘껏 밀었다. 털썩. 연우가 뒤로 넘어간 자리. 푹신한 침대가 있었다.
“에, 에도라?”
연우가 더욱 당황했다. 사실 넘어지는 와중에도 균형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고 봐야 했다. 한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에도라가 어느새 연우의 상반신 위로,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타 있었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쳐다보는 에도라의 얼굴은 더욱더 짓궂은 악마의 것이 되어 있었다. 마치 맛있는 만찬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 이 순간, 연우는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양이. 그리고 에도라는 군침을 흘리는 늑대가 되어 있었다.
“이젠 어디도 못 가게 손발을 꽉꽉 묶어 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에도라는 그렇게 연우가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예고했고.
끝없는 밤이 시작되었다.
* * *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뭔가요?”
서로가 서로를 탐하던 시간. 전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순간들이 지난 뒤, 연우와 에도라는 한 이불 아래에서 서로를 꽉 끌어안은 채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그들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의 화제는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아, 튜토리얼이요?”
“어.”
“그때가 왜요?”
“그때 왜 내게 관심을 보였던 거야?”
“……오라버니.”
“음?”
“지금 되게 재수 없었어요. 우우. 자뻑.”
“그, 그게 아니라…….”
“호호. 농담이에요.”
연우는 자신을 놀리는 데 재미가 단단히 들린 것 같은 에도라를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건 자신이 헤노바에게나 하던 건데…… 도리어 자신이 그 입장이 되고 보니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어쩐지. 앞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내내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벌써부터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사실 그때 좀 신기했어요.”
“신기했다고?”
“예. 우리 또래에서 저와 판트, 그 멍청이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리고.”
“……?”
“절 보고 별 동요가 없던 사람도 처음이었고요.”
“……그거.”
“자뻑 아니냐고요? 맞아요. 자뻑.”
“…….”
그냥 이렇게 순순히 인정을 해 버리니, 어쩐지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렇잖아요? 저 정도면 외모도 조건도 다 완벽한걸요. 얼굴 예뻐, 피부 좋아, 머릿결 뛰어나, 아빠가 무왕이고 엄마는 영매야. 신분은 또 공주님이지…… 거기다 힘도 세고, 돈도 많아. 이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맞는 말이긴 했다.
에도라는 검지로 머리끝을 배배 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사람이 신비감을 보인답시고 가면 쓴 채로 자기 원하는 것만 가지고, 아주 쿨하게 떠나는데…… 그게 또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연우는 어쩐지 아침 드라마에서 자주 듣던 말이 떠올랐다. ‘내게 이러는 건 네가 처음이야.’ 클리셰 중의 클리셰였는데…… 정말 현실로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뭐, 사실 우리 부족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얼굴보다는 능력이긴 하지만요. 아무튼…… 그 뒤로 판트 오빠랑 같이 다니면서 살펴보니까 이래저래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았고. 알죠?”
만약 튜토리얼 당시에. 판트와 에도라 남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니, 애당초 그 지겹디지겨운 심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모르겠다’였다.
연우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봐도 그들이 옆에 있었던 덕분이었으니까.
그러니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에도라를 끌어안는 연우의 양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 * *
짹짹짹!
커튼 사이로, 창살을 뚫고 햇볕이 들어왔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에도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언제 잠들었던 거지? 해가 밝은 걸 봐서는 벌써 오전은 지난 것 같은데…… 에도라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밤새 연우와 즐겁게 이리저리 떠들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미처 깨 닫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수다만 떤 건 아니긴 했다. 이리저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뜻 눈이 마주쳐서 불꽃이 튈 때면 또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곤 했으니까.
에도라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다,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여야만 했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히 침대에 있어야 할 연우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신 거지?
에도라는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머리맡에 놓인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밖에 산책 나갔다 올게.
에도라는 그제야 자기도 모르게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매번 연우가 말없이 훌쩍 떠나기 일쑤이니, 이번에도 그런 줄 알고 놀랐던 모양이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고 그러는데도 걱정부터 앞서는 것을 보면…… 참 이것도 못할 짓이다 싶었다.
그래. 이건 전부 다 오라버니 때문이야. 매번 내 속을 썩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내가 놀라겠냐고……! 에도라는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예쁘고, 집안 좋고, 돈 많고, 힘도 센 자신을 기다리게만 했던 연우가 괘씸해도 너무 괘씸했다.
‘그래도 뭐, 이렇게 한 정성이 있으니까…… 이번엔 봐준다.’
제 딴에는 노력한답시고, 그녀가 걱정할까 봐 메모까지 남기지 않았나. 비뚤비뚤한 글씨체가 못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이 잘생겼으니 퉁 쳐주기로 마음먹었다.
메모를 만지는 내내, 에도라의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주변에 산책할 만한 곳이 있었던가?
* * *
탑 외 지역에서도 수많은 대장간과 노점상이 잔뜩 밀집되어 있는 상인 구역.
그곳은 연우의 기억만큼이나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77층에서 올포원이 실종되었다는 것도, 98층의 신과 악마들이 유폐되었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지 그들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열의와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연우는 그들의 면면을 슬쩍 살피다가, 이윽고 익숙한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멈춰 선 대장간 앞에서…… 간판을 잠시 그윽하니 바라봤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라서 그런 걸까? 선뜻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멍청하게 거기 서서 뭐 하느냐?”
뒤쪽에서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계시는 게 아니었나? 연우가 황급히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에도라와 마찬가지로 너무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바로 그곳에. 품에 이런저런 물건을 잔뜩 껴안은 헤노바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